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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이번에 올린 글이야. 구상에는 꽤 신경썼는데 생각보다 결론을 완벽하게 맺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에 오타도 좀 보이고 암튼 다들 한 번 읽어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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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단독으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령,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에 나의 몸 하나만 떠 있다고 하자. 내 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몸이 바라보는 방향은 어디인가? 더 나아가 나의 몸이 자아를 갖고 있는 ‘나’라고 확증시킬 수 있는가? 나의 몸을 제외한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나의 몸의 위치는 물리학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존적으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인간이  ‘세계’에 의존하는 것을 "인간의 조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인간이 무엇을 하든 항상 조건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저절로 들어왔든 인간이 노력해서 들여왔든 상관없이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 것은 무엇이나 인간의 조건의 한 부분이 된다. 세계의 사실성이 인간의 실존에 가하는 충격은 제약적인 힘으로 느껴지고 인식된다. 세계의 객관성, 즉 세계의 대상적 또는 사물적 성격과 인간의 조건은 상호보완적이다. 인간의 실존은 조건적 실존이기 때문에 사물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사물이 인간실존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면 한낱 아무 상관없는 품목 덩어리, 즉 비-세계일 뿐이다.”


위의 글에서 아렌트는 인간은 세계에서 자신의 산물을 창조할 수 있고 그 산물에 동시에 자신이 얽매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특서은 세계의 객관성 그리고 상호보완성을 설명되고 있다. 물론, 해당 인용부분은 활동적 삶이라는 테마로 볼 때 세계는 인간의 산물로 갖추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실상 자연의 산물과 인간의 산물을 모두 포함한다고 무방하다. 활동적 삶의 개념에서 벗어난 동물조차도 다른 동식물들이 없다면 혹은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위치’를 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종 간 상호성을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으리라 본다. 더 나아가 인간은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냥 Human과 Person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전자는 그냥 생물학적인 인간종을 의미하며 후자는 개개인을 의미한다. 즉 , 양자 간 차이는 인간 성원간 인정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정 기준은 무엇인가? 정유정의 소설 “진이, 지니”는 이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       서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인간, 낙오된 인간.

앞서 우리가 나눴다시피 Human과 Peson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항에 따라 몇 가지 집단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 Human임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크게 두 집단으로 구획할 수 있을 것인데 Human이면서 Peson이 아닌 집단, Human이면서 Person적 특성인 집단이 그것이다. 다만, Human이 아니면서서 Person인 존재를 – 그리고 그 상상이 우리가 살펴볼 작품의 전개에 핵심을 차지하지만 - 상상해볼 수 있긴 할 것이다. 우선, Human이면서 Person이 아닌 집단의 경우 고대 시대의 로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로마시대의 주인들이 노예들을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 혹은 화폐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생각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한편으로, 우리는 Human이 아니면서 Person인 집단이 있다고 하면, 그 집단은 당연히 온전한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소통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인식 가능성을 공유해야 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개의 시각으로 보는 세계와 – 개에게는 색이 지각이 안된다 – 인간 종으로서 보는 세계는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진이, 지니"의 인물들에게 돌아가보자. 주인공 중 한명인 민주는 특별한 인생에 대한 기대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자 취직, 공무원 시험 모두에서 실패를 겪은 인물이다. 그는 30이 되도록 경제적 부양 능력뿐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자급자족하기에도 부족하다. 이런 그를 가족은 모두 내쫓고 그는 동기의 결혼식장에서 사회적 패배감과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느낀다. 이 때의 무력감은 자기 자신이 남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공 민주는 과연 Person으로서의 지위를 누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뒤 가족에 짐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가 내쫓기는 과정에서 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가족 간의 대회에서 "퇴출"되며 주체가 아닌 단순한 객체로 전락한다. 더불어 결혼식장에서 그가 다른 동기들이 성공한 걸 보게되었을 때는 어떠한가? 그는 사물이다. 그는 그곳에 주체로서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적 공간에서의 안정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 공간에서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그는 '불평등'의 대상이 된다. 단순히 타인의 성공을 바라보고 비춰주는 거울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주인공인 진이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방황하는 존재일지언정 그녀의 스승과 동료들에게 하나의 Person으로서 인정받는 존재였다.물론 사고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서 정유정 작가의 상상이 작용하는 부분인데 그녀의 정신은 사고 이후 보노보인 지니의 몸에 들어간다. 즉, 하나의 몸에 두 가지 정신이 공존하는 것이다. 진이는 지니의 정신이 무의식에 빠져있을 동안 지니의 몸을 지닌 '진이'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우리는 한 사람의 자아를 판단하는 데 그 사람의 정신적인 면을 평가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외적인 면보다 내면이 자아의 판별에 좀 더 중요하다는 일상적 직관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동료들은 지니의 몸을 가진 '진이'를 동물로서 대한다. 그녀는 타인들에게 보노보이며 Human조차 아니다. Person이 되기 위한 가장 근본조건인 "Being Human"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Person이 아니다. 그 역시 민주와는 다르지만 -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제 3자인 독자로서의 시선을 유지하고 본다면, 물론 우리가 지니의 몸을 지닌 '진이'를 Human이 아니지만 Person인 집단으로 분류할 것이다  - 낙오된 '인간'인 것은 다름이 없다.


