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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 이번엔 코로나 시국과 관련된 비평을 써봤음.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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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윤리(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한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이웃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확진자 한 사람이 나오면 그와 마주친 수십 사람이 조사받아야만 한다. 배달원, 의사, 간호사 등 모두가 이웃에게 큰 빚을 진 채다. 다만, 우리가 새삼 깨달은 사실은, 이와 같은 이웃과의 관계가 늘상 호혜적인 관계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2021년을 코앞에 두고, 우린 우리 곁에 바이러스처럼 규정하기 어렵고 통제하기 힘든 존재자가 산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실은 폭력과 희생을 수반하는 위태로운 공번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대청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는, 하지만 피해자-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관계를 다종적 얽힘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다종적 얽힘의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을 인정해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타인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성인(聖人)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기호의 단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다종적 얽힘관계를 깊게 천착하는 소설이다. 권순찬이란 인물은 아파트의 외부인이다. 7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아파트의 사람들과 어떤 얽힘도 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7월 그가 아파트에 찾아와 칠백만원을 요구하며 상황은 급변한다. 그는 아파트 사람들에게 502호 할머니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칠백만원을 뜯긴 피해자로 변모한다. 그의 이야기는 유기적인 사회망을 통해 아파트 곳곳에 퍼지고, 더 많은 사람이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성금을 모으고,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96) 7월부터 11, 고작 4개월만에 권순찬이 아파트의 일원으로 포섭되고 만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종적), 또 서로간의 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혔다는 점에서(얽힘), ‘다종적 얽힘이라는 표현이 꽤 어울린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권순찬 자신은 얽힘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부터 말이 없었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없었으며, 아파트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85) 이러한 모습은 권순찬이 성금을 거절할 때도 드러난다.

저는 원래 그 할머니한테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김석만씨를 만나러 온 거예 .” (102)

돈을 받으러 온 거예요만나러 온 거예요사이에 놓인 간격은 무엇인가. “, 할머니를 포함한 아파트 주민들의 성의이다. 반면, “만남이 향하는 대상은 아파트 바깥의 사람인 김석만이다. 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아파트 주민들의 네트워크에 얽힐 수밖에 없다. 그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한사코 얽히려들지 않는다. “아닌데요...... 어머니가 왜 나 때문에 죽어....... ...돈이 육백만원밖에 없어서......”라는 문장의 이면에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와의 관계(얽힘)을 부정하려는, 나아가 어떤 얽힘도 가지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읽힌다.


    바로 이 지점, “권순찬이 그토록 얽히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인간관계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설에서 권순찬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 시선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권순찬이 얽히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를 우리가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린 권순찬의 이야기를 전하는 서술자 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 소설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화가 난 채다. 그는 소설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소설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112) 그것은 역시 권순찬과 같은 종류의 인간 얽히고 싶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얽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 딱 한 번 화를 낸 것은 교무부처장이 내 오른팔을 쓱 잡아당겼을 때였다. (76) ‘는 한사코 권순찬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89) 결국, ‘분노는 권순찬의 분노와 상통한다. 따라서 앞서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환원된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권순찬에게 관계(얽힘)은 곧 애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 - 폭력이다. 권순찬과 아파트 주민간의 관계에는 상호-폭력이 자리한다. ‘가 권순찬의 멱살을 잡으면서 애꿎은 사람들 좀 괴롭히지 마라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에 이 질문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112) 아파트 바깥의 사람이라고 믿었던 김석만이 아파트로 들어오면서, ‘역시 그토록 기피해왔던 애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 텍스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인간관계는 그 속에 폭력을 내포한다는 의미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의미심장하다. 어째서 권순찬과 아파트 주민들이 아닌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어야만 했을까? 같은 단편집에 실린 단편 한정희와 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293) 무조건적인 환대를 믿는 착한 사람들과 권순찬을 병치함으로써, 반대로 그런 환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던게 아닐까?


    우리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을 살펴봄으로써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밝혀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다종적 얽힘의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는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12) 다종적 얽힘을 말한 하대청 역시 단일하고 보편적인 방식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세심하게 관찰하고 돌보는데서 시작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애꿎은 상대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성(自省)하는 길로 갈 때이다.




참고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 "벌레 이야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7809


김승옥 "역사"

-1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69

-2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971


한병철 "피로 사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6575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943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0795


최인훈 "라울전"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34498


정이현, "삼풍백화점"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199836&_rk=JRL&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