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진화생물학은 커다란 개념적 혁신을 맞는다. 진화생물학이 그 논리적 기초를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둔다고는 했으나 많은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의 단위와 대상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생물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종의 보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진화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for the good of group)’라는 논리는 스스로 번식을 자제하는 집단조절기능을 가진 종들만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종들은 자원고갈로 인해 끝내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입각한 것이다. 이 같은 집단선택설적 자연선택 이론은 다윈의 개체중심적 이론에 어긋나는 것으로 특수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실제에 적용되기 어렵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집단인가 개체인가?

가상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닷가 벼랑에 서식하고 있는 어떤 갈매기 집단을 상상해 보자. 갈매기는 대개 암수가 한번 짝을 지으면 평생토록 같이 사는 전형적인 일부일처제 동물이다. 이 집단의 갈매기들은 암수 한 쌍이 해마다 알을 둘만 낳아 기른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자원을 지나치게 고갈시키는 일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대대로 유전된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이 집단에 세 개의 알을 낳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고 하자. 그리고 알을 셋이나 낳은 쌍도 세 마리의 새끼를 키우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새끼들이 다 잘 자라 각자 또 번식을 하고, 또 그 새끼들이 또 번식하고 하는 식으로 몇 세대를 지나게 되면 이 집단에는 ‘세 알 유전형(genotype)’이 원래의 ‘두 알 유전형’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네 알 유전형’도 생겨날지 모른다. 알을 더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더 많은 새끼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갈매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알의 수는 부모가 키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조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한 둥지 내의 알의 수는 부모의 부양능력과 여러 환경요인의 영향아래 가장 많은 새끼들을 배출하도록 자연선택된 적응의 결과이다. 개체가 집단의 존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하는 체제는 결코 진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이기적인 행동의 전파를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윈의 후예를 자청하던 생물학자들도 오랫동안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폰 프리쉬(Karl von Frisch), 틴버겐(Nikko Tinbergen) 등과 함께 1973년 노벨 생리 및 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같은 위대한 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렌츠는 1966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공격성에 대하여(On Aggression)>에서 맹수들이 종종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지만 좀처럼 목숨을 앗을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 까닭으로 다분히 집단선택설적 설명을 제시했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개체들의 집단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논리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펼치다가 끝내 집단선택설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비운의 조류학자가 있다. 베로 윈-에드워즈(Vero Copner Wynne-Edwards, 1906-1997)는 새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1962년에 출간한 <사회적 행동에 관련한 동물의 분산(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r)>에서 동물 개체군의 자기조절 능력이 집단 수준에서 진화한 적응이라는 주장을 너무 대대적으로 하는 바람에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다른 많은 학자들의 오명을 온전히 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윌리엄 해밀턴 :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

자연선택이 집단보다는 유전자 수준에서 훨씬 더 보편적이고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걸 일깨워준 것은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논문이었지만 집단선택설에 대한 직접적인 포문을 연 사람은 조지 윌리엄즈(George C. Williams)였다. 당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1966년 <적응과 자연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진화생물학이 집단유전학의 도움으로 이른바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 또는 ‘현대적 종합(Modern Synthesis)’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오류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자연선택이 종종 개체보다 집단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윈-에드워즈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해밀턴의 논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후 1976년에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역시 해밀턴의 이론을 바탕으로 집단선택설에 의한 설명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파헤쳤다.

