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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


엘리아데가 쓴 이 책은 종교적 인간의 시각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다. 공간의 비균질성에 의한 종교적 경험은 하나의 원초적인 경험이며, 천지창조의 장소와 동일시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신자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이 나타난 곳, 혹은 신과 접촉한 공간이다. 즉 거룩한 공간이다. 거룩한 공간은 신의 현현의 장소이며, 거룩한 공간에 살려는 인간의 삶이 바로 대표적인 종교적 인간의 모습이다.


제아무리 세속적인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종교적 행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한 인간의 탄생지라던가, 첫 사랑의 장소라든가 같은 곳은 그에게 예외적이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그곳은 그에게 또 하나의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전통적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거주 지역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미지의 불확실한 공간 사이에 대립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이다. 전자는 세계이며, 코스모스이다. 그것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은 더 이상 ‘코스모스’일 수가 없으며, 차라리 일종의 ‘다른 세계’, 낯설고 혼돈에 찬 공간, 유령과 마귀와 ‘이방인들’(마귀 및 죽은 사람의 영혼과 동일시되는 자들)이 사는 지역이다. 세계는 그 안에서 거룩한 것으로 스스로를 이미 현시하였고, 그 결과로 하나의 차원과 다른 차원과의 단절이 가능해졌으며, 또 반복될 수 있는 그러한 우주이다. 종교적 모멘트가 우주 창생의 모멘트를 포함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깨닫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룩한 것은 절대적인 실재를 계시하며, 동시에 방향설정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그것은 경계선을 확정하고 세계의 질서를 정립한다는 의미에서 세계를 창건하는 것이다.


미지의 지역을 코스모스화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신성화이며 하나의 공간을 조직하는 것은 신들의 모범적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생존은 오로지 이같은 하늘과의 영속적인 교섭의 덕택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카오스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초월과의 접촉이 상실되고 나면 세계 속에서의 생존은 가능성을 잃는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시간은 언제나 기계적으로 똑같은 길이로 여겨지지 않는다. ‘거룩한 시간’은 순환적이고 가역적이며 회복 가능하다. 제의를 통한 시간의 재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은 영원한 신화적 현재의 재현이다.


또한 엘리아데는 자연의 거룩함을 종교에서 보편적인 상징을 이용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지 자세하게 정리해놓았다. 하늘은 상징적으로 최고의 존재이며, 상징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하늘의 신이 더 이상 종교생활을 지배하지 않을 때에조차도 별들의 영역, 하늘의 상징, 상승의 신화와 제의 등은 거룩한 것의 질서 가운데서 탁월한 위치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위’에 있는 것,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모든 종교적 복합체 가운데서 초월적인 것을 계속해서 계시한다.


물은 다양한 의미의 종합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세례에서의 물은 ‘낡은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갱생한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땅은 어머니의 이미지로 나타나며, 생명의 잉태와 탄생의 상징적 의미, 출산은 대지의 생산력과 같게 여겨진다. 여성의 거룩함은 대지의 신성성에 의존한다. 여성의 생산력은 어머니인 대지, 보편적 출산자라는 우주적 모델을 가지고 있다.


나무는 생명, 청춘, 불멸성, 지혜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종교적 인간이 탁월하게 실재적이고 거룩하다고 간주하는 모든 것, 신들이 그 본성으로서 지니고 있는 특권을 지닌 개인들, 영웅들, 반신들만이 드물게 접근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 이 때문에 젊음 혹은 불멸성에 대한 탐색의 신화들은 황금의 열매 또는 기적의 잎을 가진 나무, ‘먼 나라’에서 자라고 괴물들에 의해 경호되는 나무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달 또한 달의 상징을 통하여 종교적 인간은 외관상 서로 무관한 사실들의 거대한 더미를 서로 비교하고, 나아가 하나의 단일한 체계 속에 그것들을 통합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종교적 인간은 세계 내에서 특별하고도 개성적인 존재양식을 취하며, 이 개성적인 양식은 그것이 역사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식별될 수 있다. 종교적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 스스로를 현현시키며,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성화하고, 또 그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절대적 실재 거룩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는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역군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을 향한 모든 호소를 거절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인간 조건의 바깥에 있는 인류를 위한 어떤 모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계를 탈신성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그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 거룩한 것은 그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종교를 갖지 않은’ 인간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타락된’(다분히 기독교적인 표현이다) 신화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앞서 살폈듯, 세속적 인간은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그 자신의 역사를 즉 오늘날의 그를 형성시킨 종교적 선조들의 행동을 지워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실존의 큰 부분이 그의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는 불리우는 영역에서 그에게로 오는 충동들에 의하여 키워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더 확실해진다. 순수하게 합리적인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실제 생활에서는 결코 그런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존재는 그의 의식적 활동과 더불어 그의 비합리적 경험으로 구성된다. 이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신화적 이미지 및 형상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기가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엘리아데는 책을 끝마친다.


