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일 2020/10/23


- 52일차 2020/12/13


- 오늘 읽은 책


1. 수용소 군도 - 알렉산더 솔제니친 - 열린책들, 김학수 역

272p ~ 355p - 84p




- 52일차, 솔제니친이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갔을 때, 그러니까 체포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관념이 180도 뒤바뀐 채로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신문을 당한 후, 어깨를 맞대로 꾸역꾸역 낑겨 누워있는 죄수들이 있는 감방에 처음으로 내팽겨졌을 때 부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수용소에서는 꿈도 못꿀,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온수 샤워와 충분한 배식, 넉넉한 감방 공간, 심지어 체스판과 책들 까지. 정치범 수용소의 민낱은 다른 수용소의 얼룩진 면상에 비하면 호텔과도 같았다. 


이곳에 잡혀 들어온 신참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위해 싸우고 혁명을 위해 일어났던 동지들이었다. 조국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조국에게 품고 있었던 실날 같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대체 인간에게 조국이란 어떤 것인가, 머릿속에는 헬조선 탈조선을 외치며, 미국으로 캐나다로 호주로 일본으로 동남아로 떠나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우리 의원님 말대로 하면 다 해결이 된다며 댓글을 다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떠오르고, 토착왜구들만 없었으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사람들이 떠올랐고, 씹덕 문화를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소비하면서, 입으로 또 손가락으로 반일을 외쳐대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대신, 자기들 대신 선봉에 설 사람을 맹신하고, 그것을 오남용하며 반대를 위한 목적의 수단으로 써먹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써먹을 땐 국가의 아들, 다치고 나면 남의 아들이라는 국방부의 격언이 떠올랐다. 대체 조국이 뭐길래.


소련 당국은 자국 군인이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는 서방 세계의, 부르주아의, 적국의 사고방식에 물들었다며 죄인 취급했다. 소련은 왜 그토록 외부 세계의 감염을 두려워했을까? 그 기관은 포로에 대한 어떠한 조약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소련을 위해 싸우다 포로로 잡힌 군인들은 그 악랄한 독일군의 대우가 아닌 조국의 대우에 그토록 굶주려있었다. 다른 포로들이 조국으로 부터, 친구로부터, 가족으로 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 꾸러미를 받는 동안, 소련의 포로들은 굶주려야 했다. 그 옛날 러시아에서 혁명을 도모하던 죄수들, 포로들이 연고도 없는 이들에게 그토록 많은 은총을 받았던 것에 비하자면, 혁명 후에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혁명 이전의 욕심 많고 재능 있던 기사는 그 욕구로 인해 잡혀들어왔고, 조국에게 버려졌다는 배신감 때문에 열혈한 독일군 스파이가 되었던 군인은 다시 조국의 회유에 걸려 잡혀들어왔다. 자신을 황제라 굳게 믿고 있던 순진한 노동자 청년은 대수롭지도 않은 망상으로 쓰여진 결의문 때문에 잡혀들어 왔다. 이유도 참 다양하다. 솔제니친은 어떤가? 그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 부르주아적 사고를 촉진시켰던 것일까? 부농과 빈농의 차이 마저도 죄라 규정짓고 짓이겨버리며, 계급 의식, 특히 노동자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했던 소련은 대체 왜 그토록 압도적인 권력을 부여했을까?


바로 그 짓이김을 위한 권력, 계급 의식이란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급이외에 모든 차이를 짓이기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짓이기기 위한 권력이 있어야했고, 권력을 부여하는 주체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 이윽고 그 권력욕에 도취된 자들까지도 짓이겨졌다. 그들은 그저 번호표를 늦게 뽑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잡혀들어온 국가의 아들들 중에 조국에 대해 팩트를 꼽는 사람은 오직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쇤 노인과 소련이 침략하려고 했던 나라의 포로 뿐이었다. 중년의 기사도, 청년 장교도, 시골 노동자도 소련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놀랍게도 스탈린이 악이라는 데에는 그 모두가 동의했다. 

밤에는 신문을 받고, 낮에는 이런저런 일과를 하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배고픔이라는 욕구에서 사색과 고뇌로 도망치는 일 뿐이며, 20분 남짓한 산책과 하루에 한번 허용된 배설 시간에서야 인생의 자유와 희열을 맛보는 조국의 자식들의 열띤 토론에서 나온 결론이라는게, 소련은 믿을 수 있고, 스탈린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라니.


그런 곳에서도 끄나풀은 있다고 암탉이라 불리는 죄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남들이 밤에 신문을 당하러 불려갈때, 낮에 신문을 당하러 불려가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모두 불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 배반은 있었다. 그리고 그 배신자, 그 사기꾼의 표정과 음성과 행동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린, 

그를 믿지마! 그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아! 라고 외침이 솔제니친을 살렸다. 그는 이것을 영점 직감력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인생을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는 것이 재밌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그 곳에서, 십여년 간의 오랜 수감생활동안 그를 살린 것은 이 영적 직감력이었고,

그 시간을 되돌아보건데, 그 직감이 틀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노라고 회고했다.


이 영적 직감력이라는 게 무엇일까, 언뜻 알것같기도 하다. 인간이 철두철미하게 발달시킨 페르소나 뒷면에 자리잡은 그 동기를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인가?

솔제니친은 우리의 이 영적 능력을 기술에게 맡겨버렸기에 이 능력을 개발할 기회가 없다고 했다.

잔인함의 밑바닥에는 감상이 있다고 했다.


솔제니친이 대체 그곳에서 인간의 무엇을 목격했는지 더욱 읽고 싶어 졌다.


sns을 끊자.





오늘까지 달린 거리

3243p / 42195p (약 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