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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절정기의 상업


중세 상업의 부활이란 중세 초기의 경제적 침체를 벗어나면서 도시가 발달하고 무역이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을 말한다. 그 배경에는 먼저 농업기술의 발달로 농업생산성이 올라가 인구가 증가한 것, 두 번째로 지방의 수공업이 발달한 것, 세 번째로 원거리 무역의 대두를 들 수 있다. 상업의 부활을 견인한 세 상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탈리아와 레반트를 연결하는 남유럽 상권이고, 다른 하나는 플랑드르 지방과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상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연결하며 상파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부 내륙 상권이다. 남유럽 상권은 가장 많은 이윤이 남는 무역권이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는 아시아의 도자기, 보석, 비단, 향료 등의 사치품을 유럽에 가져다 파는 통상을 했다. 북유럽 상권은 프리슬란드인, 그 다음에는 스칸디나비아인이 지배하다가 독일 도시들의 연합체인 한자(Hansa)가 지배했다. 이들은 발트해와 북해를 누볐으며 모직물, 포도주, 금속 제품, 청어, 목재, 모피 등을 거래했다. 중부 내륙 상권은 보통 연 1, 지정된 3-6주 동안 개설됐던 상파뉴 지방의 대시(fair)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상파뉴 대시는 1300년경부터 남유럽과 북유럽을 직접 잇는 해상로가 개척되면서 쇠퇴하게 됐다.


중세에 크게 성장한 도시들은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도시,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한 도시, 수공업과 시장이 발달한 도시 등이었으며 대부분 상술한 세 상권에 포함되는 도시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편력 상인이 먼저 영주의 성곽 주위에 집단 정착하고, 이 정착지에 농촌의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흡수되어 형성됐다. 11세기 이후 도시의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인구 증가와 토지를 보유하지 못한 농민들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이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도시의 규모확대로 기존 공간이 협소해지자 성곽 밖에 새롭게 거주지를 조성하고 외성을 추가적으로 쌓았는데, 이런 성곽 지구(burg)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불렀던 것에서 연유하여 상공업자 계층을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칭하게 됐다. 중세 도시의 경제를 지배했던 것은 저런 상공업자들이 결성한 길드(guild)이다. 길드는 원래 조합원 사이의 평등을 바탕으로 상호부조와 안전보장, 교섭력 확보, 친목활동 등을 제공하던 단체였다. 그러나 차츰 길드 조합원 사이에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 획득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가격, 임금, 생산과 판매 및 작업에 대해 단속을 하는 규제 단체적 성격을 띠게 됐다. 특히 장인(master), 직인(journeyman), 도제(apprentice)의 세 계층으로 구성된 도제 제도를 통해 견습공∙직인의 훈련기간, 장인의 자격 요건, 작업 도구, 견습공의 수 등에 대한 규칙을 엄격히 시행하여 이를 어기면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한 제재를 가했다. 이러한 길드 제도는 일정 기간 상품의 질 향상과 조합원 전체 이익 증진에 이바지한 장점이 있던 반면, 세세한 통제로 생산력 발전을 저해시키고 독점 특권을 획득해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상품의 질을 저하시킬 소지를 가졌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2. 기독교와 이슬람은 어떻게 무역을 했나?


이 시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유럽 내 상업의 최대 중심지였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일 것이다. 또한 그 중에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이슬람에 적대적인 가톨릭과 그 수장인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했던 북부 이탈리아가 어떻게 무슬림과 교역을 할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일단 십자군 전쟁으로 레반트 지역에 라틴 왕국이 들어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291년 라틴 왕국의 무역 거점인 아크레가 무슬림인 맘루크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교황청은 1291년부터 1344년까지 이슬람 도시들과의 교역을 금지했다. 특히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주로 재위하던 1323년부터 1344년까지는 아주 전면적인 무역 금지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은 몽골과 직접 접촉하거나 기독교인 키프로스 왕국이나 아르메니아 왕국을 통해 밀무역을 행했다. 특히 키프로스 왕국의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레반트 서쪽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키프로스 섬은 본래 별로 중요한 무역거점이 아니었으나 아크레의 함락 이후 그 지리적 요건 때문에 무역 중심지가 됐다. 그런데 1344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이전의 입장을 뒤집고 맘루크 제국과의 교역을 허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몽골 제국의 몰락 때문이었다. 그동안 교황청은 흑해를 경유한 몽골과의 교역, 그리고 키프로스를 통한 밀무역으로 아시아의 무역품들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몽골 제국의 몰락으로 이른바 실크로드가 사라지게 되자 흑해를 통한 방법도 사라지게 되어 강경 입장을 바꾼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황청이 이슬람에 유화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화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중세 상업의 부활 시기 가톨릭적 신념과 이윤 추구 사이에 놓였던 중세 사람들이 어떻게 딜레마를 풀어나갔는지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