책은 독자에게 어떠한 점을 전하고 있는가?


엘리아데는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종교와 풍습을 예로 들며 자신의 주장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려 노력한다. 그 범위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아이누인, 그리고 고대 중국의 신앙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내용 또한 자세하게 적혀 있기에 신뢰도가 높다. 이를 통해 각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종교적 인간’의 공통점을 찾으며 그 속의 내재적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종교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지 않고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비종교적 인간’에게서조차 종교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엘리아데는 이렇게 설명하는데, ‘아무리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그 자신의 역사를 즉 오늘날의 그를 형성시킨 종교적 선조들의 행동을 지워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사람의 실존의 큰 부분이 그의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는 불리우는 영역에서 그에게로 오는 충동들에 의하여 키워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더 확실해진다. 순수하게 합리적인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실제 생활에서는 결코 그런 인간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존재는 그의 의식적 활동과 더불어 그의 비합리적 경험으로 구성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자기가 비종교적이라고 느끼며, 그렇게 주장하는 ‘근대인’들도 여전히 수많은 은폐된 신화와 변질된 제의를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새해를 맞이할 때나 새 집에 살게 될 때에 수반되는 축제는 비록 속화되기는 했을망정 여전히 갱신의 제의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혼, 아기의 탄생, 새 지위의 획득, 사회적 진출 기타 등등에 따르는 잔치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관찰된다. 근대인의 신화, 그가 즐기는 연극이나 그가 읽는 책 속에 감추어진 신화에 관해서만도 한 권의 책이 충분히 씌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심지어 우리가 하는 독서도 신화학적 기능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대사회에서의 신화의 구연과 유럽의 농촌공동체에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구비문학을 대신하며, 무엇보다도 근대인들은 독서를 통하여 신화에 의해 수행되는 ’시간으로부터의 탈출‘에 비견될 만한 ’시간으로부터의 도피‘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인이 탐정소설을 가지고 시간을 ’죽이‘든, 어떤 소설에 나타나는 낯선 시간의 세계에 들어가든 독서는 그를 그의 개인적 시간에 끌어내어 다른 리듬에 통합시키고, 그를 다른 ’역사‘ 속에 살게 만든다.


엄격하게 말해서, ‘무종교적 인간’의 대다수는 종교적 행동으로부터, 신학과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못하다. 그들은 때때로 희화의 차원으로까지 타락되고, 따라서 그 성격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린 마술적, 종교적 여러 관념 아래를 헤맨다. 우리가 종교를 딱히 의식하면서 살지 않아도, 종교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엘리아데는 어찌 보면 발끈할 수도 있는 주장을 위에 적혀있는 근거를 들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또한 인간의 종교적 삶, 그리고 종교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 또한 이 책에서 충실하게 적어놓았다. 거룩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신화와 종교,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에 대해 근본적인 기반을 이루는 요소를 적으며, ‘종교적 인간’의 정서와 행동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느낀 점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알았던 몰랐던 간에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종교적 요소들을 한 번쯤 돌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엘리아데가 종교적 진리와 종교의 당위를 논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이고 공평한 시각에서 종교를 논하려고 노력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성과 속: 종교의 본질> M. Eliade 지음, 학민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