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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제가 이번에 알게 된 스티브 케이브라는 철학자가 불멸에 관해서 참신한 주장을 했습니다 ,

그는 불멸에 이른는 길을 4가지라고 말합니다. 부활,영혼불멸,불로불사,유산

그는 이 4가지 모두 모순적이고 의미없고 비합리적인 해결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결론은 불멸에대한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는것입니다.부활은 우리의 부활할 육체가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되었기에 신조차도 나의 완벽한 육체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것이고 영혼불멸은 과학적으로 영혼이 있다는 논증이 없으며 철학적으로 영혼의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불로초는 우리 물질 우주는 결국에 멸망할 것이며 모두가 불로초를 먹는다면 이 우주가 포화 상태가 될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유산이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지만 우리의 업적,인생,모든것들이 잊혀질것이며 결국에는 유산을 통한 생존또한 불가능합니다.왜냐하면 우리 인류조차도 멸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론은 과거 슬픈 불멸주의자란 책에서 나온 주장이었던 죽음조차 없에게할 수 없는 의미를 찾자가 결국에는 실패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그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죽음은 별거아니다 우리는 죽고나서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며 죽기전에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것은 타당하지 않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오히려 영생이야말로 지옥이다. 왜냐하면 한번 영원히 똑같은 인생을 경험한다고 하자 금방 질려버릴것이다. 죽음은 우리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영생은 지금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야한다 그 이유는 이 세계가 단 한번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대한 공포는 외부 존재에대한 분노와 폭력을 유발한다.

죽음이 인류문명을 진화시켰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을 포기한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말아야하며 그것의 해결책은 더 넓은 관심사로 관심의 넓이를 넓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며 다른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재미있게 살다가 죽어야한다."

케이브의 주장은 소위 "지혜 이야기"라고 불리는 과거 에피쿠로스나 같은 사람들이나 길가메시를 인용하며 이 비참한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케이브의 주장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더 동정하고 죽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저 인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저는 케이브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여러 결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주장들을 하나 하나 분석해가며 이 주장들이 가진 결합들에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에대한 공포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kepti&no=3257&page=1

이 영상에서 케이브 박사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 나는 죽고나면 어떤 어두운 구덩이에 빠질까바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죽고나면 그런 구덩이에 조차 빠지지 않을 것을 깨달았으며 죽음에대한 공포가 비합리적이라는것을 알게 됐다."

그는 또한 죽음은 사건이 아니며 고나서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며 죽기전에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것은 타당하지 않다.

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케이브는 죽음의 공포를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우리 모두가 이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고나서 어두운 구덩이에 빠지는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나란 존재의 소멸 그것이 두려운것입니다. 우리는 죽고나서 어떠한 상태가 되서 두려운게아니라 어떤 상태도 될수 없어서 두려운것입니다.우리는 죽음이 사건이라서 두려워한것일까요?나는 한번도 죽음이 경험할수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바로 그 불경험성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경험할수없습다 그것이 바로 공포 무의식이 되는 공포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이 우리의식의 완전한 소실이라는 공포 우리가 죽음을 경험할수있다면 공포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수없다 아니 상상조차 할수없다 내가 비존재 곧 사라진다는 그 공포는 우리를 미치게하고 울게 만든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워지는것 이것이 죽음의 공포다입니다.

이 무의식에대한 공포는 비합리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있는 이 뿌리깊은 불안감 전혀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이 마음에 가시가 있는거같은 이 감정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할까요?죽음을 경험할수없다는 이유덕분에 죽음의 불안감이 사라질수있는사람이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호랑이를 정면으로 보고도 불안감이 느껴지지않는사람같이 감정적인 병자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죽고 나서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것이다 예정된 불행이 예정되지않은 무언가보다 덜 무섭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님이 체벌할때 때릴때 무섭기보다는 때릴지 않때릴지 생각할때 더욱 무서워한다 이것이 공포입니다.

여기서 경험할수 없다는것은 아직 경험을 할수있는데 하지 않은 것이아닌 말그대로 우리가 경험조차 할수없는 상상조차 할수없는 무에대한 두려움이라는것이다. 만약 케이브의 주장과 다르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디 어두운 구멍이에 떨어져서가 아닌 떨어질수조차 없는 완벽한 무의 상태에대한 두려움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어떠한 상태라고 생각하기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소멸에대한 공포입니다. 네 이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비이성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소멸을 영원히 사라지는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인식할 수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죽음의 공포의 핵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틀렸습니다.

