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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못한 채 남은 죽여온 자들, 칠흑 같은 사회의 이면(物體)과 치부, 그 어둠을 그대로 드러내는 ‘죽고 싶은데 살고 싶다.’를 읽었다.



* * *



나는 어떠한 종류의 종말이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죽음이나 종말에 관한 서술은 내가 아는 알고 좋아하는 것과는 분명하게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죽음으로서 완성되는, 죽음으로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죽음을 미화하는 매체들을 나는 좋아했다. 이 책은 그러한 가치관을 지내며 비극을 찾아온 나를 자책시키게 만드는 잔혹하고도 무척이나 비현실(非現實)적인 회고록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부유한 이들이 잇달아 자살함에 따라, 최근 몇 년 동안 조현병, 우울증, 강박 장애 등과 같은 뇌에 관련된 정신적 질환에 대한 주목도도 높아졌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어간 이들, 수많은 찬사와 존경을 받아왔음에도 가슴을 찌르는 단 한 명의 한마디에 죽어간 이들,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이 없었던 이들,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남겨진 이들은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며 조용히 고인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으나, 사실관계를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은 채 무지와 오만 편견과 혐오로 마지막까지 고인과 이해관계자들을 모독한 이들도 수없이 존재했다.


이 책에는 떠나간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죽어갔는지, 수많은 사람이 터부시하고 등한시하는 작은 차별과 편견의 요소들이 얼마나 ‘뇌 질환’을 앓고 있는 개개인에게 있어 큰 재앙과 절망을 불어오는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뇌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 잔혹한 진상과 민낯이 여과 없이 적혀져 있었다



* * *



저자의 이야기


“그때 병원을 갔어야 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 증세가 환청이나 환시라는 것만 알았어도 병원에 데리고 갔을 겁니다.”


선혜의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이고 어머니는 권사로서 독실한 크리스천들이었다.

“기도합시다, 영적인 공격입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실 겁니다.”

이때부터 가족들은 기도에 매달렸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선혜의 두 여동생도 기도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 기도와는 상관없이 선혜의 병세는 계속 악화하였다.


교회의 중책들은 선혜를 붙들고 소리치며 기도했다. 그녀가 반항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녀를 몸으로 누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수라는 것을 했다. 집에서 난동을 부리는 선혜의 팔다리를 가족들이 잡고 기도를 했다. 오빠는 온 힘을 쓰며 반항하는 여동생을 모르며 “귀신아 떠나가!”라고 소리쳤다. 어머니 또한 울면서 그리 말했다.


누워있는 그녀는 오빠의 눈을 쳐다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오빠 나 귀신 들린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그 거짓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목사는 가족들의 신앙과 기도에 문제가 있다며 더욱 ‘간절한’ 기도를 요구했다. 그래서 가족들, 선혜의 아빠와 엄마, 오빠, 두 여동생은 더욱 기도에 매달렸다. 집은 날마다 기도 외치는 소리와 선혜의 발작으로 시끄러웠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도데체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선혜를 진찰한 의사의 첫마디였다.


“우울증, 조현병이 복합적으로 발병해서 아주 악화했습니다. 이런 병은 발병 초기에 치료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정상생활도 가능했죠, 너무 오래도록 병을 악화시켰군요.” p. 21~24



* * *



잘못된 믿음



의지할 곳이 없었던 한 소녀가 마지막으로 동아줄을 잡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던 가족으로부터 받은 고통과 폭력, 혹독한 경쟁 속에서만 인간은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한 군인, 그런 군인 아버지 밑에서 폭력과 고통만을 배우며 자란 두 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파병으로 얻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거리를 나돌던 한 청년,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것 외에는 가족과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던 가장,


뇌가 망가져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구가하지 못하게 된 이들의 공통점은 ‘때를 놓친 치료’ 였다. 과학과 의학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믿는 잘못된 종교적 신앙, 수십 년의 인생을 살아오며 축적된 편견과 선입견, 치료를 받는 이가 받게 될 무지한 타인으로부터의 시선과 혐오, 그것들을 두려워한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들은 병세를 조기에 완화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저자의 동생처럼 10년 뒤에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다.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살고 싶었음에도, 살아남고 싶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사회의 이면에 가려진 수많은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당신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서점에 놓여 있는 이 책을 훑어보고 지나치는 일 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의 당신은 어째서 그들이 죽어가는지 알지 못하니까. 당신이 모르는 동안 그들은 아직도 죽어가고 있으니까.


“지붕에서 물이 새는데 성경에서 답을 찾으면 됩니까? 하나님이 화냅니다. 빨리 지붕수리공을 불러야죠. 뇌 질환도 다른 질병의 대처방법과 같습니다.” p.194



* * *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 모두가 같은 죽음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음에도 태어난 국가, 태어난 가정, 자라온 환경에 따라 태어나서부터 수많은 불합리를 겪어가며 살아간다. 차라리 그것만이면 다행일 것이다. 전쟁, 강도, 강간, 살인 등 선하게 살아왔음에도 주어진 삶을 모두 구가하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 또한 이 세상엔 너무 많다.


그들은 어째서 죽어야만 하는가, 그들을 죽인 이들은 어째서 그런 행위를 했어야만 하는가, 그들의 의지는 어느 곳에서부터 온 것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뉴스나 문건을 통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경우를 수없이 보면서도 그 불행이 어디서 오는지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남들의 행복을 앗아간 또 다른 이들에게 혀를 차며 그들을 비난하기만 했다.


