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이거 옛날에 명작 읽기 강의 과제로 냈던 비평문인데 한번 읽어보셈ㅇㅇ

———————————————————————

개인의 기억은 시간을 머금는다. 기억의 이전에 분명한 과거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어떤 상태를 갖게 되며 그 상태는 그 사건으로부터 적절하게 인과성을 갖는 상태로서 기억이라 불린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한 기억은 시간을 머금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간은 소비되기 전 분명히 균질적이다. 그 시간은 초, 분, 시에 의해 구획되며 분명하게 계량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소비된 이후 비균질적이다. 물론, 우리는 그 시간에 대해서도 초, 분, 시에 의해 계량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시간에서 우리가 느낀 것, 정확히는 우리의 몸이 느끼고 소비된 시간에 대해서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서 느낀 10분과 어려운 시험 종료 10분 전 소비된 시간의 양과 질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런 비균질적인 시간을, 다시 말해 소비된 시간을 머금은 기억 역시도 비균질적이다. 분명 이는 우리가 가진 어떤 기억은 매우 흐릿하며, 또 다른 기억은 바로 지금 느낀 것처럼 매우 선명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균질적인 것은 더 나아가 구획될 수 없기도 하다. 기억이란 우리의 의지뿐만 아니라 외부 대상의 소여와 그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반응 역시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대상을 매개 혹은 수단으로서 파악하는데 몹시 익숙하다. 이는 우리에게 일상성에는 편의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의성은 단순히 어떤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넘어서 그것에 대해 파악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근간을 둔다. 더 나아가 우리는 편의성의 궁극적 원인을 소급해볼 때 절대다수의 매개와 수단이 균질성을 담보한다는 사실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균질성을 담보한 것, 즉 매개와 수단을 통해서 어떠한 사태에 맞부딪히는 우리에게 비균질적인 것을 “그 자체”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당연히 앞서 비균질적이라고 규정했던 기억에 대해서도 동일할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에 대한, 즉 역사적 사건의 전말에 대한 실마리를 잡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지점에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유의미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1. 광주, 그리고 소설

소설가 한강은 1970년 출생으로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1980년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분명, 광주는 한강이라는 개인에게 있어 고향일 것이다. 물론, 광주라는 그 공간이, 정확히 말해 혈흔이 낭자하기 전의 그 공간이 한강이라는 개인에게 심리적인 고향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생물학적 고향인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10년 전 광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사건이 발발한 그해, 1980년에 서울로 이동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녀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소년이 온다』에서 지시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강은 왜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광주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인가? 단순히 그녀가 소설가이기 때문인가? 그녀가 소설가이기에 이야기를 서술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소설가라고 해서 에세이나 논문을 작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조지 오웰의 경우에도 그의 작품 『1984』, 『동물농장』 과 같은 소설 외에도 에세이를 작성하거나 실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가라 하여 반드시 소설만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수단들을 통해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를 꾀해 사실의 단면에 주목하도록 했음이라 추측한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이, 소설의 진술들은 어떠한 것들을 지향하고 지시한다. 물론 이때 “그 지향과 지시의 끝이 실재를 향하는가 실재가 아닌 것을 향하는가?”, 그것을 중요치 않다. 그것에는 괄호를 쳐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향과 지시, 바로 그 작용이다. 소설가는 이 지향과 지시 작용의 성질을 규정한다. 그것이 “긍정인가, 부정인가?” 아니면 “물음표인가, 느낌표인가?”의 성질을 통해 그가 증명하는 세계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현현하는 것이 소설가의 책무인 것이며 독자는 그것을 해석해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실의 단면들을 포착하여 구성된 입체적 상을 통해 사건을 유사하게 상상할 수 있는데 한강이 그 부분을 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2. 소설, 그리고 죽어 있는 이야기

