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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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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우나무노에 관해서 여러 글을 올렸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내가 이 철학자(아니면 문학가나 사이비 철학자)를 소개할때 늘 중구난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제 비정기적인 우나무노에대한 소개를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과거에 내가 말했던 것이 중복될 수도 있으며 여러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음을 이 것을 읽고 있는 독자들한테 당부하는 말이다. 나는 우나무노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으며 나의 철학적 지식은 협소하여 지성있고 능력있는 소개자들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대로  이 문제적인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으니 본문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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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와 살을 가진 인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나무노가 말하고 싶은 인간이 바로 이런 인간이다. 과거 철학자들은 여러 인간상을 말해왔다. 칸트의 도덕적 실행자,사회계약론의 계약자 인간,진화론에서의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 그러나 이 우나무노가 보기에 이 세상 철학의 유일한 목적은 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인간 지금 당장 살아가며 웃고 떠들며 슬퍼하다가 죽는 이 인간이 철학의 주제인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이 피와 살을 가진 실존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고뇌 이것이 철학의 출발점이다.

이것을 소위 불멸의 열망이라고 불러보자 우나무노가 생각하기에 철학사에서 끝없이 이루어지는 투쟁은 이 불멸의 열망에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철학적 주장들이 있었다. 철학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철학의 역사는 헤겔식으로 말하면 정립과 반정립의 끝없는 반복이다.

예시를 든다면 과거 진리는 없다는 소피스트들이 나타나자 진리가 있다고 외치는 플라톤이 나왔으며 과거 흄의 회의론이 나오자 칸트의 관념론이 나왔다. 철학사는 순환하며 끝없는 문제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의 이 끝없는 순환을 보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피스트들은 불멸의 영혼이나 신따위를 믿지 않았다. 아니면 관심이 없다고 해야할가 그들은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외치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었다. 플라톤은 영혼불멸또한 부활시켰다. 그러나 먼 시간이 지나 다시한번 흄의 회의론이  진리가 없으며 기적을 부인하며 종교를 거부하자 칸트가 나타나서 진리의 기반을 다시 세웠으며 영혼불멸과 신에대한 신앙을 자신의 실천 이성비판에서 다시 세웠따. 그러나 세월이지나 실증주의에 시대가 오면서 니체의 희극적인 회의주의로 철학의 역사는 다시한번 끝을 맺고 말았다.

철학자들의 이런 투쟁은 그저 형이상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의 불멸을 얻기 위한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도 사람이다. 그러니까 기뻐하며 슬퍼하며 먹고 즐기고 우는 인간이란 말이다. 이 피와 살을 가진 이 철학자란 것들이 아무리 자신을 고고한 존재이며 자신의 철학적 과업에는 어떠한 사심이 없다고 말해도 그의 철학의 근본에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문제가 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끝 즉 죽음에대한 문제였다.

그것이 아니면 굳이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소위 "요청 으로 서의 신"을 원했겠는가? 아니면 왜?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광기어린 주장을 했을까? 과거부터 논의되던 대상중에 가장 중요한것은 우리의 실존적 관심사였던 것이다. 아무리 철학자들이 자신은 형이상학적인것에 관심이 있으며 천박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해도 아무리 분석철학자들이 과학자 행세를 한다해도 우리 이 철학이란 우리의 이 죽기 싫다는 감정의 발로라고 해야겠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칸트가 말한 이 실천도덕의 계보는 기독교이며 칸트는 불합법적으로 둿문을 만들어서 영혼불멸과 신을 구원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이성을 속이는 짓이었던것이다. 소위 철학자라 불리는 칸트는 자신의 이성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을 종교적인 바탕에서 구해냈다. 인간 칸트 또한 우리처럼 이 불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게 분명하다 그의 책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철학의 역사는 우리의 이 불멸을 원하는 우리의 의지와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리는 이성의 싸움이라고 할 수있겠다.

우리는 죽는다 그것도 확실히 죽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내 육체가 있기 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육체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

이 확실한 너무나 확실한 죽음에 대항하여 여러 방식으로 대응한것이 우리의 철학이었다. 그러니 모든 철학은 이 실존적인 관심사인 피와 살을 가진 인간에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실증주의는 우리에게 신은 없으며 영혼또한 없으며 죽고나면 사라진다는것을 너무나 확실히 가르친다.

과거 아테네의 지도자 솔론의 아들이 죽었다. 그러자 솔론은 울었다.그러자 그의 아는체하는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왜? 우는가 운다고 해서 죽은 아이가 돌아오는가? 그러자 솔론이 답하길 그러기에 운다 라고 답했다.인간의 삶은 이렇다 비극이다.

출구도 희망도 없는 하나의 비극이다. 우리가 논하게 될 것이 바로 이 절망 소위 "삶의 비극적 감정"에대해서 말할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비극으로부터 우리 인류가 어떻게 위로를 찾았을까? 다음은 이에대한 여러 사람들의 반응에대해서 다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