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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암묵적으로 하는 가정이 있다. 소설 속의 세계는 허구이지만, 이를 읽고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그 세계가 실존하며 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이 글이라는 가정. 믿을 수 없는 화자를 활용하는 소설들조차 이 최소한의 가정은 흔들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이 가정을 흔들면 애초에 이 글이란 것이 독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해지는 탓이다. 통일성 없는 문장들이 아무렇게나 나열되어 있는 것과, 하나의 배경을 바탕으로 인물들의 갈등을 서술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쟈지>는 악질적인데, 언뜻 한 번 읽으면 후자라고 생각하게 만들다가, 곰곰히 뜯어보면 뭔가 요상하게 미심쩍은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는 점이 그렇다. 분명히 이 글에는 배경이 있다. 이 배경은 마치 도시의 지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지도처럼 또렷하고 구체적이어서, 실제 지명이니 랜드마크니 식당이니 극장이니 하는 것들을 가져와 써먹는다. 하지만 사실 잘 찾아보면 이 식당이나 극장들은 실제 이름을 괴상하게 뒤섞어놓거나 바꿔놓은 것들이고, 랜드마크들은 작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몇 번이고 '이것은 사실은 A가 아니고 B인데, 알고 보니 C였다' 하는 식으로 수정된다. 다분히 고의적인 장난이다.



물론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름을 잘못 쓴 개그 소설에 불과하겠지만, 마음대로 바꿔 쓰고 섞어 쓰는 언어유희들을 감안해봤을 때 이 장난질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술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자.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세계를 상상하며, 만약 그 세계가 현실의 구체적 장소와 비슷하다면 자연스럽게 그 인상들로부터 세계를 조합해낸다. 특정한 장소나 거리 등에 대한 조각난 기억들, 풍경들을 적당히 엮어내고, 그 위에다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라는 애매한 대기를 까는 식으로 말이다. 비록 이 세계가 실제론 누더기에 가깝지만 일반적으로 독자가 그 세계가 누더기 같다는 인상을 받을 일은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다.



<쟈지>는 그렇지 않다. 혼란스럽고 우스꽝스럽지만, 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얘기하며 세계를 그려내다가, 점차 이런 단서들로부터 끌어내는 인상을 꼬아놓기 시작한다. 처음엔 '하, 같은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쓰기엔 그래서 적당히 이름만 바꿔치기 해놨군. 이 건물이면 아마......'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 내가 아는 파리가 맞나?' 하는 생각으로 옮겨가고, 마지막에는 온갖 난잡하고 괴상한 사건들을 서술하는 문장들을 통해 '애초에 이 세계를 온전한 전체로서 존재하도록 쓴 게 맞나?' 하는 질문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이미 상술했지만, <쟈지>의 악질적인 점은 이런 질문이 꼭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을 때에야 갖도록 유예시킨다는 점이다. 앞부분을 읽으며 온갖 발음대로 쓴 말들,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는 대화들 따위를 보지만, 어디까지나 특이한 표현을 위한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장난이 글의 통일성을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글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마수가 점차 심층으로 뿌리를 뻗어가며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아마도, 내게는 그랬다.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같은 글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간악한가. 아예 첫 문장부터 이 글은 글이고, 글 너머에는 딱히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하고 대놓고 말하지 않나.



어쨌든, 소위 <울리포> 계열 글은 이제 슬슬 내려둘 때가 된 것 같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와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만, 이런 허무주의적인 전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