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그가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람을 넣은
케인스는 부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신이 도착했소. 5시 15분 기차역에서 만났소."
그러나 그는 돈도 없었고, 학위도 없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논고]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청구하는 것이었다.
오랜 친구로 이미 철학과 교수가 되어 있던 무어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시절 지도교수
러셀이 그의 논문 심사를 맡았다. 그러나 논문 심사는 한 편의 코미디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심사위원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ㅋㅋㅋ - dc App
본래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재벌 가문이었고, 그 많은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습니다. 부친 사후 전 재산을 기부하거나 친척들에게 나눠주고, 자기는 오두막에 책상 하나 의자 하나만 두고 스스로 벌어먹고 살았죠. 1, 2차 대전 모두 자원 입대하여 종군하였는데, 2차 대전 때는 52세로 자원하여 병원 짐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