그러나, 한강의 세세한 이미지와 상징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야기의 본질은 ‘죽어 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크게 2가지로 나눠진다. 먼저, 이는 인물들의 죽음이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연관된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조명된다. 그런데 그 조명 장치는 결코 자신들이 취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닌 타자가 그들의 행동을 조명하며 그 조명 속에는 그들의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히 우리가 의미하는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층적 의미에서의 죽음이다. 기존의 생물학적 관념에 덧붙여 그것은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인식 경험적인 의미를 가진다. 당연히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증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생물학적 죽음은 실재의 부재를, 사회적 죽음은 중요성의 부재를, 정신적 죽음은 공허함을, 인식 경험적 죽음은 주체로서의 정상적 인식 불가능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은 이들은 결코 죽음 이후에 자신을 서술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타자들이 그들을 조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소년이 온다』는 중간에 직접적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 타인의 이야기와 혼합하는 ‘선주’와 ‘교대 복학생’이 등장한다. 그러나, 잘 보면 둘 모두 역시 일종의 죽음을 경험했다. 선주는 자신의 증언을 녹음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지 못한다. 염해지지 못한 시체가 으레 그렇듯이 그녀의 정신도 반동으로 관짝을 두드렸을 뿐이다. 결국, 그녀의 결심은 말하고자 했던 의도는 공허함으로 끝남에 다름없다. 교대 복학생은 어떠한가? 그 역시 죽은자다. 그는 택시 기사로서 살아가며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사회의 외진 구석에 있는 자다. 그 시대의 대학생, 상아탑을 상징하는 집단의 구성원에서 외진 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 이외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또 정신적으로도 죽어 있다. 그는 증언에 대해서 자신의 기억하기를 꺼려하며 반항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다른 죽음은 바로 인물들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어떠한 사실도 얻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비균질적인 기억들, 각자 그 끔찍한 사건에 대한 부분적 기억들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는 그것조차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로부터 그 기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조차도 그 기억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완전히 말할 수도 없다. “그 자체”는 결코 포착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듣는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의 기억의 재현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소년이 온다』에서의 인물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들,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의 의식은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향할 뿐 그 사실에 담겨있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들로부터 볼 수 있는 것들, 느낄 수 있는 것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껍데기들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주검에 다름없다.

3. 죽어 있는 이야기, 그리고 살아 있음

하지만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살아있음’을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이야기는 “죽음”을 전제하며 “살아있다”. 그런데 이 살아있음은 증언을 충분조건으로 갖지 않는다. 그 주검에 대한 우리의 해석도 개입되며 이의 근간은 증언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해석은 증언된 자의 존재 그 자체가 바탕이 된다. 이러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획할 수 있다. 소설 내부의 ‘파악함’과 소설 외부의 ‘이해’이다. 소설 내부의 ‘파악함’이란 소설에서의 인물들이 각자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파악함 이후의 태도는 상이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태도의 발원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양상은 달라도 결국 그들의 태도가 지시하는 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며 그 지시는 그들이 들은 증언과 그들이 ‘확인한’ 존재들을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의 해석의 경우, 사실 우리가 일상적인 추론 및 추리적 능력을 보이는 사례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한강의 소설에서 구현된 직접적 피해자의 눈이 아닌 간접적 피해자의 눈, 혹은 그 이외의 사람들의 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죽음”이 전제된 한강의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동감을 주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또 다른 부분에서의 살아있음은 독자와 소설, 이야기 간의 구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한강의 소설의 본질은 죽음이다. 그것은 한강의 의도나 의지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증언 문학에 대해 갖는 태도에, 그리고 소설가 역시 배제될 수 없는 태도에, 어찌 보면 우리가 일상 인간에 대해 갖는 태도에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상상력을 자극받을 수 있고 타인을 추적해갈 수 있다.
활자의 지나친 단점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정말 극단적인 측면에서는 검은 선과 공백의 조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관용을 베풀자면 그 활자가 만들어내는 의미에 대한 우리의 규범적 이해일 뿐이라는 것. 그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는 활자를 그 존재를 넘어서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증언보다도 그 “증언하는 이”이다. 증언하는 이를 우리는 ‘파악함’과 같이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소년이 온다』에서의 진술들, 한강이 수많은 사전 조사와 증언을 들으며 작성했을 그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응축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로서 표현될 수는 없는 것들. 그러나 분명히 상징과 이미지들로서 어떠한 것을 지시하는 그것들. 우리는 그것들을 소설 속에서 잡아내면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 민주화 사건에 대한 어렴풋한 무언가를 잡아낸다. 그리고 그것의 잡아낸 이면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감성 그 자체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작동한다. 물론 그 상상력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사상자수, 동원된 군인과 지급된 총알의 수 등의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 희생된, 그리고 ‘죽은’ 그 John Doe, Jane Doe들을 상상할 수 있으면 된다. 사실관계, 그것은 역사학자들이 실증적으로 할 일이며 우리가 할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상상력이 구축한 상으로 그들의 기억을 바라보는 것, 정확히는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비균질적인 것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소년이 온다』에서 우리 주목할 지점이며 우리가 갖춰야 할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