이것이 무의 공포입니다 죽음을 안 어린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부분은 어떤 상태도 될수 없다것.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에대한 공포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라고 인간은 외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본능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어떻게든 존속하길 바랍니다.

케이브의 주장은 이것의 요점을 놓쳤습니다. 만약 죽음이 사건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절망스러워할요? 사건이 아니기에 인간은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기에 두렵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이 불멸의 열망이란 것은 우리에게 문제로 대두됨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해명될 수 는 없지만 우리에게 굶주림 아니면 목마름같은 어떠한 문제로써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이 열망이 무가치하다며 주장하며 이것을 없애게 할려는 시도는 이런 굶주림을 이성적인 수학적인 문제처럼 여길때 나오는 착오입니다. 이것은 수학적인 논리나 문제를 뛰어넘은 우리를 미치게하며 울게하며 체념하게하는 하나의 열망인 것입니다.

마치 아름다움처럼 말이죠.어떤 바보가 있는데 그는 아름다움에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갈증이 없습니다 그 바보가 말합니다. 왜 여자를 고르때 아름다음을 따지는가?

아름답다고해서 더 가정일을 잘하거나 돈을 잘벌지도 않는데 왜? 아름다음을 원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느낍니다. 아름다운 여자에대한 우리의 열망을 말입니다. 근데 어떤 과학자가 아름다음의 불필용성을 증명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우리가 아름다움이 필요성 때문에 원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그저 원합니다. 만약 그런 이유로 아름다운 여인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감정적 병자 일것입니다.

약간 저급합 비유이지만 성기로 비유하자면 마치 자신의 성기의 크기가 작은 사람이 의학적으로는 성기의 크기가 쾌락이나 임신과 별 상관없다는고 말하며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성기의 크기가 쾌락이나 임신과 관련이 없다는걸 알고 어느정도 안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기가 다른 사람보다 작을때 열등감과 불쾌감을 느낍니다.마치 자신이 패배자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포르노에서 남성 배우의 성기는 늘 클까요?

포르노에서 남자배우의 성기가 늘 큰이유는 우리가 그런 포르노 배우같은 큰 성기를 갖고싶다는 본능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해도 우리가 갖고있는 큰 성기에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성기에대한 정신병적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성기가 작으면 우리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주장만으로 이 큰 성기에대한 욕망을 없게 만들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성적인 이유만으로 아름다운 여인에대한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직 이성적인 이유만으로 큰 성기에대한 열망이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 병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죽음에대해서 만큼은 이런 철학적 주장이 이런 열망을 없에게 할 수 있다고 믿을까요?

철학적이거나 합리적인 논증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규정한다고 해서 그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 일까요?

어떤 열망들은 철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명제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치 아름다움에대한 열망이나 큰 성기에대한 열망처럼 말입니다.

케이브는 불멸이 끔찍하기에 죽음이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아유슈비츠 유대인들의 발버둥처럼 우리 인간은 결코 불멸이 끔찍할지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죽음의 공포를 없애게 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성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론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종교를 열정적으로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교를 믿던 수도자가 아유슈비츠의 수감자를 대신하여 죽자

그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을 가장 달래주고 죽음의 공포를 없에주는 종교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지않을려고 별 짓을 다하며 죽은 사람을 성인이라고 공경합니다. 이렇듯 죽음의 공포는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알기로 종교의 최고지도자중 하나였던 추기경이 죽기전에 자신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했습니다. 스티븐의 말대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가장 줄이는 종교조차도 우리를 이런 공포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설계됐기 때무입니다. 우리의 가장큰 원초적이고 강력한 열망은 죽음에대한 공포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에대한 열망 성적인것에대한 열망을 뛰어넘는 열망입니다. 이런 열망을 그저 철학적인 "지혜 이야기"로 해결 가능하다는것이 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2.영생이야말로 지옥이다. 왜냐하면 한번 영원히 똑같은 인생을 경험한다고 하자 금방 질려버릴것이다.

