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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ães - Aline Shinzato



나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기사단장 죽이기>보다 훨씬 더 난해하다고 생각한다. <기사단장>이 하루키 작품 중 가장 난해하다는 오해를 받는 이유는


①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 때문이거나

② <스푸트니크>가 출간된 지 오래된 작품이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거나


둘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물론 ①의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루키는 다른 유명 작가보다 문체가 쉬운 편이기 때문에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가 ① 유형이다.


<스푸트니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가 쓴 작법서라고 보는 관점, <노르웨이의 숲>의 안티테제라고 보는 관점,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했다는 관점 등 다양한 관점이 열려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하루키가 쓴 작법서'라는 관점에서 독후감을 쓰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3명이다. 주인공, 스미레, 뮤. 주인공은 문학을 좋아하는 초등학교 교사이고 스미레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서로의 유일한 친구인 두 사람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날 친척 결혼식에서 스미레는 '뮤'라는 별명을 가진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뮤의 비서로 취직한 스미레는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되고 일정을 마친 두 사람은 그리스의 어떤 섬의 별장으로 휴식을 취하러 간다. 거기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다 어느 날 밤 스미레가 뮤와 관계를 맺으려 시도한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뮤는 스미레와의 관계를 거부한다. 이에 상심한 스미레는 실종된다. 뮤는 스미레를 찾기 위해 주인공을 부르고, 일본에서 그리스로 날아간 주인공은 뮤와 함께 스미레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일본으로 돌아와 삶을 계속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스미레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온다. "그런데 장소가 어디더라? 지금은 잘 모르겠어. ... 이곳으로 마중 나와줘." 주인공은 어딘가로 스미레를 찾으러 떠난다.



내가 이 작품을 작법서라고 보는 이유 중 첫 번째는 초반부에 스미레와 주인공이 나눈 대화이다. 스미레는 소설이 잘 쓰이지 않아서 고민하고, 이에 주인공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소설을 쓰는 것도 그것과 비슷해. ... 진정한 소설이 되려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주술적인 세례가 필요해."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옛 중국인들이 문을 만들던 방법이다. 옛 중국인들은 튼튼한 성문을 만들기 위해 죽은 전사들의 뼈를 쌓고 거기에 개의 피를 뿌렸다고 한다. 여기서 '죽은 전사들의 뼈'를 '과거의 작품'으로, '개의 피'를 작가 자신의 신선한 영감으로 생각한다면 원로 작가가 작가 지망생에게 하는 조언 같지 않은가?


두 번째 이유는 중반부에 스미레가 이야기한 '나무 위로 올라간 뒤 그대로 사라진 고양이 이야기'이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하루키가 소개한 개인적인 체험과 똑같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2834) 작가의 체험이 글의 소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인물의 입을 빌려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렇기에 비약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장면을 '<스푸트니크>는 일반적인 소설과 다르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작가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이유는 지나친 난해함이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난해함에는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것이 있었기에 나는 <기사단장>을 지금처럼 좋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스푸트니크>의 난해함이 명확한 의도를 가졌는지, 아니면 전자의 스핀같이 무작위적인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 공중전화 부스 장면은 단순히 <노르웨이의 숲>의 오마주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스미레는 주인공의 피를 통해 '저 세계'로 나아갔는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친절하다. 하지만 작법서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후배 작가에게 '이게 난해함의 극한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재미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다. 먼저 하루키 작품다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교류가 이 작품에서는 미스터리 호러 소설처럼 으스스하게 묘사되어서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뮤의 관람차 장면은 심리 스릴러의 클라이맥스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또 초반에 묘사되는 주인공의 심리와 주인공과 스미레의 대화는 잘 쓴 연애소설 같았다. 결말 부분에서 자신의 학생이 저지른 도둑질을 가지고 주인공이 마트의 경비와 설전을 하는 장면은 추리 소설의 명장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작법서라고 보는 관점에서 이렇게 감상을 쓰기는 했지만 이게 제대로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3번 이상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기묘하게도 휴가지의 지루한 카페에서, 야간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자의 배낭에서, 또는 이사한 동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평점은 (?)점이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평점을 매길 수는 없다. 어렵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기에 하루키의 난해함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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