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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일어
혼란스러운 삶이냐, 고요한 죽음이냐,
삶 속에 잠겨있는 죽음은 언제든 고개를 쳐들고,
그럼에도 와타나베는 살아가길 택했다
한줄 요약
죽음은 삶 속에 잠겨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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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숲, 번역된 제목은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리뷰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로 먼저 접했었다. 그때는 독서를 심도있게......라기보단 눈이 많이 안 뜨였던 때라 그저 재밌게 읽었었다, 후반부가 너무 환상 요소가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정도가 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글을 잘 쓴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런 뒤 한동안 하루키는커녕 일문학을 접할 일이 없어졌다. 여러 이유는 있었지만 그때 당시 내게 일문학은 그리 중요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판타지/스릴러를 쓰고 싶었던 나는 분위기 위주의 일문학을 고의적으로 기피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노르웨이숲을 읽을 기회가 왔다. 군대에서 읽은 게 참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난 정말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부족한 시간 짬내가며 감상문 콘티를 쓰고(...) 이렇게 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노르웨이숲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꼽으라면, 나는 두 개를 꼽을 것이다. 하나는 주제, 하나는 줄거리. 노르웨이숲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제로 깔려있고, 그 전제는 계속해서 작용 중임을 작중 전개에서 드러난다. 바로 "죽음은 삶에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이다.
줄거리도 간단하다. "와타나베가 '그럼에도' 살아가길 택한 이야기"이다.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내내 뚜렷한 갈등도, 사건도 없는 것 같지만, 노르웨이숲은 분명 와타나베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정확히는 죽음이 잠겨있는 삶 속에서) 삶으로 나아가길 택한, 그 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소설이다.
노르웨이숲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가득하다고 봤다. 당장 주제부터가 와타나베의 깨달음인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이니 말이다. 이 독후감은 노르웨이숲의 대부분의 인물, 배경, 사건을 삶과 죽음에 맞춰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이다.
우선 인물들부터 살펴보자.
'삶'과 '죽음'으로 인물들을 나눌 수 있다면, '삶'에 해당하는 인물은 미도리, 나가사와, 레이코(레이코는 특수한 경우라 나중에 다루겠다)가 되겠고, '죽음'에 해당하는 인물은 나오코, 기즈키, 하쓰미가 된다.
삶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특징이라면, 작품 끝까지 살아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도 나름 명확하다. 살아가고자 한다. 미도리는 정말 질기고 억센 생명력을 보여주고, 실제로 와타나베에게 있어서 미도리는 '삶'의 기로에 해당하는 히로인이다.(미도리는 나중에 또 추가적으로 다루겠다.)
나가사와는 여기 모든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삶'과 '죽음'이 대극에 위치한 인물이다. 미도리는 죽음이 잠겨 있는 삶 가운데 삶 그 자체로 살아가고, 레이코도 미도리만큼 억세고 강한 건 아니지만 마찬가지다. 와타나베의 삶도 죽음이 잠겨있었고, 나오코야 두말할 것도 없고, 기즈키나 하쓰미도 똑같다.
나가사와의 특징이라면 삶의 모든 걸 게임과 유흥으로 생각한다는 점이고, 뚜렷한 목적의식과 그를 이룰 만한 재능과 노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도 한 적이 없고, 삶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런 그가 죽은 지 30년 된 작가만 읽는다는 건 그가 품은 아이러니일 것이다.(이는 곧 삶이란 모순으로 가득 찬 혼돈 상태라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삶과 죽음의 대극에서 벗어난다. 하쓰미의 자살을 통해서 말이다. 하쓰미의 자살 이후 와타나베와의 짧은 통화는, 결국 그의 삶도 죽음이 잠겨 있는 삶이라는 것을 증명한다.(혹은 그렇게 되었음을.)