하지만 해밀튼의 50여 쪽에 이르는 수학적 논문과 더불어 윌리엄즈와 도킨스의 책이 구구절절이 설명한 집단선택설의 모순을 미국의 만화가 라슨(Gary Larson)은 만화 한 컷으로 해치웠다. 설치류의 동물 나그네쥐(lemming)는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치티(Dennis Chitty) 교수의 연구로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미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 떼로 돌아다니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들이 이처럼 떼죽음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의 관점을 지닌 것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나그네쥐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만화에서 그 숭고한 나그네쥐들 중 홀연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의 출현을 상상한다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나그네쥐가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나그네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 수준의 선택은 개체 수준의 선택을 당할 수 없다. 집단선택은 그만큼 일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도 개체의 번식을 통해야만 자신의 복사체들을 퍼뜨릴 수 있다. 한 개체내의 유전자들의 운명은 그 개체에게 달려있다. 다윈의 고민 두 가지에 대한 분석을 다룬 저서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 1991)>에서 크러닌(Helena Croni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전자들은 스스로 발가벗고 자연선택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꼬리나 가죽, 또는 근육이나 껍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또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이나 기막힌 위장술, 배우자를 매료시키는 힘, 훌륭한 둥지를 만드는 능력 등을 내세운다. 유전자들의 차이는 이러한 표현형(phenotype)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적 변이에 작용함으로써 유전자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그들의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가치(selective value)에 비례하여 다음 세대에 전파된다.

자연선택은 유전자, 개체, 집단, 그리고 심지어는 종의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적응(adaptation)은 표현형으로 나타난다. 선택의 대상(object)과 결과(effect)는 종종 다를 수 있다. 철학자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선택 장난감(selection toy)’을 가지고 이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 이 장난감에는 맨 위층으로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은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 만일 가장 작은 구슬들의 색깔이 녹색이라면 맨 아래층에는 결국 작은 녹색 구슬들만 모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일 작은 구슬을 선택한 것이지 녹색 구슬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의 대상(selection of)은 작은 구슬이었는데 결과적으로(selection for) 작은 구슬들의 색깔인 녹색도 선택된 것이다. 자연선택은 표현형에 작용하고, 그 결과로 후세에 전달되는 것은 유전자이다.

사라지지 않는 집단선택설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실체(entity)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단위(unit)와 수준(level)으로 나뉘어 이뤄지지만, 이 둘은 때로 혼용되며 종종 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일찍이 도킨스는 자연선택의 과정에는 복제자(replicator)와 운반자(vehicle)가 관여하는데, 선택의 단위에 대한 논의는 운반자가 아니라 복제자에 초첨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철학자 헐(David Hull)은 복제자의 개념에는 사실 복제의 대상 외에도 선택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실체인 교류자(interactor)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과정이란 “교류자들의 차등 절멸과 확산이 그들을 만들어낸 복제자들의 차등 보전을 일으키는 과정(a process in which the differential extinction and proliferation of interactors cause the differential perpetuation of the replicators that produced them)”이라는 헐의 논리에 따르면, 선택의 수준은 바로 교류자를 묻는 것이고 단위는 복제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대상, 단위, 또는 결과에 비해 선택의 수준은 훨씬 더 다양할 수 있다. 작게는 유전자, 세포, 생명체(organism)로부터 크게는 친족(kinship), 집단, 심지어는 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 수준에서 선택은 일어날 수 있다. 선택의 수준 논의에서 유전자 선택(genic selection)의 관점을 제외할 수는 절대 없지만 논쟁의 열기는 주로 개체와 집단간에 벌어진다. 다윈은 이 점에 있어서 사뭇 혼란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그의 자연선택 이론은 기본적으로 개체중심적이지만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사회에서 이타주의 또는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려면 집단간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집단에 충성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용감하며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자세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 또한 자연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부족들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다윈의 이 같은 모호함에 힘 입은 바 있는지 윌리엄즈와 도킨스 등의 통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빗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 엘리엇 소버, 마이클 웨이드(Michael Wade)를 비롯한 일군의 진화학자들은 집단선택설이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몇몇 특수한 조건만 맞으면 일어난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이른바 ‘다중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으로 알려진 이들의 이론은 나름대로 설명력을 지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실제로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철학자 데이빗 헐(David Hull)은 이 같은 혼란은 근본적으로 개체와 집단이 지니고 있는 정의의 모호함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개체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딸기밭을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각각의 딸기 개체들은 종종 땅 속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딸기 줄기를 뽑아 들면 서로 독립적인 개체인 줄 알았던 여러 개체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땅 위에서는 분명히 서로 다른 개체처럼 제가끔 벌 나비를 유혹하며 번식 경쟁을 벌이지만 땅 속에서는 하나의 개체이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개미나 꿀벌의 군락은 분명히 많은 개체들로 이뤄져 있지만 전체가 대단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조직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개체처럼 유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종종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불린다. 이렇게 보면 생물계의 모든 조직은 결국 넓은 의미의 개체이며, 모든 개체는 다 보다 작은 구성체들의 집합이다.

