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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번에 적었던 우나무노에관한 생각에서 우나무노의 생각이 희망사항의 나열이라고 생각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기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만약 이렇게 이해했다면 그의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오독은 그가 소망에서 사실을 추론해 냈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환상이 사실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는 지독한 과학주의자 회의론자다.

만약 그가 진실되게 이 문제가 이렇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삶의 비극적 감정이 아니라 삶의 환상적 감각이 될 것이다.

그는 환상 즉 우리의 희망사항이 원하다고해서 사실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 영혼불멸을 증명할려는 사람들한테 냉소적이며 과학적인 진리 즉 죽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진실되게 믿는다.

그런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소위 이성 합리성은 우리한테 위로를 줄수 없으며 소위 의지 우리의 열망은 위로를 진리로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삶의 비극적 감정이다.


우리의 의지는 살려고 한다. 죽지않고 싶어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삶의 비극적 감정을 가진것이다. 우리의 열망은 죽지않을려고한다. 비극적이게도 우리는 죽게된다는 운명 결국에는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다. 마치 삼각혁의 내각의 합이 180이라고 믿는것처럼 믿는다.

의지는 이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든 막기위해서 영혼불멸이나 윤회를 만들어냈다. 내가 과거 우리의 철학은 죽지 않을려는 인간들의 사투이자 투쟁이었다고 한적이 있었다.

그 지성적인 칸트가 이성적으로는 승낙될 수 없는 영혼불멸을 종교적 기독교적 바탕에서 구원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철학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실증주의 증거를 요구하는 과학은 우리의 이런 형이상학적 가정인 영혼불멸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내가 없었던적이 있다.그 때는 내 육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이다. 내육체는 사라진다. 결론 우리는 죽는다.

이 잔인하면서도 논리적인 선언은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과학은 영혼의 비존재를 확실히 증명한 것 일까? 이 과학은 우리의 신이나 영혼불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일까?

이때 우리는 불확실한 희망을 갖게된다. 혹시 모르지 혹시 신이 있을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이런 몽상을 비웃는다.

없다는 증거가 없다고해서 그것이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마치 차고의 용처럼 말이다.

우나무노는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한다.


1.나는 죽고 사라진다 그러니 나는 무한한 절망에 빠진다

2.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걱정이 없다.

3.나는 내가 죽어서 사라지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니 절망이기도 하면서 희망이기도한다 마지막으로 남는것은 투쟁뿐이다.


만약 과학이 내가 죽고 사라진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한다면 이런 비극적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이 증명되거나 확실히 존재한다면 비극적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적 감정은 이 불확실성에 의거한 불합리한 희망에 기댄 일종의 불안이다.

그러나 과학적인 관점 우리의 이성적인 관점에서 이런 신에대한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 이 주장들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다.

아무리 우리가 신앙이 이성보다 위라고 해도 우리의 이런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이성이 뭐라고 외쳐도 이 의지 죽지 않을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가 이성에 복종해서 이 열망을 포기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 의지에 복종한다면 우리의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둘다 서로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비극적 감정은 끝이 없는 고뇌의 연속인것이다.

이 고뇌에서 인간은 희미한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이성은 그 희망이 거의 부질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둘다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기에 투쟁이다.그렇다 투쟁이다.

과거 솔론의 아들이 죽자 솔론은 울었다 그는 부질없기에 울었다. 우리가 갖는 이 희망은 부질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울어야한다 이럴때가 아니면 언제 울겠는가?

부질없기에 우리는 운다. 그런것처럼 우리는 반응해야한다 이 비극적 삶의 감정에 말이다.

그럼 돈키호테에대해서도 한번 다루어 볼까 그는 단순한 현실도피자가 아니다. 그는 투쟁자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러 온 자이다. 그는 우리 삶을 짖누르는 이 모든것에 선전포고를 하는것이다. 성직자,과학자,심지어 이발사에까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긍정에 들어간 신앙,부정에 들어간 신앙,기권에 들어간 신앙 이 모든것들과 선전포고를 하는것이다. 무신론자 이든 유신론자이든 불가지론자이든 이 깨어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이 열망 속에서 싸우게 하는것이다.

이것이 우나무노가 책을 적은 목적이다. 평온속에 빠진 모든 사람들한테 이 비극적 감정을 깨우치게 하는것말이다.


돈키호테는 비이성주의자일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는 비이성주의자다 그는 비이성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마음대로 생긴 진리나 허황된 것들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성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 종교대판소 같은 이성재판소를 가진 인간이다.

그는 평온한 신앙을 싫어한다. 그는 포기속에 빠진 불가지론을 싫어한다. 그는 아무런 근심없는 무신론을 싫어한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뒤흔들어놓기 위해서 왔다.

그는 회의론자이자 신앙인이다 그는 모순을 가진 인간이다. 그는 합리론자이자 비합리론자이다. 그렇게에 그는 이 비극적 감정의 영웅인것이다.

이 책은 절대로 평온한 신앙의 도약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한테 비극과 슬픔 그리고 의심 불안을 주기위해서 왔다.

그는 절대로 신앙의 도약을 하지 않았다.그는 불안속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는 희망속에서 불안을 알았다.

이 구절로 이 글을 끝내겠다.

나의 종교는 내 생애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음을 알아도 끝까지 찾으러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