레이코는 와타나베와 함께 다룰 것이니 뒤로 미루고, 미도리를 보자. 미도리는 앞서 말했듯 와타나베의 3명의 히로인 중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여주인공이다. 동시에 '날 것의 서민'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음담패설을 비롯해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위와 혁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서 알 수 있다.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그녀도 와타나베 못지 않게 죽음을 접하고, 죽음이 그녀 곁에 잠겨 있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살아간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간다. 그녀의 아주 외설스러운 망상도 생명의 자유분방한 의지, 혹은 죽음에 억눌린 생명의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내게는)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특히 아빠 장례식에서 알몸으로 자기 신체 부위를 이것저것 알려준 것은 죽음에 직접 대면한 생(生)의 모습이라고 생각됐다. 죽음 앞에 날 것의 육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더 경이로운지(그 생명력이 어찌나 억세고 질긴지!) 말이다.(물론 이 파트는 충격이 커서 재독하고 확인해야 된다.)
'삶'에 해당되고, '삶' 그 자체인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애정을 가진다. 이는 와타나베가 그녀와 같이 죽음이 잠긴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의미적으로 볼 때엔 '삶'이 건네는 호의라고 볼 수 있다.
와타나베는 '죽음'에 강력하게 얽혀있는 나오코에게 얽매여있었고, (이후에 다루겠지만) '죽음'에 해당되는 공간인 아미 사에 들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와타나베는 미도리(삶)를 몇 번이고 외면하고, 미도리(삶)에게 상처를 주고 실망시킨다.
그러나 결국 생(生)에 이끌린 와타나베는 미도리를 택한다. 나오코의 죽음으로 다시 방황했고, 그로 인해 미도리를 다시 실망시키지만, 와타나베가 '그럼에도' 삶으로 나아가길 택했을 때, 미도리는 "너 지금 어디 있어?"라며 마지막까지 삶의 호의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언제든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삶과의) 화해의 과정을 거칠 수만 있다면 언제든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말부의 '나는 어디에 있지?'는 레이코와 함께 다루는 편이 좀 더 이해와 해석에 쉬우리라 생각해 나중으로 미루겠다.)
즉,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이며, 와타나베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이자 미래가 되는 히로인이다. 이정도면 노르웨이숲의 진히로인이라 보기 충만한 것 같지만, 나는 미도리를 진히로인으로 보기보단 와타나베의 이상향으로 보고 싶다.
'죽음'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었기 때문에 '죽음'에 해당되는 것이냐면, 맞는 말이다. 특히 하쓰미의 경우는 자살하고 나서야 나가사와에게 '죽음'에 해당되는데, 하쓰미의 자살이 나가사와에게 죽음이 잠긴 삶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기즈키는 이미 죽은 뒤니 말할 것도 없다만, 나오코의 경우는 자살 이전까지 살아있었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해당되는 히로인이다. 어찌보면 메인 히로인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숲은 기즈키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위태한 관계에서 시작해 나오코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무리에 접어들기에, 존재감만큼은 메인 히로인이라 봐주는 게 옳은 처사다.
나오코는 와타나베 못지 않게, 그보다 더 심하게 죽음에 얽혀있는데, 언니의 자살과 기즈키의 자살로 인해 유년기의 모든 애정의 고리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깊은 상처, 곧 망가져버린 삶은 와타나베로 인해 간신히 유지됐지만, 그마저도 와타나베의 방황과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깊게 침체되기 시작한다.
아미 사에서 그녀는 더 나아지는 듯하나, 완전한 '죽음'의 공간이 될 수 없던 아미 사에선 그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겉으로 괜찮은 척 덮어주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나오코는 기즈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단 한 번 벗어났던 스무살 생일날을 갈망하지만, 결국 그녀는 스스로 곪아가길 택하고 말았다.(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반강제된 선택이기도 하다.)
나오코는 결국 자살한다. 죽음이 잠겨 있는 그녀의 삶은 이미 늪이었고, 그녀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건 와타나베가 죽음을 택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만일 와타나베가 삶(미도리)과 죽음(나오코) 중에서 죽음, 곧 나오코를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죽음 밖에 없었을까?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에 얽매여 있었고, 특히 나오코는 더더욱 얽혀 있었다. 그런 그녀가 기즈키가 아꼈던 와타나베, 곧 기즈키에겐 '삶(이자 세상)'이었던 와타나베를 통해 '삶'으로 나아올 수 있었을까? 나는 쉽게 긍정하기 힘들다. 단순히 나오코가 노르웨이숲에서 '죽음'에 해당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가진 트라우마는 기즈키뿐만이 아니다. 그걸 유일한 삶의 통로인 와타나베가 전부, 혹은 그에 준하게 해소를 시켜줘야만 했을 터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노르웨이숲은 죽음이 언제 고개를 치켜들어도 이상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죽음은 사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오코에게 주어진 시간은 와타나베가 설령 나오코를 택했던들 해결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와타나베가 맞이할 결말도 나오코와 비슷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이코가 남았다. 레이코는 '죽음'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삶'에 속한 인물이다. 오히려 따지자면 와타나베와 비슷하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나오코의 자살 외에 없다는 점이다.