에드워드 윌슨 : 다시 집단선택설로?

선택의 수준 문제를 두고 세계 최고 권위의 개미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 윌리엄즈와 더불어 자칫 아무도 읽지 않을 해밀턴의 1964년 논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우리 모두가 유전자 렌즈를 끼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던 그가 최근 홀연 포괄적응도 개념의 혈연선택론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집단선택설의 부활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빗 슬론 윌슨이 1970년대 중반 잠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에드워드 윌슨, 이 두 윌슨이 최근 다시 의기투합하여 진화, 적어도 사회성의 진화에는 유전자나 개체보다 집단 수준의 선택이 훨씬 더 중요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참으로 난처한 경험을 했다. 2005년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서 열린 인간행동및진화학회(Human Behavior and Evolution Society)의 기조강연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강연장을 가득 메운 해밀턴 추종자들에게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야속하게도 해밀턴이 세상을 떠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공적이 다분히 부풀려진 감이 있다는 발언으로 장내는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회생물학 논란으로 반대 진영의 비난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윌슨 교수인지라 장내의 분위기에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애꿎게 강연장 중간쯤에 앉아 있던 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들먹여 보였다. 그 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아마 내가 유일한 윌슨 교수의 제자였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정작 윌슨 교수는 놓아둔 채 총총히 방을 빠져나가며 내게 다가와 어찌 된 일이냐며 따져 물었다.

사실 윌슨 교수는 선택의 수준에 관하여 초지일관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개미를 연구하는 특수성 때문인지 그는 늘 해밀턴의 혈연선택을 군락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의 자서전 격인 <자연주의자(Naturalist, 1994)>에 보면 해밀턴 이론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그는 마이애미로 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으로 해밀턴의 논문을 읽는다. 그는 “나는 처음에는 ‘이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며 또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대안을 찾아보려 노력했다”고도 썼다. 그러나 마이애미에 도착한 이른 오후 “나는 포기했다. 나는 개종하여 해밀턴의 손 안에 나를 맡겼다”라고 토로한다. 그 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그를 하버드에 모셔오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연주의자>에 보면 훗날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이론을 개발한 트리버즈(Robert Trivers)가 해밀턴의 이론을 보완한 것을 구태여 “끝내 해밀턴의 논리에서 실수를 찾아낸 것은 바로 트리버즈였다”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 윌슨 교수는 해밀턴의 이론에 대한 불편함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자연선택의 수준은 개체인가 집단인가?

두 윌슨 교수가 공동 저술한 2007년 논문 ‘사회생물학의 이론적 기초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Sociobiology)’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그러나]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노는 물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에 관한 논의가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다.


자기희생을 진화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희생이란 이처럼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우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희생의 미담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철저하게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반을 둔 그의 자연선택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 바로 자기희생(self-sacrifice) 또는 이타주의(altruism)였다. 어떻게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희생하는 행동과 심성이 진화할 수 있을까? 다윈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개미나 벌과 같은 이른바 사회성 곤충(social insect)의 군락에서 벌어지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번식 희생은 다윈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불가사의한 생명 현상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이론으로는 각기 다른 생명체들로 태어나 스스로 번식을 억제하고 오로지 여왕으로 하여금 홀로 번식할 수 있도록 평생 봉사하는 일개미나 일벌들의 헌신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제1판 8장에서 사회성 곤충의 극단적 이타주의에 대해 “내게는 언뜻 극복하기 어려운 특별한 난관이며 실제로 내 이론에 치명적인” 문제라고 토로한 바 있다. 다윈은 끝내 이 문제에 관한 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타주의적 행동에 처음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한 윌리엄 해밀턴

