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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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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에게는 이 소설이 퍽 언어철학에 관한 것으로 읽힌다. 줄거리는 이렇다. 큐레이터인 주인공은 의뢰인의 연락을 받고 작은 마을로 향한다. 의뢰인은 괴팍한 성격의 꼬부랑 노파로, 어마어마한 대저택에서 그를 보좌하는 작은 소녀, 정원사, 그리고 하녀와 함께 산다. 주인공이 받게 되는 의뢰는 죽은 이들의 일생을 대표하는 유품을 찾아 전시하는 ‘침묵 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쓰러진 뒤 몸에 마비가 와 주변에 있던 물감을 먹으며 연명하다 아사한 무명화가의 물감 껍데기라든가, 사람들의 귀를 작게 만들어주는 불법시술을 하던 백아홉 살의 외과의가 사용하던 메스라든지. 주인공은 소녀와 함께 다니며 그들의 유품을 때로는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게,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에 넣는다. 물건을 가져오면 노파는 그들의 인생과 유품에 대한 짧은 구술을 하고 나와 소녀는 받아적는 생활을 하며 박물관은 개장을 준비한다.



독일의 논리학자 프레게로부터 시작한 초기의 언어철학은 말의 뜻을 분명히 함으로써 명징한 몇 개의 공리로부터 무한한 정리가 도출되는 닫힌 계 안의 수학과 같이 어지러운 철학의 문제들을 분명히 정리하려고 했다. 가령, 우리는 원래 밤 서쪽 하늘에 보이던 별을 개밥바라기 별, 새벽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별을 샛별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천문학에 의해 이 둘 모두가 금성이라는 행성임을 안다. 동일한 지시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달라져서 혼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밤 서쪽의 별’과 ‘새벽의 희끄무레한 별’이라는 기술구가 같은 대상에 대한 것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이를 정식화하여 대상의 이름은 단지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의 집합에 불과한다고 말했다. ‘연필’이라는 이름은 위장된 것이며 단지 ‘흑연으로 된 심이 있다’ ‘오렌지색 몸통을 가졌다’ 등의 한정 기술구들의 집합을 편의상 부르는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철학적 질문들은 텅 빈 기의(기술구)를 지닌 ‘삶’이라는 기표가 들어갔기 때문에, 참/거짓을 가릴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이 된다. 비엔나 서클을 비롯한 초기 언어철학자들은 철학의 문제가 이로써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이들이 간과한 두 가지. 먼저, 내가 5분 전 물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오후 XX시에 물을 마셨다’는 명제와 상반되는 나는 내가 아닌가? 5분 뒤에 물을 먹는 나와 밥을 먹는 나는 다른 명제로 구성되므로 그것은 같은 내가 아닌가? 아니, 분명 나는 나다. 이것들이 별로 중요한 명제들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나는 대한민국에 산다’라는 명제. 그렇지만 내가 이민을 가서 미국에 살았더라도 나는 나다. ‘나는 남자다’라는 명제. 내가 만약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여자가 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결국 대상의 이름을 환원하는 핵심 명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 관한 모든 명제는 부정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반사실적 가정을 통해 우리는 기술주의 이론의 느슨함을 본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러한 방법은 어찌 보면 대상의 이름에 담긴 개별성, 즉 기술구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성질들을 폭력적으로 무시해버리고 보편적 술어로 만들어진 명제들로만 환원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의 나이나 성별, 생김새, 거주지와 같은 환원 가능한 술어명제들 이외에도 남아서 울리는 애틋한 무엇인가가 있으리라. 이렇게 이름에서 기술구를 뺀 뒤에도 잔여하는 것들이 분명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과 그 일행은 언어철학자들이 했던 행위의 정확히 반대를 행함으로써 이들에게 진짜 이름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가령 평생 가게 구석을 조용히 지킨,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온 점원이 하루종일 그릇을 닦던 마른 헝겊을 유품으로 고르고 훔치고 일생을 구술하며 받아적고 전시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들은 그녀의 삶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는 동시에 고유하고 개별적인 이름을 되살리려 하는 것이다. 때문에 노파에게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뜻깊은 임무”(282)가 된다. 반기술주의 철학자 크립키는 그래서 이름짓기를 최초의 세례행위(initial baptism)와 같은 신비한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유품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는 일련의 행위는 출생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름짓기의 세례행위와 짝패가 된다. 대상을 설명하는 결정적 한정 기술구를 찾아 명시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이 기술주의의 붕괴를 가져왔듯, 한 사람의 일생을 대표하는 유품을 찾아 전시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침묵 박물관’을 탄생시킨다. 박물관의 이름은 비트겐슈타인의 경구처럼, 한 인간의 일생이 담긴 ‘신비한 것’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노파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 중편소설임

혹시나 읽을 사람 있을까봐 주요 사건이나 반전 다 빼고 적음..

감상이 딱딱해서 그렇지 책은 재밌으니까 다들 읽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