2.       상호회복의 가능성, 상호 존재의 가능성

이 낙오된 인간인 민주와 진이는 진이, 그녀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4일간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물론, 이 여정은 민주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컸다. 그는 사회공익근무요원으로 자신이 책임지는 구역의 '해병대 할아버지' 죽음 이후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주저하여 누군가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 그 죄책감이다. 그는 그 죄책감으로 진이의 스승을 구하고 그녀와 만나고 소통하게 되는 계기인 사원증을 얻게 된다. 사원증을 통해 이진이는 민주를 신뢰했음이 분명하다. 늦저녁 119를 부르고 사고현장에 직접 찾아간 인간에게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야할까? 그녀는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을지언정 그는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여정을 통해 이 둘은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 민주는 이진이를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되며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짜증나는 보노보였을지라도 생각을 가지고 있고 두려움과 공포, 애틋함 등의 감정을 느끼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기 시작한다. 진이 역시 민주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기 시작한다. 물론, 진이가 '다정한 그녀'로서 민주를 만났을 때, 민주는 사육원을 떠도는 하나의 귀찮은 노숙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노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생각해보면 민주가 이진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이는 점차 민주라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내면에는 낙오되었을지라도 하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노애락 그리고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 있었다. 이 둘은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마주함을 통해 서로 낙오된 인간일 지라도 서로는 하나의 Person으로서 인정된다. 물론,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볼지라도 말이다. 그 둘은 서로가 존재함을 통해, 그리고 서로가 인정함을 통해 서로에게 하나의 존재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둘 간 상호존재 가능성이 모두에게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진이가 병원에서 겪은 소동과 늙은 경찰관과 소방대장을 만날 때도 동일하다. 민주는 아직도 그냥 하나의 노숙자일 뿐이며, 진이는 소란치고 탈출한 보노보일 뿐이다. 그 둘 중 누구도 Person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지니의 몸을 공유하는 자아, 진이의 자아와 지니의 자아를 통해 또 다른 상호존재의 가능성을 본다. 지니는 진이에게 자신이 가진 기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지니가 구출되기 전까지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지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회상한다. 자신의 동생이 태어난 것, 자신이 무리와 떨어지고 밀렵꾼들에게 잡힐 때, 그리고 가혹한 사육사에게 잡혀서 고문당하며 훈련받을 때. 이 장면들을 회상하며 지니 역시 진이에게 하나의 존재임을 피력한다. 지니는 보노보다.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지니 역시 하나의 존재임을 피력한다. 그가 Human이 아니라고 핍박받을 필요는 없다. 그 역시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 존재다. 지니는 이것을 진이에게 피력한다. 그녀가 지니를 킨사샤에서 만났던 순간을 회상시키면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순간을 떠올리게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진이로 하여금 다시금 한 번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3. 상호존재를 통한 회복, 그리고 Being Person

우리는 상호존재의 가능성만으로 Person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호존재의 가능성이 만드는 각성은 우리에게 하나의 Person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이 때의 각성은 우리가 살고자하는 의지다. 이 의지는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만약 하나의 관계에서 우리가 인정받을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우리에게 각성을 주지 못하며 결코 상호존재의 가능성조차 존재한다고 하기 어렵다. 이미 상호존재의 가능성은 '인정받음'을 근거로 하고 그를 통해서 다른 관계에서 우리는 '인정받을 수 있음'을 기대하는 의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정받음이 없다면 애시당초 상호존재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며 그 관계는 양자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이 때 양자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거울밖에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서로를 물화한다는 것이며 객체로서만 인정되는 것이다. 즉, 나는 그 관계에서 절대 주체가 되지 못하며 상대방도 동일하다.
진이와 민주의 관계는 이러한 상호존재의 가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진이는 민주와의 여정을 통해 자신이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치열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녀는 여정의 끝으로 갈수록 삶의 유한성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삶이란 맘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렇기에 삶은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대상이자 동시에 그 숙명을 때때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진이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보노보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삶에 대한 열망 그 자체보다는 끝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귀이다. 진이는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Person인 진이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 끝은, 그리고  그들의 여정은 민주로 하여금 다시금 인생을 살도록 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자 했던, 그리고 한편으로 진이와의 치열했던 4일을 통해 그는 삶의 열망, 그리고 그 중요함을 깨댇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호존재가능성을 통한 각성이다. 그는 장의사로서 활동하며 삶과 죽음의 문지기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한다. 그의 직업이 장의사라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죽음 이후 우리는 자연적으로는 물화된다. 태워서 사라지거나 땅에 묻히는 등의 작업을 통해 대부분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장의사는 이 물화된 인간을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중받게 한다. 그는 죽은 후의 오물과 사후경직 되기 전의 사지를 풀고 수의를 입힌다. 완전히 물화되기 전 고인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한 번 더 Person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 역시 상호존재의 가능성이다. 물론 한쪽은 주체이고 다른 한쪽은 완전한 객체이지만 말이다. 이 관계는 진이를 통해 각성한 민주가 죽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선물을 받은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선물을 주는 것.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각성을 선물하는 것 이것이 상호존재를 통한 사회의 회복일 것이다.
정유정의 소설 "진이, 지니"는 생태주의적 소설로서도, 인간의 삶의 유한성과 치열함을 일깨워주는 소설로서도 읽혀질 수 있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나름의 뛰어난 작품이며 별개로 짧으면서 직관적인 묘사를 하는 문장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형식적인 측면보다도 그리고 생태주의적이고 단순한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작품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라 해석한다. 인간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여러 구성원들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 다시 말해 하나의 Person으로서 받아들여지 못한다면 그는 온전히 그 집단 안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상호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한 주체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와 진이의 관계는 우리에게 상호 존재의 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통한 각성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의지를 갖고 하나의 Person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별도로 우리는 Person의 특성을 - 생태주의적 관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 다른 생물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특히 그 동물이 쾌고감수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피터싱어가 쾌고감수능력을 지닌 동물은 윤리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다시금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동물을 통해 - 그리고 그 존재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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