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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과거부터 나는 이런 주제를 가진 글을 몇개나 써왔다. 굳이 이 디시인사이드 그저 자신의 뻘글을 쓸려고 오는 이 사이트에서 동기를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해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나는 즉흥적으로 쓴 글을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글을 적는다 그러니까 나는 남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이렇게 글을 적는것이다.

너무나 뻔하고 당연하겠지만 남들의 평가에 관심이 있으니까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내글은 흥분상태에서 적는 것이기에 맞춤법과 여러가지 문법적인 문제들이 적지않다. 셋째 내글은 이미 과거에 반복된것을 새로운것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 내글을 보았다면 뒤로가기를 누르길 바란다.

넷째 이 글은 내가 저번에 부정기적으로 연재할려고 했던 우나무노 소개글을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프로젝트임을 알고 내 글을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그런 것에 시간을 쏟기도 어려울뿐더러 내 의욕의 부재로 글을 쓰기 힘들게 됐다 양해 부탁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우나무노에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기를 바란다.

그럼 본문으로 가보자


본문


여기 인간이 있도다! 절망에 빠진 인간이 있도다! 여기 인간이 있도다! 불신에 빠진 인간이 있다!

그럼 여기 있는 인간은 누구인가? 그는 철학자로다!

그렇다 그는 인간이다. 절망에 빠진 인간이다. 불신에 빠진 인간이다. 그는 뼈를 가진 살을 가진 인간이로다.

내가 오늘 소개하는 인간은 인간 철학자로니 그는 우나무노로다.

20세기 초 신은 죽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며 불멸을 주던 신은 죽었다. 여러분들도 한번씩은 끝없는 불신과 싸운적이 있을지어니 끝없는 고뇌에 휩싸여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에 비명을 지른 적이 있을 것이다. 절망에 싸인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날것 그대로의 절망 불안감 불신이 자신의 영혼을 점령하여 신은 없다고 외치는 자신의 한쪽과 싸운적이 있을것이다. 우나무노 그또한 그런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었다.

우리의 의지란 것이 그저 어둠속에서 그저 한 순간 깜박이는 촟불에 불과하다면 존재한다는 것 처럼 잔인한것은 없을것이다.

과거 아테네의 지도자 솔론이 아들이 죽자 울었다. 그러자 그의 아는체하는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우는가? 울어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데 말이다 울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자 솔론이 이렇게 답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우는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비극이다. 탈출구도 희망도 없는 하나의 비극인 것이다.

그는 희망을 잃은 인간이었다. 그는 불신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었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과 불신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설교를 한적이 있었다. 그 아테네 시민들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관대한 지성인들이라고 할 수있겠다.

아마도 바울이 가져온 이 새로운 종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귀를 열었을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죽은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자 그 지성적이고 관대한 아테네 시민들이 비웃었으니말이다.

기독교란 종교는 그리스인들에게는 괘변이자 광기였다. 그 구세주가 부활했다는것만을 믿는 이 종교는 말이다.

과거 한 철학자가 말하길 교회의 신학은 하나의 궤변이라고 했으니 우리의 이성은 이 독단론적 체재를 사랑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이성에게 강요하는 요구 사항들은 이성으로서는 승납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우리는 의문을 품는다 기독교 우리의 구원자 예수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종교가 과연 현실적인 것일까? 사실일까? 그저 가공된 거짓인게 아닐까? 이것은 그저 동화인가? 소설인가? 우리가 믿던게 그저 거짓인것일까?

우리는 이에대해서 변호할 마지막 수단은 신이 없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의 부재는 신앙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의 희망 불확실성의 종교를 만든다.

우리의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이성은 말한다.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신의 존재는 넌센스다. 영혼불멸은 불필요한 가설일 뿐이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절망 절망을 가르친다.

억지로 웃고 있는 사자인 니체를 보자 그는 정말 행복했을까? 과연 진정 만족했을까? 그 영원회귀라는 발명품을 만든 이 니체란 존재는 과연 진정 자신의 해결책에 만족감을 느꼈을까?

소위 이성적인 사람들은 우리들한테 마치 이 이성에 우리가 살아갈 삶의 원동력이 있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그들도 믿지 못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한테 믿으라고 말하고 다녔다.