저는 스티븐 케이브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이 주장처럼 우리가 같은 일을 그저 반복한다면 말이죠.제가 이에 반대되는 예시를 들어 볼까요?

과거 칸트와 우나무노는 무한한 신에게 무한히 상승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요구 했습니다. 신은 무한히 도덕적으로 선하고 전지전능합니다.

우리가 신에게 무한히 다가간다면 그리고 다가갈수록 행복이 커진다면 우리의 행복은 무한히 커져가며 무한한 시간선에서도 지루하지 않겠죠.

이에대한 반론으로 도덕적인 성취가 결국에는 시들해지걸라는 반론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물리학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물리학에서 뉴턴물리를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과학자들은 물리학의 종말을 이야기했죠. 그러나 양자역학이 나왔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아무리 연구해도 끝없이 새로운게 나온다면 우리는 이것을 지루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우리에게 끝없이 새로운 자극과 신선한 경험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이 무한한 존재이고 전지전능하다면 우리의 행복도 무한할수 있겠죠.

3. 죽음은 우리삶을 가치있게 만들며 영생은 지금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훌륭한 주장입니다. 확실히 우리 삶이 무한하다면 삶의 가치가 사라지거나 약해지겠죠.그러나 과거 유명한 철학자가 이에대해서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삶을 가치있게 만들지만 우리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빼앗아갑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성취와 업적이 결국에는 잊혀지고 사라진다는 우울한 결론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생각해 봅시다. 죽음은 당신의 가족을 빼앗고 당신이 사랑하던 모든것을 빼앗습니다.

과거 그 철학자는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의 결말인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지구라는 결말에 비명을 질렀습니다.

고백하자면 저 또한 아주 어렸을때 결국에는 우주가 멸망한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비명을 질렀습니다. 죽음은 우리 삶을 가치있게 만듬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헛고생이라는 결론에 이끌게 됨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일한 의학자,과학자 모두가 잊혀지고 아무것도 아닌것이되겠죠. 예술품은 박살나고 소설은 불탈것이며 우리의 문명이 사라지겠죠. 이것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끕니다. 이것에대한 상세한 논의는 좀있다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죽음은 우리 삶을 가치있게 만들지만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4.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야한다 그 이유는 이 세계가 단 한번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대한 공포는 외부 존재에대한 분노와 폭력을 유발한다.죽음이 인류문명을 진화시켰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을 포기한 사회가 더 발전된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말아야하며 그것의 해결책은 더 넓은 관심사로 관심의 넓이를 넓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며 다른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재미있게 살다가 죽어야한다

너무나 훌륭한 주장입니다. 이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에 유쾌하고 놀라운 해결책입니다. 그의 책에서 영생에대한 모든 시도가 좌절된다는것을 이야기하면서 이 놀라운 철학자는 과거 에피쿠로스 같은 고대의 지혜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아주 놀라운 지적인 불성실함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자 이 주장을 잘 들어봅시다. 그는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묻겠죠.

왜? 그렇게 만들어야하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공감하며 살아가 가야할까?

과거 칸트가 말했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습니다. 악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다 죽으며 피해자들은 고통속에서 죽은 세계

너무나 강력한 악인이 처벌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죽은 사회 피해자들의 고통이 그어떤 보답도 받지 못한 사회

이 사회는 무엇을 가리키는것일까요? 바로 우리의 세계입니다. 예시를 들어 볼까요? 김일성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않고 호의호식하다 죽었습니다.'

친일파들의 대부분은 처벌을 제대로 받지않고 행복하게 이 국가의 지배층이 됐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고문을 받다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칸트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희생하는것이 진정한 도덕이며 우리는 보상이 없더라도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말하는 철학자입니다. 이 꼰대같은 철학자조차도 만약 진정 악인들이 처벌받지 않고 죽는다면(그것이 설령 1명일지라도!)이 도덕은 실행이 가능하지 않으며 도덕적인 삶을 요구할수없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확실히 외부 존재에대한 분노와 폭력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스티븐 케이브가 인용한 공포관리 이론의 창시자들은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관을 만들며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역설합니다. 이 부분은 슬픈 불멸주의자란 책에서 나옵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의미를 추구하며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죽음에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던 이상이나 가치관을 통해서 우회적이며 상징적인 불멸을 추구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기억되거나 우리가 헌신한 이 세계관의 존속을 통해서 간접적인 불멸을 원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공격을 받을때 왜? 비합리적일정도로 격노할까요? 왜 우리는 초조함을 느낄까요?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갖는  이 분노와 초조함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때 나오는 초조함과 불안과 아주 유사합니다.

