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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천의 초기작과 후기작의 중요한 차이점은 배후인물의 등장여부이다. <V.>나 <49호 품목의 경매> 같은 경우는 음모론의 주체가 모호하다. 말 그대로 파악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핀천의 히피스러운 인물들은 움직이고 행동했다.
90년대 이후의 작품부터 핀천은 달라진다. 여전히 음모론은 작품의 중심이 되지만 그 배후에 있는 인물들은 비록 이름만이라도 명확하게 등장한다. <바인랜드>에서 조이드의 아내를 뒤쫓는 검사나 이번 작품 <블리딩 엣지>의 닷컴 기업 총수 아이스처럼, 주인공은 무언가를 추적하거나, 쫓기게 되지만 그 대상은 명확하다.
이런 작품의 전환은 80년대 이후의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우파가 득세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6,70년대까지 득세했던 히피 세대는 레이거노믹스 체제 하에서 위축되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핀천은 계속해서 글을 쓰고 좀 더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 방식으로 전환하여 살아남았다.
<블리딩 엣지>를 구성하는 세계는 두 가지이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2001년의 뉴욕, 그리고 뉴욕이라는 도시를 웹으로 똑같이 재현해낸 '딥아쳐'라는 프로그램 속 사이버펑크스러운 뉴욕.
주인공이자 사기조사관인 맥신은 닷컴 버블로 급성장한 닷컴기업 '해시슬링어즈'에서 중동으로 비밀리에 돈을 송금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에 착수한다. 그 뒤로는 일반적인 핀천 소설이다. 문화 아카이브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박적인 대중문화 인용, 비현실적인 야스들.
추리소설은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진상이 하나씩 밝혀지거나 추리를 통해 진상으로 바로 도약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블리딩 엣지>는 그런 소설이 아니다. 맥신이 해시슬링어즈와 아이스에 관해서 조사함에 따라서 정보들는 점점 더 쌓여가지만 딱히 어떠한 확증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세계무역센터 근처 빌딩 옥상에서 스팅어 미사일를 발사하려고 하는 아랍인들과 저격수 한 명이 찍힌 영상을 발견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떠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9.11 테러가 발생한다.
일반적인 작가들이 9.11 테러를 다룬 소설을 쓴다면 아마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하는 장면이나 테러 자체를 묘사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할 것이다. 하지만 핀천은 그런 작가가 아니다. 소설에서 9.11 자체는 4,5줄 정도로, 그것도 라디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핀천이 주목하는 것은 9.11 이후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인터넷에는 테러의 주체에 대한 온갖 음모론이 떠돌고, 경찰들은 자신들이 테러와 싸우고 있다는 허세를 부리며 시민들을 억압한다.
이 작품에도 히피나 좌파였던 인물은 등장하지만 핀천 자신을 나타내는 것처럼 늙고 힘이 없다. 맥신의 아버지는 9.11이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자식 앞에서 쏟아내지만 자식은 전혀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이제 핀천은 90년대 작품 <바인랜드>에서보다 더 자기 세대들이 한물갔으며, 히피와 음모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헛소리가 된지 오래라고 말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핀천은 큰 한 방을 위해서 급드리프트를 튼다. 사실 딥아처는 단순한 가상공간이 아니였고, 현실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작중에서 살해되었던 레스터와 윈더스트는 딥아쳐 속에서 되살아나고 멕시코의 지하세계 신화랑 딥아쳐를 연결시키면서 은근슬쩍 도플갱어 모티브를 암시한다.
여전히 해시슬링어즈와 9.11의 관계는 수수께끼로 남고, 해시슬링어즈 서버에 E.M.P를 터트리려고 하던 러시아 마피아들은 구속된다. 하지만 음모론과 함께하는 삶은 계속된다.
음모론, Still Alive
핀천책 읽어보고 싶은 글이다 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