우리는 원한다. 오직 우리의 신만이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것을 불멸을 영혼의 불멸을 신을 우리의 신을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그리스도를 원한다. 솔직히 말해라 사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했기에 우리가 신이 있기를 바랬기에 우리는 신을 인식할 수 있었던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의지의 표현인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 증거를 요구하는 이성은 이 모든것을 거부한다. 불멸을 거부한다 신을 거부한다 구원자를 거부한다.

이에 굴복한 종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것이 종교인가? 자유주의 개신교가 종교이기는 한가? 영혼불멸이 없는것이 종교인가? 구원자가 없는게 종교인가?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이런 종교를 원한다. 우리의 이성은 희망없는 종교를 합리적인 종교를 영혼없는 종교를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거짓말을 하지않는다.

오직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종교를 믿을 수있을까? 오직 이성적인 이유만으로 종교를 신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지로 종교를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로서 종교를 믿는다 희망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종교를 믿기 전에 종교를 원해야한다 신을 원해야한다 신을 갈망해야한다.

그러니까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본능적인 사랑이 있어야 하는것처럼 우리의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는 만날 수 없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들이 세운 영혼없는 하나님

소위 세상의 첫번째 원인이라든지 도덕의 근원이라든지 하는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다. 지식이 인도하는 하나님은 이런 죽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 기뻐하며 슬퍼하며 사랑하는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우리에게 관념으로써의 죽은 신이 아닌 살아있는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다.

예수와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 죽음에 고뇌하며 고통을 받다가 죽은 신 우리를 사랑하던 신 살아 있는 신으로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환상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기도 한다. 마치 신이 있는것같은 느낌이든다 마치 신이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모든것은 하나의 환상이지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신이 있기를 너무 바랬기에 우리가 그저 환상을 느끼는 것일까?

그럴수도 있겠다 인정한다 우리의 신앙이 환상이라는것을 우리의 신앙이 이성의 눈으로 보면 불합리하다는것을 예수가 부활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정한다 인정한다.

그러나 우나무노 불신에 사이에 있던 우나무노는 주장한다 그러나 저항하자 하나님을 믿자 마치 그들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자

그러나 저항하자 그렇다 저항하자 죽을때까지 저항하자 마치 신이 있는것처럼 마치 우리의 앞에 영원한 영생이 있는것처럼 느끼자 오직 우리 앞에 무가 절대적인 무가 있다면 투쟁하자 하나님을 믿자 희망을 믿자 마치 우리의 죽음이 부당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우리는 불안에 휩싸인다 불신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신앙을 가진다 삶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신을 믿기에 기독교를 믿기에 예수를 믿기때문이다.

우리는 이렇듯 끝없는 절망 속에서 외친다. 살고 싶다고! 신이 있기를 바란다고! 그러나 이 절규들이 과연 소용 있을까?

이런 투쟁들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외침이다. 허공에 외치는 외침이다. 신이 있을것 같다고 느끼는 우리의 느낌이 사실 그어떤 논리적 과학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귀하다.

고귀하다니? 이런 삽질이 이런 공허한 외침이 과연 고귀한가? 고귀함이라?

어떤 인간이 고귀한가?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야말로 가장 고귀한 인물일지니 그렇다면 그는 왜? 고귀한가? 그저 존재 그 자체로 고귀한가? 아니면 어떤 행동이 그를 고귀하게 만드는가?

우리가 어떤 인물의 고귀함을 이야기 할때 우리는 그의 생각을 본다. 그가 고뇌에 휩싸 여있을때 우리는 고귀함을 느낀다.

어떤 존재가 아파하며 고통을 받으며 고뇌할때 그러고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영웅적인 행동을 할때 우리는 고귀함을 느낀다.

어떤 영웅이 행동을 할때 그어떤 고뇌도 하지않으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고귀한가?

우리는 그를 찬양하겠지만 그의 행적을 보며 감동 받지는 않을것이다. 고귀함이란 고뇌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고뇌와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영웅적인 일을 할때 그는 고귀해진다. 우리는 그의 일대기를 보며 감동받는다.

