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병이 다 나아서 더이상 착란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도…… 지금처럼 절 사랑하실 건가요?"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의
대사.
이 대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단편을
대표하고,
동시에 작품집 전체를 대표할 수도
있다.
이 대사만 보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리라.
저 말을 한 여인은 매번 병간호를 하러
와주는 사내를 사랑하게 되고,
점차 병세가 호전되고 있어 마냥 기뻐하며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사내에게,
약간의 망설임 끝에 속삭이듯 묻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끝나더라도 다시 자기를
만나러 와주겠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좀 더 기괴하다.
이 단편은 단편집에서 가장 긴 편이고,
단편집에서 몇 작품을 빼 수정해가면서
구태여 이 글을 마지막 단편으로 넣었다는 것은 아마도
이 단편이 단편집에서 역설하던 모든 것들을 총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럼 이 단편이 어떤 단편이느냐. 제목에서 말해주다시피, 환자는 뇌막염을 앓고 있다. 그리고 환각과 고통으로 가득한 현재 속에서, 급작스럽게 한 사내의 이름을 부른다. 이 사내는 물론 그녀를 거의 알고 있지 못하고, 그녀 역시 그 전까진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뇌막염으로 물러버린 뇌의 괴상한 작용 때문인지, 이 광적인 발작 속에선 그녀는 그 어느 것보다도 그에 대한 사랑에 불타고 어떻게든 그가 자기 곁에 와 함께 있어주며 자신이 속삭이는 사랑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내 역시 그런 광적이고 맹목적인 사랑 고백에 점차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이 여인이 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뒤에는 이런 감정은 커녕, 이런 기억들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종의 이중인격처럼, 정상으로 돌아온 여인은 그를 그저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게 다룬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사내가 점차 미쳐가기 시작한다. 그녀에 대한 꿈을 꾸고, 꿈과 현실에서의 일을 점차 혼동하기 시작하고,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그랬던 양 광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기어이,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광기가 찾아오고 이제야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양 이어진다.
이 모든 일들은 그리 고딕스럽진 않은 분위기에서 일어난다. 분명 작중 상황과 인물의 증세, 행동들이 틀림 없이 고딕스러운 발작과 비명, 창백한 얼굴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구성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단편집에서 말하는 사랑과 광기, 죽음은 거대하지만, 모호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지근거리에서 현실과 끈적하게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닌 개체로서 나타나는 탓이다. 그것도 세 개의 개체가 아니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개체로서 말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이 단편집에서 사랑은 광기나 죽음과 뗴어놓을 수 없고, 광기나 죽음 역시 다른 두 가지 중 최소 한 가지와는 늘 밀접해서 나타난다. 사랑은 광적이거나, 죽음과 함께 찾아온다. 광기는 맹렬한 사랑, 또는 죽음으로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실현된다. 죽음은 늘 사랑과 광기를 빛으로서 내세우고, 그 그림자로서 다가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치열한 현재를 통해 그려진다. 왜냐면 밀림 속에서의 현재는 저 모든 것들이 늘 곁에 도사리고 있는 열병 섞인 현실이니 말이다.
이상의 것들은 작가가 제목이나 구성 등을 통해 애초에
의도했을 것들이고,
이하는 이와 별개로 읽으며 느낀 부수적인
것들이다.
하나는 동물에 대한 집착. 예전에 키플링의 단편들을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묘하게 동물들이 서술의 초점이 되거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글들이 많다. 덕분에 이따금,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글처럼 풍자적인 동화를 읽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꼭 배경이 밀림이 아니라 평범한 마을에 불과할 때도 그럴 때가 있는 걸 보면 더 묘하다. 분명 동물의 생명의 박동감이니 뭐니 하는 시적인 상징이 들어간 건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또 하나는, 호러란 장르에 대한 생각. 이 단편들은 대체로 괴기스러운 것들이 많고, 음울하거나 환상적인 존재들이 현실적인 탈을 쓰고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실, 뭐라고 해야 할까, 공포스러운 감정에 대한 글이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을 읽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자질하는 심장>이나 <절름발이 개구리> 같은 단편을 읽으며, 내가 공포스럽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이 글이 공포를 다루는 글이란 것이 명백해보인다. 하지만 키로가의 글들은 뭐랄까, 상술한 세 속성의 합일을 이야기하며 그렇기에 삶은 이 세 가지가 모두 합쳐진 것이다-하는 삶 자체에 대한 글처럼 읽힌다. 초현실적인 것들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온다는 느낌에 가깝다고나 할까? 뭔가 요상한 글들이다.
오 이거 궁금했는데 단편집이었구나
작가 이름 간지나네
오라시오 키로가? 첨 들어보는 작가인데 재미있어 보인다
뇌막염 환자~를 제외하면 다소 진부하게 느껴졌음 구매해서 읽을 정도로 대박 좋은 글이냐? 회의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