실제로 진화론을 읽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죽음에대한 단어들을 더 연상했으며 우리의 세계관이 공격당할때 우리는 우리의 불멸이 위헙받는 다는것을 느끼며 이런 공격성을 보입니다.

예시를 들어서 여기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의 인생의 의미는 세계혁명에서 나옵니다. 그는 이 혁명에 깊게 열중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죽어도 언제가 세계혁명은 지속될것이며 나의 공헌은 헛되지 않을것이며 나는 기억될 수 도있으며 적어도 나의 이 귀중하며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이 혁명은 나의 존재의 상징적 불멸성을 보장할것이라고 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그런 희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떤 민족주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자신이 헌신한 국가는 자신을 기억할 것이며 적어도 자신이 헌신한 국가는 불멸함으로써 우리의 불멸에대한 열망을 채워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관들은 다른 세계관을 배척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세계관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기때문입니다. 추종자가 1명뿐이라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겠지만 추종자가 몇백만명이라면 확고부동한 진리가됨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유지합니다.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 즉 자신의 세계관에 헌신하며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확실히 덜 느낍니다.

그러나 과거 실존주의 철학자 우나무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자식은 나의 자식의 자식에게 헌신할것이며 나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은 또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 종족이 100년 후 아니 몇백만 세기 안에 망한다면 이 맹목적인 희생의 결과물은 누가 차지하는가?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산다는 환상이 깨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가족은 죽습니다. 국가는 멸망합니다. 예술품은 잊혀집니다. 이 우주는 멸망합니다. 만약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혁명이 결국에는 종말할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만약 국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국가가 소멸할것을 체감한다면 그들은 절망에 빠질것입니다. 힘이 빠질것입니다.

과거 톨스토이가 이렇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전부다 죽을 것이고 내 작품들은 전부다 잊혀질것이다!"

우리의 의미는 세계관 덕분에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라져도 우리가 헌신한 이 세계관은 사라지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 공포에 저항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세계관이 소멸한다는것을 확실히 인지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공포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됨니다.

과거 니체와 우나무노같은 철학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면(적어도 우리의 조국이나 가족 같은 가치들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의 가치체계는 파멸하며 끝없는 무의미의 세계에 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 케이브의 말대로 신은 없고 영혼불멸도 없으며 악인이 심판받지도 않으며 심지어 우리가 헌신할 의미들도 부질 없으며 우주 또한 사라진다면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허무주의 이기주의에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과거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할때 그것은 우리의 가치체계의 멸망을 뜻했습니다. 의미체계가 붕괴되면 인간을 억제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순수한 이기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이타적으로 삶을 아름답게 꾸미며 다른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자는것은 실현 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그 칸트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죠.

나의 생각

스티븐 케이브의 시도는 훌륭했습니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죽음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인간상을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공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스티븐 케이브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었을까요? 그는 진정 이런 논증으로 위로를 얻었을까요?

그는 행복할까요? 과거 삶의 비극적 감정에서 나온 구절 2개를 인용하겠습니다.

"과거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같이 합리적인 진리에서 위로를 찾을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조차 설득되지 않은 이야기에 이 세상의 위로가 있다고 설파하고 다녔다."

"진리는 위로를 만들 수 없으며 의지는 위로를 진리로 만들 수 없다."

저는 케이브가 자신의 주장으로 위로를 얻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논증들로 (죽음은 사건이 아니다 같은 논증들)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을 그저 "지혜 이야기"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슬픈 불멸주의자란 책에서도 이에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에피쿠로스적 방법은 우리의 죽음의 공포를 없에는데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우리가 죽음을 인정해도 선하게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요?

케이브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현 불가능입니다. 마치 날개를 달고 날면 아름다우니 지금 당장 절벽에서 뛰어내려 팔을 펄럭이는 사람처럼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현실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