작중에서 뇌 질환으로 죽어간 이들은, 대부분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병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를 거부하도록 강요했던 주변 인물들로 인해 죽어 나갔다. 그런데도 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종교적 관점에서의 악한 의지’ 즉 ‘사탄’을 원인으로 규정했다. 직접 타인의 생명과 그 삶을, 그 행복을 앗아간 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기에,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은 죽어서 비로소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기에, 내가 유일하게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난 신을 믿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하나만 믿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난 어른이 되지 못하니까, 나의 소중한 사람이 불합리한 일을 당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를 빌미로 용서를 언급하는 사람의 어금니를 망설임 없이 부숴버릴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이해를 할 수 없음에도, 납득을 할 수 없음에도, 나는 저자의 의견을 조금도 반박할 수 없었다. 죽어서라도 신에게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 빌어먹을 세상을 좀먹고 있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만 한단 말인가?


“미셸의 이야기도 잘 들었습니다. 그 아이 부모의 변화도 알겠습니다. 저도 아픈 민수를 통해서 많이 반성하고 깨달았어요. 그렇지만 아직도 고생하는 미셸이나 민수는 무엇입니까? 그 젊은이들이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며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꼭 그런 희생의 방법을 택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왜 꼭 제 아이를 통해서 일하셔야만 합니까?” p. 235~239



* * *


그럼에도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동생 선혜가 조현병이 나아지고 나서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을 무렵 여동생이 유방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암은 여러 곳으로 퍼져 시한부 인생의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제 가족들은 동생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똑똑하고 예쁜 아이가 젊은 시절을 고난 가운데 보내고 이제 나을 만하니까 또 다른 병인 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때 환자인 선혜는 웃었다. 의사로부터 그녀의 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얼마 못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낙망하고 있는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나는 괜찮아. 이제 하나님 만나고, 엄마 만나게 됐잖아.” p. 239~240



. . .



민수는 수요일 저녁마다 교회 주차장 안내를 했다. 수요예배 때 주차 공간이 넉넉지 않은 주차장에서 차량을 안내하고 배치하고, 주차장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복잡한 일을 잘 수행할 수 없는 민수에게 이 같은 단순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은 잘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달랐다. 젊은 남자가 할 일이 없어 수요일 저녁에 교회 주차장에서 별 소득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민수에게 더 ‘나은’ 일들과 모습들을 끊임없이 기대했던 것이다.


“민수가 불쌍해요, 젊은이가 남들처럼 밖에서 활발한 활동이나 여가도 즐길 줄 모르고, 이런 일밖에 못 하니까요.”


“민수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할까요? 매주 수요일 저녁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이 사람들의 차량을 안내해 주고 차량소통을 원활히 해 주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왜 하필이면 우리 아이가 수요일 저녁에 교회 주차장에서 그런 일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 그건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는 편견입니다. 민수는 어머니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무엇보다도 값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민수가 아니면 이 귀한 일을 누가 할 것입니까? 일류대학을 나온 젊은이가 이곳에 와서 하겠습니까? 좋은 직장을 다니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인생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이 일을 하겠습니까?”


“민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는 그 앞에서 힘과 보람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교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의 봉사를 통해 수요예배를 누리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이 세상은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그를 기뻐하고 칭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p. 24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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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을 조금도 믿지 않고 신앙을 터부시하던 나는 고통 또한 삶의 일부이며 행복의 원천이라는 그의 철학을 통해 처음으로 저자의 의견에 공명할 수 있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제일 밝게 빛난다. ‘행복의 원인’ 에 따라 행복의 질과 높낮이를 규정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을 구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평생 두 다리로 걷지 못했던 사람이 마침내 걸을 수 있게 된다면, 평생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이 마침내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평생 귀가 닫힌 채로 세상과 단절되었던 사람이 마침내 세상의 모든 소리와 공명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고귀하고 고결한 행복이겠는가?


뇌 질환으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이 느끼는 작은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개개인의 가치관과 철학으로 행복의 높낮이를, 행복의 척도를 저울질하더라도 그들의 행복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정말 어쩌면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행복을 우리는 평생 두려워하며 느껴보려 하지도 않을 테니까.


아는 것은 곧 소유하는 것이며 경험은 삶의 질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 * *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북극곰이 바다코끼리를 사냥하는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수천 마리가 모여 생활하는 바다코끼리들을 향해 굶주린 한 북극곰이 필사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잔혹한 포식자의 위치에 군림하고 있는 그 짐승 또한 굶주림에 괴로워하며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죽음에 저항하고 있던 것이다. 바다코끼리 수천 마리가 떼를 지으며 단 한 마리의 북극곰으로부터 도망가기 시작한다. 당연하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북극곰의 배부름과 안위를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건 북극곰이 아니였다.


모든 이들이 정신없이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는 와중에, 무리로부터 뒤처지거나 넘어진 나약하고 어린 바다코끼리들이 다른 이들에게 무참히 밟혀 수없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곰이 원했던 것은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만 했던 단 한 마리분의 생명뿐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2020년 11월 9일 네이버 실시간검색 1위는 조현병이었다. 조현병에 걸린 딸을 23년간 병간호하다 끝내 살해해버린 한 여성에게 1심에서 징역 4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사 댓글에는 딸을 무참히 살해한 여성의 변호로 가득했다. 조현병, 조울증, 우울증, 강박 장애 등과 같은 뇌 질환들에 대한 무지와 오만, 편견과 독선, 혐오와 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배부름에 취해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남의 행복을 평가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고통의 값어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가지를 잊어버리고 만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나의 모든 감정을 글 한 페이지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이곳에 흩뿌려 놓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회상해내고 싶었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제발 이 책을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글에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난 결국 이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이들은 내가 아니니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이 아니니까. 나는 이들의 얽히고 꼬이고 썩어 문드러져 버린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도, 결국엔 이해하기도 싫으니까.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