이타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진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936~2000)이었다. 포괄적응도 이론(inclusive fitness theory) 또는 혈연선택론(kin selection theory)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이론은 개체 수준에서는 엄연한 이타주의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해보면 사실상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흔히 rB > C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공식으로 알려진 해밀턴의 법칙(Hamilton’s rule)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적응적 이득(B, benefit)에 유전적 근친도(r, genetic relatedness)를 곱한 값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 cost)보다 크기만 하면 그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해밀턴보다 일찍 이 문제의 해결에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설적인 영국의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잭 홀데인(J. B. S. Haldane, 1892~1964)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종종 사석에서 뉴턴·아인슈타인·파인만 등을 들먹이며 생물학계에도 이들만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가 있느냐고 윽박지른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언제든 급하면 다윈의 품에 안길 순 있지만, 그는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순발력 있는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내세울 수 있는 분이 한 분 있다. 그가 바로 홀데인이다. 내가 그를 소개하며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아직도 마치 구전문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최첨단 과학계에서 구전문화라니?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거쳐 오랫동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교수생활을 한 그는 물론 그가 남긴 많은 연구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대학 앞 선술집 등 여러 형태의 사석에서 남긴 촌철살인의 우문현답들로 더 유명하다. 어느 날 진화학자로서 조물주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조물주께서는 “딱정벌레에 대해 지나친 호감(an inordinate fondness for beetles)을 가졌던 분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딱정벌레는 기재된 종만 무려 35만 종에 이르는데, 이는 전체 곤충 종수의 거의 절반이다. 홀데인의 상상 속에는 태초에 세상을 만드시던 그 엿새 중 어느 날 진흙으로 딱정벌레 한 마리를 빚으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시곤 스스로 만드신 딱정벌레의 귀여움에 정신이 빠져 그만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다양한 모습의 딱정벌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던 하느님의 모습이 그려졌던 것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뱉었다는 이 같은 말들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구전자들마저 이제 연로하여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홀데인 어록을 정리해둬야 할 텐데.

“형제 2명, 혹은 사촌 8명의 목숨이라면 내 목숨을 버릴 수도?”

또 어느 날 누군가가 홀데인에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내가 만일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서로 유전자의 50%를 공유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평균이 아니라 확실하게 50%이다. 번식을 위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 이른바 감수분열(meiosis)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정확하게 50%를 넣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 났어도, 그래서 내 유전자를 보다 많이 남겨주고 싶더라도 내 난자와 정자에 내 유전자의 50%가 아니라 하다못해 51%라도 꾸겨 넣는다면 내 아이는 기형으로 태어나고 만다. 부모-자식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정확하게 50%이고 형제자매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물론 부모가 같을 경우, 평균 50%이다. 배다른 형제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25%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흔히 사촌이라 부르는 대상을, 유전적으로 계산하면 팔촌이라고 불렀더라면 훨씬 더 정확했을 뻔했다. 예를 들어, 나와 내 이종사촌 간의 유전적 근친도는 나와 어머니의 관계가 50%이고, 어머니와 이모의 관계가 또 50%이고, 이모와 그의 딸의 관계가 역시 50%이니 모두 곱하면 12.5% 즉 1/8이 된다. 그래서 홀데인은 형제 둘 또는 사촌 여덟의 유전자를 합하면 내 유전자만큼 된다는 걸 그리 말한 것이다. 이 명언의 현장을 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날 그 자리에서 홀데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머리를 끄덕이며 웃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일벌은 왜 평생 불쌍하게 일만 하다 죽는가?

