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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 김귀옥, 선인, 2019.

김귀옥의 《그곳에 한국군‘위안부’가 있었다》는 2020년 현재 한국군‘위안부’에 관한 유일한 책이다. 저자가 한국군‘위안부’ 문제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이 2002년이니 강산이 거의 두 번은 바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체 어째서일까. 책을 읽으면서 이같은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책에는 저자가 어떻게 한국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자료를 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1956년에 군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육·이오사변 후방전사(後方戰史): 인사편》에는 육군이 한국군‘위안부’제도를 운용한 기록을 고스란히 기술하고 있다. 2002년 저자의 발표 이후 곧바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해당 서적의 이용을 금지했고 국회도서관 역시 마찬가지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해당 서적을 “이용불가”로 현재까지 분류해 두고 있다.

《후방전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육군은 ‘특수위안대’를 세워 한국군‘위안부’제도를 운영하였다. 정병감실에서 특별위안활동의 하나로서 특수위안대를 설치한 것이었다. 설치 목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질적으로 사기 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격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결국은 군인들의 성욕 해결을 위한 것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적의식을 지닌 ‘위안부’는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을까. 《후방전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서울지구에 3개 소대 그리고 강릉지구에 1개 소대를 각각 설치”, “‘위안부’는 서울서구 제1소대에 19명, 강릉 제2소대에 31명, 제8소대에 8명, 강릉 제1소대에 21명으로 계 79명”, “그 외에도 춘천, 원주, 속초 등지에도 설치한 바 있다.”

또한 《후방전사》에는 이들의 ‘실적’을 표로 정리해 첨부하였는데 표의 내용을 풀이하자면 1952년도 서울 제1소대의 19명의 ‘위안부’는 총 44,240명, 서울 제2소대의 27명의 ‘위안부’는 총 61,350명, 서울 제3소대의 13명의 ‘위안부’는 총 25,310명, 강릉 제1소대의 30명의 ‘위안부’는 총 73,660명을 상대하였다. 즉 총합 89명의 ‘위안부’가 204,560명의 군인을 1952년 1년 동안 상대하였으며 이는 1인당 하루 평균 6.15명이다. 한국군은 자국 여성을 대상으로 이와 같이 후안무치하고 반인륜적 행위를 시행하고도 이를 자랑스럽게 ‘실적’이라는 명목 하에 조사하고 기록하였다.

문제는 《후방전사》에는 위의 내용과 일주일에 2회, 군무관의 협조와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 하에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성병 대책을 강구하였다는 내용 외에 더 이상의 한국군‘위안부’ 관련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안부’의 인적사항을 포함해 이들이 어떻게 동원되었고 또 어떻게 처우되었으며, 1954년 특수위안대가 폐지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 하루하루 군인 몇 명이 ‘위안부’를 ‘이용’했는가는 표로 남길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조사해놓고서는 어떻게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은 기록하지 않았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다면 공식 기록이 아닌 곳에서 한국군‘위안부’의 흔적을 찾는 수밖에 없겠다. 책에 이와 관련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전부 14개의 증언과 문헌으로 파악되는데 너무 글이 길어져 그 자세한 내용은 따로 첨부하겠다(댓글 참조). 증언들과 문헌들, 그리고 《후방전사》의 내용을 종합해 파악할 수 있는 한국군‘위안부’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