이것이 바로 고귀함이다. 그렇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것은 고귀함을 얻기 위해서다,

이것이 악을 허가한 이유다 고통받으며 죽어간 예수가 고귀한 이유다. 신또한 고통받는다 만약 신이 고통받지 않는다면 그는 고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었던 예수는 온갖 수난을 겪으며 고귀함을 입증했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신을 고통받는 예수를 동정한다. 그리고 고통을 받은 우리의 예수는 우리를 동정한다. 서로가 서로를 동정한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통을 내가 겪었기에 그가 나의 고통을 겪었기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 사랑한다. 오직 성자를 아는 자만이 성부를 알수 있을지니

우리는 우리의 소멸이 부당하다고 느껴야한다. 그리고 싸워야한다. 부당한 소멸에 저항해야한다. 그리고 고뇌한다. 이것이 진실인지 고뇌한다. 우리의 종교가 진리인지 의심한다. 그리고 나의 이성이 우리의 종교를 신앙을 비웃는다 이것이 비극이다. 그러나 고귀하다 고뇌속에서 우리는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 이것은 현실도피인가? 아니 이것이 어떻게 현실도피인가? 현실도피자는 현실을 인지할려고 하지않지만 우리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한다. 우리의 싸움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희망을 신념을 종교를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항한다. 우리의 운명에 저항한다. 희망을 품는다.

비록 가망없는 희망일지라도 우리는 품는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순속에서 살며 모순속에서 삶을 영위하니 이런 자가 바로 돈키호테다.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우리의 영웅 돈키호테는 외친다. 설령 우리의 신념이 이성적으로 해명할 수없더라도 증거가 없더라도 싸우자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영혼불멸을 위해서 싸우자 승리할수 없으며 비웃음으로 가득한 고독한 전장에서 희망을 위해서 싸우자

비웃음에 대항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것이다.

과거 예수가 비웃음을 당한것처럼 말이다.

예수의 죽음을 희극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성인 빌라도는 예수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게 했도다

이것은 하나의 희극이다. 그러나 비극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 비극이로니 우리의 삶은 하나의 비극이다.

과거 솔론이 울었던 것처럼 우리는 신을 믿어야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울어야한다. 투쟁하러 가야한다. 비록 이 모든 것들이 바뀌지 않는다해도 우리의 신앙이 이성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것이 부당하다고 외치자 이 모든 것들이 헛고생일지라도 말이다.

여기에 우나무노가 있다. 바로 자신이 웃기다는 것을 인지한 돈키호테 지상에서 이길수 없는 싸움을 반복하는 돈키호테가 있다.

자신의 이성이 스스로를 비웃는 돈키호테가 있다.

찾을 수 없는 별이 있다고 믿으며 그 별에 의지하며 싸움을 계속하는 돈키호테가 있다. 이 세상 지성인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는

돈키호테가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지옥의 가장 아래에서 별을 찾아서 올라온 단테처럼 아직 이 세상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돈키호테가 있다.

그의 신앙은 무조건적인 눈 먼 신앙인가? 아니! 그의 신앙 돈키호테의 신앙은 불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앙이다 끝없는 절망속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에 자신의 모든것을 건 신앙이다 불신의 늪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난 희망이다. 그것은 불합리한 희망이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적인 신앙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 이성이 스스로를 비웃는 것을 느끼는 신앙이다.

그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다고 말하는 비이성적인 신앙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의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은 불확실성에 세워진 하나의 희망인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지며 끝까지 관철하는 자가 바로 돈키호테이다.

마치 카뮈의 시지포스처럼 돈키호테는 운명과 저항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싸우러 간다 운명과 말이다.

비록 우리의 종교가 거짓일 수 있다해도 그는 싸운다. 그는 저항한다. 이것이 바로 돈키호테로다.

싸우자 만약 우리의 앞에 놓여 있는것이 그저 무라면 이것이 절대로 합당하지 않다는것을 입증하며 죽자







































감사의 글


내글을 본 당신 만약 당신이 내글을 보게된다면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하고 싶다. 이 지루하고 모순적인 글을 읽는데 당신은 정말로 많은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수준낮은 내글을 읽어주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