레이코는 삶에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삶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그 공간이 바로 아미 사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안식을 취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러나 함께 생활해온 나오코가 끝내 자살해버리면서, 자신은 여전히 살아가야 됨을 깨닫고 나온다.
하지만 삶이란 혼돈 상태이다.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와타나베의 대학이 대표적인 삶의 공간인데, 대학생들에게서 혁명의 이름이 나돌아다녀도 수업은 꼬박꼬박 듣고, 혁명을 부르짖는 반면 여학생들에겐 주먹밥이나 싸오라는 어설프고 모순적인 세계다.
죽음의 공간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던, 정적이고 고요한 세계에서 시끄럽고 혼란스런 삶의 세계로 나아가려니 레이코는 두려움이 일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점 때문에 나가길 망설였다. 하지만 그곳엔 와타나베가 있었다. 삶의 공간에서, 비록 방황하고 있긴 하지만, 와타나베가 있었기에 레이코는 기꺼이 용기를 내서 삶 속으로 다시 나온다.
그런 용기는 와타나베에게도, 레이코 자신에게도 좋은 작용이 되었다. 레이코의 삶에 대한 용기는, 나오코의 자살로 묶인 두 사람의 상처를 삶 가운데서 추모할 수 있게 됐고, 두 사람의 교합은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서 방황할 서로에 대한 위로와 공감이 되었다. 레이코는 과거 삶으로부터 받은 상처의 치유를, 와타나베는 과거와 현재를 지배하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서로의 체온을 나눔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히로인을 레이코라 꼽고 싶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이상향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과거가 되었다. 레이코는 와타나베와 동류다. 죽음에 얽혀있던 와타나베와, 죽음의 공간에 있던 레이코는, 결국 다시 삶을 살아가기로 한다.
노르웨이숲은 죽음이 전제로 깔린 분위기다. 정적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와타나베에게 짙게 깔려있다. 노르웨이숲의 표현을 빌리자면, 와타나베는 죽음이 잠겨있음을 늘 인지하고 있던, 삶 속에서 방황하던 사내였다. 하루키는 이런 것들을 매우 사소한 디테일을 잡아내고 살려냄으로써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하루키의 통찰력은, 사소한 요소들이 전달해주는 느낌을 아주 예리하게 잡아내고, 그것을 묘사로 치밀하게 배치시킨다. 더군다나 그의 배경지식의 활용은 결코 인위적이거나 쓰려고 배웠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위치할 뿐이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것이 하루키의 묘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또 하나 첨언하자면, 노르웨이숲에서 죽음은 결코 사건이 아니다. 물론 하나의 사건처럼 기능하긴 하지만, 그것이 다른 여타 문학에서처럼 다루지 않는다. 죽었다. 끝이다. 그에 대한 반응이 오간다. 끝이다. 덤덤하게 나아간다. 죽음은 삶 속에 잠겨있는 것이기에, 그저 잠깐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삶은 여전히 나아갈 뿐이다. 그 중간에 죽음이 때때로 얼굴을 비출 뿐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숲에서의 죽음이다.