해밀턴은 그의 혈연선택 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로 개미, 벌, 말벌 등 이른바 벌목(Order Hymenoptera)에 속하는 사회성 곤충을 택했다. 벌목의 곤충들은 매우 독특한 성 결정체계(sex determination system)를 갖고 있다. 개미와 벌 사회의 암컷들은 대부분의 유성생식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유전자가 교합하여 태어나지만, 수컷들은 모두 미수정란으로부터 탄생한다. 다시 말하면 암수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암컷이 되지만 수컷은 오로지 암컷의 유전자만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컷의 유전자가 개입하지 않아야 수컷으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그래서 개미와 벌의 수컷은 우리처럼 염색체를 한 쌍(diploid, 이배체)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벌(haploid, 반수체)만 지닌다. 인간의 염색체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여자들은 그들의 세포 안에 모두 23쌍 즉 46개의 염색체들(n=46)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은 달랑 한 벌 즉 23개의 염색체(n=23)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성 결정체계를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식물의 체계인 이배체(diploidy)와 달리 반수이배체(haplodiploidy)라고 부른다.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기제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밝혀졌다. 지금은 폴란드 영역이지만 당시 프러시아 실레시아 지방의 신부였던 요한 지어존(Johann Dzierzon)이 1845년에 내세운 가설을 1856년 생물학자 칼 폰 시볼트(Carl von Siebold)가 현미경을 이용하여 장차 수벌로 발생할 난자에는 정자가 진입한 흔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확증해주었다.

이 같은 메커니즘은 사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기 전부터 알려진 지식이었지만 그것의 진화적 의미는 그로부터 무려 100년이 흐른 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해밀턴은 1964년 이론생물학 저널(The Journal of Theoretical Biology)에 “사회 행동의 유전적 진화(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라는 제목의 다분히 수학적인 논문을 게재하며 벌목 곤충의 반수이배체 성 결정 메커니즘과 사회적 진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해밀턴은 이를테면 개미 사회에서 일개미들이 왜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어머니인 여왕개미로 하여금 모든 번식을 도맡아 하도록 평생 돕기만 하는지에 대해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두 일개미 자매는 어머니인 여왕개미로부터는 우리와 같은 이배체 생물과 마찬가지로 50%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그 어느 날 혼인비행 때 당신의 정자를 어머니의 몸속에 넣어주곤 세상을 떠난 아버지 수개미로부터는 그의 유전자 전부(100%)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끼리 평균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배체 생물과 달리 평균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개미 제국의 발견(1999)]이나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2007)]을 참조하기 바란다. 일개미는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의 몸에 자기 유전자의 50%밖에 남겨주지 못한다. 따라서 개미 사회의 번식을 순전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번식을 하여 자기 유전자의 50%를 남기는 것보다 여왕개미를 도와 자매인 일개미를 낳게 하여 자기 유전자의 75%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한 것이다.  


일벌 입장에서는 희생이 번식보다 유전자 관점에서 유리하기 때문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사회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은 영국 작가 버틀러(Samuel Butler)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들이 각자 모이도 쪼아먹고, 때론 싸움도 하고, 짝짓기도 하고, 알을 낳고 살다가 죽는 걸 보며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갈 존재이다. 나는 2001년에 에세이집을 한 권 출간하며 제목을 [알이 닭을 낳는다]로 붙였다. 흔히 ‘죽음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최승호 시인이 붙여준 제목이다. 버틀러나 윌슨이 길게 설명한 내용을 보다 간략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해본다.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눈높이 또는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유전자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언뜻 허무하고 냉혹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엄연히 숨 쉬고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고 내 삶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내 유전자가 진정한 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칫 염세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 나는 벌써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런 강의를 하는 거의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인데 어느 날 졸지에 내가 씌워준 유전자 렌즈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홀연 마음이 평안해지더라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마음을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우리더러 마음을 비우라지만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으랴. 그런데 유전자 렌즈를 끼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진다.
그런 다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꼭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를 읽으라고 권한다. 책 한 권이 하루아침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수 있을까? 내겐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 책이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DNA, 불멸의 나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의 생명의 역사는 유전자의 역사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났다 사라져 갔어도 그 옛날 생명의 늪에서 우연히 탄생하여 신기하게도 자기와 똑같은 복사체를 만들 줄 알게 된 화학물질인 DNA와 그의 후손들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창조해낸 것이다. 각각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수십 억년 전에 태어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DNA의 눈으로 보면 생명은 엄연한 영속성(perpetuity)을 띤다. 지구의 생명의 역사는 DNA라는 매우 성공적인 화학물질의 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글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대담] 등이 있다. 2000년 제 1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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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이래서 내가 아직도 진화생물학 뽕을 못 버린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