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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몬옐로 > - 장이지 (문학동네)



시인의 이름(혹은 필명)만 보고 30대 여자 시인인가 싶었는데 첫 시부터 군대 얘기가 나와서 내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시인께는 죄송하지만 시인의 이름을 볼 때마다 장아찌가 생각난다. 양파 장아찌, 마늘 장아찌, 깻잎 장아찌 등등. 장아찌는 마가린이나 버터에 비빈 밥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다. (?)

시 전반에 지독한 기운의 고독이 느껴진다.

초반부에 부제가 유령인 시들이 연달아 수록됐는데, 어딘가 자화상이나 일기처럼 느껴진다.

시작부터 마음에 드는 시들이 너무 많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유령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리고 시들이 끝날 때 마지막 줄은 딱딱한 화법으로 끝나는데 의도적인 장치로 보인다. 하종오 시인 이후(고인이 되신 이해웅 시인은 제외) 이메일로 연락을 드리고 싶은 시인이다. 문제는 시인의 이메일 주소가 시집에 쓰여 있지 않아서 연락드릴 수가 없다. 흑흑.

관통당한 사람이란 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하는 느낌이 든다. 어딘가 자학적이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창작인으로서의 고뇌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이 시인, 어딘가 나와 정서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읽을수록 시들이 점점 더 괜찮아진다. 인생 시집을 또 하나 발견했다.

그런데 2부쯤 들어서며, 전반부와 같은 매력이 사라졌다. (다행히 후반부부터 다시 내 취향의 시들이 잔뜩 수록됐지만)

시인이 서브컬처 문화에 심취한 오타쿠인지 인형이나 아니메 전투 장면 같은 내용이 담긴 시가 여럿 보인다. 갑자기 시인과 함께 프리큐어 시리즈 정주행이 하고 싶어진다.

부제가 이중섭인 시들이 여럿 보인다. 시인에게 이중섭이란 존재가 꽤 특별한 듯하다.

중화권 영화와 관련된 시도 여럿 보인다. 확실히 다방면으로 덕력을 갖추고 계신 듯하다.

라는 시에선 시와 시인의 정체성에 비판적인 느낌이 든다. 역시 이 시인은 자학적인 성향을 갖추고 있다.

문인들의 지저분한 사생활이 엿보이는 시도 몇몇 눈에 띄는데, 이것들이 정말 시에 불과한 건지 의문스럽다. 문인들의 지저분한 사생활이 연예인이나 정치인처럼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문단 내부에서는 쉬쉬하거나 문제를 삼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요 근래 문단 미투 논란이 있었으나 그건 어긋난 활시위 당기기였다고 본다. 드러난 문단 내 사건사고는 빙산의 일각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만 해도 얼마나 되는데.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이중적인 구조에서만 바라볼 문제가 아닌데 대중들은 딱히 관심도 없는 듯하다. 문인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디아블로니 뭐니 하며 메카물 전투 장면 묘사가 시 곳곳에 드러나는데 대체 뭔가 싶다. 내가 일본 아이돌을 주제로 글을 썼을 때 일반인들의 반응이 어떨지를 역지사지로 짐작케 해준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는, 자의식 과잉의 시들도 여럿 눈에 띈다.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시인의 이미지는 대하기 편한 찐따 성향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다른 문인들과의 일화들도 시에 종종 등장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를 잘하는 유형의 시인으로 보인다. 역시 전형적인 오타쿠 찐따 기질의 성향이 돋보인다.

시인이 학창 시절에 학교 폭력도 많이 당해봤고, 아직 어린 시절에서 못 벗어난 느낌이다. 나와 함께 아이돌 덕질하기에 적절한 인간 군상으로 보인다. 흐흐. 내 취향의 아이돌 세계로 츄라이를 하고 싶어진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시집 맨 뒤에 비평이나 해설 대신 Link라고, 시집에 등장한 여러 시어들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시집에 이런 식으로 시어를 세세히 따로 설명하며 미주처럼 수록한 경우는 처음 본다. 시인의 오타쿠 기질이 발동해 설명충처럼 줄줄이 늘어놓는다는 느낌과 동시에 너도 내 취향을 함께 공유하자는 의미도 담긴 듯하다.

맨 뒤의 미주 같은 Link를 보니, 시인이 대학생 시절 구체 관절 인형 카페에도 가입했다고 한다. 다만 비싸서 구체 관절 인형을 실제로 가진 적은 없다고. 역시 오타쿠셨다! 게다가 건담이나 모빌 슈트 아니메, 라이트 노벨 얘기까지 등장한다. 오오, 토모요! 서브컬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시인이다.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의식을 많이 하는 듯하다. 여기서 나도 좀 한 마디 해야겠다. 진짜 더럽고 추잡한 연놈들은 멀쩡히 잘만 돌아다니고 이런 유형의 조용히 방구석에서 덕질하며 글을 쓰는 이들만 피해를 본다. 미투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 된 내부 정화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선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시집이었다. 시인 또한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으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호감을 느꼈다. 내 인생 시집 중 하나이자 인생 시인이 되셨다. 연락만 된다면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킨 후, 의형제를 맺어 따거로 모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