한국군‘위안부’의 인적 구성은 확실치 않다. 이북말씨를 쓰지 않는 이남사람들이었다는 증언과 한 남한 군인이 같은 고향 출신 ‘위안부’를 만났다는 증언,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국군에 붙잡혀 ‘위안부’가 될 뻔한 서울출신 여성의 증언 등을 통해 한국군‘위안부’는 남한 출신으로 보여진다. 반면 인민군 여자 포로를 국군이 따로 데려갔다는 증언, 이북 여성들을 납치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증언 등을 감안하면 한국군‘위안부’에 북한 출신도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국군‘위안부’의 규모는 어떠하였는가. 《후방전사》에 나온 내용을 종합하면 서울 3개 소대, 강릉 3개 소대의 대략 128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이 통계에는 춘천, 속초, 원주, 포천 등 포함되지 않은 ‘위안부’들이 빠져있다. 채명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고 하니 대략 180 ~ 240명 전후로 추론된다. 저자는 여기에 1953년 증설된 4개의 ‘위안소’를 추가해 총 300명이 넘는 규모로 추측한다. 다만 해당 ‘위안소’의 증설 소식을 다룬 기사에 따르면 해당 ‘위안소’는 주간에 식사 및 다과, 야간에 무용을 취급종목이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서 성교를 목적으로 하는 ‘위안소’가 성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군‘위안부’의 운영에 대해서도 명확하진 않지만 채명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장에서의 공에 따라 티켓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한편 리영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원하는 병사는 자기 월급에서 표를 사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위안행위는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후방전사》에 나와있는 대로 특정 장소에 군‘위안소’를 설치해 군인들을 받도록 하는 방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규헌, 김회오, 리영희의 회고록 등과 같이 ‘위안부’들이 군인이 있는 곳으로 출동위안을 가는 방식이었다. 이 두 방식을 하는 인원이 명확히 구분되어 운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후방전사》에 실린 표에 따르면 서울의 3개 소대와 강릉의 1개 소대에서 ‘위안부’들은 하루에 평균 6.15명의 군인을 상대하기를 강요받았다. 이들이 매일 위안행위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면, 예컨대 일주일에 2,3일 정도 위안을 강요당한다면 하루에 12.3 ~ 18.45명을 상대했어야 하므로 그 성적 착취가 얼마나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군‘위안부’제도, 즉 특별위안대 설치와 운영에 책임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계통상으로는 육군본부의 후생감실(1949년 당시)이다. 후생감실은 1951년 2월 10일에는 휼병감실로 개칭되었고, 1954년에는 정병감실로 재개칭되었다. 이들은 큰 틀에서는 같은 업무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후생감실 창설 이래로 한국군‘위안부’제도가 폐지되는 1954년 3월까지의 역대 총책임자는 총 4명인데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특히 ‘특수위안대’가 창설될 당시의 휼병감은 육군대령 장석윤으로 해방 직전까지 만주국군 중좌(중령)였다. 저자는 한국군‘위안부’제도가 장석윤과 같은 후생감들이 일본군 출신들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일본군, 만주국군, 관동군 등으로 구성된 한국군대의 특성과 그러한 구성을 가능하게 했던 미군과 이승만 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를 미군의 점령 이후 계속되는 식민주의 체제의 작동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즉 저자는 국군의 주력이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군 복무를 했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는 일본군이 하나의 롤 모델이었으며 그렇기에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일본군에 대한 기억을 체계적으로 이식, 그 결과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본 따 한국군‘위안부’제도를 도입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한국고전종합DB》의 검색결과를 예시로 들며 군‘위안부’라는 개념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찾을 수 없는 개념인 만큼 한국군‘위안부’는 일제의 식민주의를 내면화한 일본군 출신 장교들에 의한 일본군‘위안부’의 ‘카피’이자 ‘부활’라고 역설한다.

저자의 주장이 합리적인 주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군‘위안부’가 단순히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치부되어야 하는가에서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일본군‘위안부’가 없었다면 한국군‘위안부’는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고 ‘위안부’의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성폭력이 자행되지는 않았을까.

저자는 한국전쟁기의 성폭력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강간이다. 둘째는 모성과 여성성에 대한 폭력으로, 여성 생식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형태가 대표적 예다. 셋째는 강제 결혼 및 납치로, 그 실상은 제주 4,3때 회자된 “서청은 올 때 한 트럭을 타고 왔다면, 갈 때는 두 트럭을 타고 갔다”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넷째는 악명 높은 성고문이다. 이러한 전시 성폭력은 억제할 수 없는 성본능의 결과라기보다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여성 민간인에게 나타난 국가폭력의 유형이다. 설령 한국군‘위안부’를 제외하더라도 한국전쟁기의 성폭력은 저자가 언급한대로 다양한 유형을 통해 부지기수로 나타났다. 저자는 한국전쟁기의 성폭력에 대해서 일제 잔재적 성격이 강하며 성폭력과 반공주의적 기제가 결합된 특성이 있으며 이는 친일파가 반공주의자로 둔갑한 역사를 감안하면 별개의 것이 아니라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러한 부분이 없다고 볼 순 없다. 36년 간의 일제강점기와 피비린내나는 이데올로기의 살육장에서 어찌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한국군‘위안부’를 포함한 한국전쟁기의 성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본질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나는 성폭력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제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문제라 여긴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언급한대로 분단과 전쟁 과정의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 국가폭력으로서의 성폭력이다. 국가가 분단과 전쟁, 독재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성폭력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하고 사과를 해야만 여성들도 진정으로 국가의 구성원이 되리라는 주장에 당연히 동감한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오직 국가만이 책임을 지닌다고 봐야 할까. 수백 명이 넘는 한국군‘위안부’들 중 왜 한 명의 피해자도 아직 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왜 일본군‘위안부’는 1992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가. 저자 역시 책에서 196,70년대 성폭력 피해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가부장제 성문화가 만든 ‘피해자의 가해자로의 인식전환’을 발견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또한 첫 문단에서 얘기한대로 왜 한국군'위안부'문제는 처음 공식 발표된 지 18년이 흘렀음에도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비하면 이토록 대중적 관심이 지지부진한가. 그 이유로 가부장제의 문제를 민족주의적 문제로 환기시킬 기제가 없다는 것을 내세우면 불경한 망발일까.게다가 국가의 책임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해결됐다고 해서 한국군‘위안부’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용수 선생을 둘러싼 세간의 막말을 우린 부디 몇 달 전에 경험하지 않았는가.

결국 한국군‘위안부’제도가 일본군‘위안부’제도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은폐되고 침묵되는 과정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로 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국가의 책임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역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의 책임이 정부의 몫이라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의 책임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달 10일부터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활동을 시작한다. 부디 한국군‘위안부’를 포함한 한국전쟁기의 성폭력 문제가 국가에 의해 명명백백히 진상이 규명되어 하루빨리 국가가 국가로써의 책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이러한 국가의 책임 소명을 통해 오랜 기간 피해자들을 죄어온 가부장제에 대한 내부적인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시작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