외설스러운 내용도 많다. 미도리가 거기에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일문학이 그럼 그렇지 하더라도 충격적인 양대산맥이 미도리와 레이코에게서 나온다. 그건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하도 얘기를 듣다 읽어서 생각보가 충격이 덜하고, 읽을 만하다고 느꼈지만, 그것 때문에 하루키가 야설원숭이로 보인다고 하는 게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르웨이숲이 순전한 야설이냐고 하기엔 넘쳐나는 하루키의 통찰력이 엿보인다. 삶과 죽음으로 노르웨이숲을 다루느라 다른 얘기는 못 적었지만, 운동권을 비판하는 모습이나, 나가사와의 노력에 대한 뼈 아픈 말, 불공평한 사회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같은 건 읽다가도 그쪽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내가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분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치는 건 아니다. 미도리, 나오코, 나가사와, 레이코, 하쓰미, 모두가 각자 인물됨이 살아있고,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특히 나오코의 신비스러움은 어느 소설을 비교해봐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누군가는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와타나베처럼 비척거리면서,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죽음과 대면하며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와타나베를 보라. 그는 결국엔, 그럼에도, 살아가길 택했다. 미도리는, 그의 삶은, 몇 번이고 그에게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있는지 묻는다. 기다려줄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살아나가다 보면......
삶을 살아가라. 죽음이 언제나 그대들 곁에 있음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살아가라. 그것이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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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어차피 군인이라...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바부야~~
와 ㄹㅇ 잘썼다! 그래서 마지막 '나는 어디에 있지' 장면은 어케 해석함?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노력하는 와타나베?
처음에는 그 방황이, 삶을 택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방황 중이다...로 읽혔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삶을 택한 뒤, 여태 했던 방황(삶이냐 죽음이냐)과는 다른 종류의 방황(어떻게 살 것이냐)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 같아. 어디로 가야할지(미도리) 알고 있으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는 거지ㅎㅎ
오 그렇게 보는 게 더 설득력 있네. 네비게이션에 gps가 필요한 이유로 해석하면 되겠다. 좋은 감상 고마워!
잘 읽었다 근데 비추가 왜 이리 많지
일문학은 원래 반일비추가 좀 많더라
좋은 독후감이 념글 가면 책장인증 벌래들이 설자리를 잃기때문에 미리 싹을 자르려고 비추 주는거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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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독갤 와서도 반일비추는 여전함을 느낀다
감상문 개추 ㄷㄷ ... 근데 비추수 에바네~ 책의 호불호를 떠나 퀄리티 높은 감상문인데 ..
일문학이고 하루키잖슴ㅋㅋ 어쩔 수 없지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땡스땡스~~ 나도 처음으로 감상문 콘티까지 써가며 썼다ㅋㅋ
반일 비추구나... 그럼 난 친일추 누른다 ㅅㅂ
친일추추
친일추
ㅋㅋㅋㅋㄱㅅㄱㅅ
놀숲은 비추가 이렇게 쌓이더라 나도 그랬던거같음ㅋㅋ
다들 추비추 누르는 것 같음
이 책 첫부분이 나이먹은 와타나베가 비행기 타고 가면서 눈 감고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는 나오코를 애써 떠올리려고 하는 장면이잖아. 근데 나이 먹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떠올리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아서 고통스러워 하는 부분이 나는 왜이렇게 좋던지 ㅋㅋㅋㅋ 근데 이 글에 비추어 보면 이 부분도 산 사람에게는 언제까지고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걸까
그치, 죽음은 삶 속에 잠겨 있으니까. 나이 먹은 와타나베는 그 시점에선 이미 충분히 삶 속에서 나아가고 있기에, 죽음이 그만큼 덜 뚜렷해졌다는 것이겠지. 어느 한편으로는 나오코를 충분히 떨쳐낼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나오코를 잊게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비추가수 왜이리 높아?
원래 일문학에 비추 눌리고 하루키까가 많음ㅋㅋ
아 그래??
하루키 추
잘봤다
오
이 글을 읽고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야스를 드디어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미도리와 대화에서 까마귀가 나무구멍속 유리조각을 넣는것처럼… 과 주인공이 레코드판속 유리에 손을 다쳐 붕대를 감는것 그리고 히즈키가 붕대를 보며 당구가 잘안쳐지는것이라고 하며 치료를 해주며 상처가 벌어지진않는것에 안심하는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 비유속 해답이 안찾아지네 도와줘
까마귀는 보석을 착각해서 유리조각을 넣는 것이니 이 해석에서 유리조각은 좋아'보이는' 것이고 좋아'보이는' 것에 다친 것이고, 그렇게 다친 것으로 인해 어떤 것을 못하게 된다해도 그것은 치명적이지 않고 일시적일 뿐인 것이니 안심하라는 인간의 생명력과 회복력에 대한 신뢰같습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