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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다면......

빅 브라더를......

하지만 그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요?

작년도, 올해도, 내년도 1984년일 텐데


한줄 요약
희망 없는 세계, 명백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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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를 읽기 전에 걱정하던 게 있다면, 통제사회에 대한 경고를 통제된 사회(군대)에서 읽을까 걱정이었단 것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군대에서 읽는 1984란 특별하기 그지없다(...)

디스토피아와 관련해선 이미 멋진 신세계를 접한 바가 있고, 1984는 워낙에 명성이 드높아서 읽지 않고도 대충 무슨 내용인지 얘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꿔말하면 그렇기에 안 읽고 있었다가 이제야 읽게 됐다는 뜻이다. 물론 내용 자체는 결국 내가 뭣도 모른 채 떠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인의 리뷰를 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뿐일까?

1984의 특징은 멋진 신세계와 대조하면서 보는 편이 낫다 싶다. 그편이 1984를 부각시키기도 좋고, 설명하기도 쉽다고 생각한다. 둘이 디스토피아 소설로는 상당하다 못해 대명사급이지 않은가.(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데 2개밖에 언급하지 않는 내 독서력에 대해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여력이 된다면 내가 전에 쓴 멋진 신세계 리뷰를 함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류, 행복, 합리의 삼위일체로 이뤄진 세계는 비극인가.

멋진 신세계가 좀 더 산뜻하고 밝되, 괴리감과 이질감이 큰 느낌이라면, 1984는 반대로 괴리감과 이질감은 없고, 그 대신 심각하리만치 우중충하고 시종일관 어두운 느낌이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고, 차후 전개를 기대하거나 희망을 품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차이를 보이는 건 두 세계의 근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두 세계의 근간을 논하려면 "희망"에 대해서 논하는 게 비교하기 수월할 것이다.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하느냐면, 바로 '혁명'에 대한 희망이다. 세계의 구조질서를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한 희망을, 세계가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명백한 차이가 드러난다.

멋진 신세계는 희망이 없는, 존재할 수가 없는 세계다. 왜냐면 그 세계는 '멋진 신세계'이기 때문이다. 내부화자로선 철저히 긍정될 수밖에 없는, 오로지 외부화자만이 부정할 수 있는(그마저도 외부화자-곧 독자들-가 부정만 하는 건 아니다) 세계다.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복이 모든 걸 부정한다. 그렇기에 희망은 필요없다. 가질 이유도 없다. 그러니 존재할 수도 없다.

1984는 희망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짓누르고 억누르고 압제하며 통제하고 척결한다. 통제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도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고, 어떤 이들도 통제된 언어 이상의 사고를 할 수 없다. 희망이 싹 틀 여지를 틀어막다 못해, 그것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려 한다.

내부화자가 희망을 가질 순 있지만, 그건 곧 증발한다는 얘기와 직결된다. 이 책의 도입부는 결말을 예고했으며, 결국 몇 백 페이지 동안 그 희망의 시한부를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일 외엔 독자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쉽게 비교하면, 혁명의 가능성 자체가 0인 세계(멋진 신세계)가 있고, 혁명의 가능성을 0로 수렴시키려는 세계(1984)가 있는 것이다.

1984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통제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발상들이 상당히 정교하다는 점이다. 물론 어디서든지 감시 가능한 텔레스크린 같은 초월적 기술이나, 말하기쓰기기계같은 현대판 음성인식의 상상상상위호환 같은 기술도 그런 축에 속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신어와 이중사고다.

신어와 이중사고는 1984의 핵심이자 정수이고, 또 오늘날에 있어서 가장 경고의 메시지로 기능한다. 당의 일원이어야 하지만 당의 개념을 모두 이해해선 안 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모든 열정과 정력을 쏟아부어야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뭔지 몰라야 한다. 손가락을 네 개를 피더라도 다섯 개라 말한다면 다섯 개라고 답해야 한다.(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인지를 배신하는 것이 이중사고이자, 그것의 도구가 바로 신어이다.

신어는 갈수록 단어가 줄어가며, 단어가 주는 목적은 단 하나다. 사고의 통제다. 사고는 언어로 이뤄진다. 언어가 통제된다는 건 곧 사고가 통제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악"이란 말을 쓰지 않고, "최악"과 비슷한 모든 대체 표현을 틀어막는다면, "최악"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신어의 목적이자 이중사고의 본질이다.

이것이 왜 오늘날의 경고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오늘날에 있어서 윤리의 이름으로 들이미는 '검열'이 1984의 신어와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는 이에 대해 과몰입이라 비판할지라도!) 언어를 검열하고 새로운 언어로 교정시키면, 그 새로운 언어가 사고의 언어로 정착된다면, 결국 그 언어에 사고가 따라가게 된다. 바꿔말하면,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게 통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윤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한 독단과 위선은 분명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다. 1984에서 언어의 통제가 가능한 까닭은 자유를 앗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를 앗아버렸기 때문에 언어마저 통제할 수 있는데, 오늘날엔 그것을 스스로 옭아매게끔 윤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해 통제한다.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건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니, 그걸 명분 삼아 스스로를 통제하게끔 내세우는 것이다. 이 언어를 쓰면 윤리적이고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들의 사상을 가장 쉽게 퍼뜨리고 정착시키는 방법이다.

다시 작품 얘기로 돌아와서, 이러한 얘기는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2부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골드스타인의 책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1984의 정수는 2부에 있고, 하이라이트는 3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1984를 이해하고자 하면 2부를 읽으면 되고, 1984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3부를 읽으면 된다. 물론 최고로 좋은 건 1부부터 쭉 읽는 것이다ㅎ

골드스타인의 책을 빌려 조지 오웰은 1984에 깔린 아주 탄탄한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구조는 멋진 신세계와 비슷하게도, 외부화자가 존재하지만 그들마저 사정이 비슷해 내부상황을 긍정해준다는(실상은 묵과이지만) 것이다. 물론 2부의 골드스타인 파트는 지루하다고 하지만 나는 1984에 깔린 기저 논리들을 모조리 엿보는 느낌이라 재밌게 읽었다.

3부는 말 그대로 1부와 2부에 걸쳐 쌓아온, 그 미래라곤 없는 희망의 말로를 철저하게 보여준다. 특히 1984는 멋진 신세계와 달리 주인공을 설정하고, 주인공의 시점에서 사건을 전개하기 때문에 긴 분량으로 할애된 몰입감은 3부에서 고통으로 치환된다. 희망이란 1984의 세계에서 통제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저 끝없는 절망, 절망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4만큼 노골적인 소설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절망적일뿐이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적나라한 소설이 요즘 시대에 얼마나 긍정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1984는 정말 잘 썼다. 재밌다면 재밌다고 하겠다. 고통스러웠지만, 그건 순전히 몰입할 재미와 필력이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신어와 이중사고 때문에라도 1984를 읽었으면 좋겠다. 신어와 이중사고에 대한 내용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니까. 언어에 대한 통제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각심을 가지는데 1984 만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