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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이행논쟁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란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는 데 어떤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이 논쟁은 돕(Maurice Herbert Dobb)『자본주의 발전연구』에서 시작된다. 그 책에서 돕은 좀바르트나 베버처럼 정신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찾는 것과 자본주의를 원격지 시장을 위한 생산조직과 동일시하는 것 모두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특수한 생산양식 즉,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교환되며 여기서 나타나는 생산에 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자본주의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돕은 그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출현이 봉건제 자체의 모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봉건제를 농노제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여기서 봉건제란 영주의 특정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자에게 생산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의무가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사회적 체제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 체제의 쇠퇴는 지배계급의 증대하는 수입욕구에 비해 생산체계로서 봉건제가 비효율적이었다는 모순에서 기인했다. 봉건적 지배계급은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예속계급이 자급자족에 쓰는 잉여노동시간을 줄여 자신의 영지에서 더 일을 시켜 잉여생산물을 증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낮은 노동생산성으로 그럴 여지는 거의 없었고 생산자인 예속계급은 더 혹사당해 봉건제를 지탱하던 노동력은 고갈되고 결국 그 체제는 사실상 소멸하게 됐다.


스위지(Paul Malor Sweezy)는 돕의 주장에 대해 비판을 하며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스위지는 봉건제가 정체된 체제임을 지적하며 외부적 요인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데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외부적 요인이란 도시의 성장과 교역의 활성화이다. 돕은 도시와 시장이 봉건제 내부에 속한다고 여겼지만 스위지는 돕의 분석이 소홀하다고 주장하며, 도시는 도망친 농노의 신분을 바꿔주었고 시장의 성장은 영주의 판매를 위한 생산이 늘어나게 하여 이에 따라 화폐지대로의 전환과 농노의 자유 확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스위지에 대한 반비판으로서 돕은 봉건제 시기 발생했던 영주에 저항하는 농민의 계급투쟁이 봉건제를 직접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아니나, 봉건적 착취로부터 소생산자를 떨구어 내는 역할을 했으며 이것이 자본주의를 태어나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돕은 화폐지대로의 전환, 농노의 이탈, 고용노동의 증가, 상업의 발전이 낡은 생산양식을 분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사실이나, 상업 후진 지역인 영국 북부와 서부에서 직접적 부역노동 형태의 농노제가 가장 먼저 사라졌으며 상업 선진 지역인 영국 남동부에는 그것이 끈질기게 남았다는 『자본주의 발전연구』에서 언급한 사례를 다시 들며 도시와 시장의 발전이 꼭 봉건제 붕괴를 발생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돕의 이러한 반비판에 대해 스위지는 먼저 봉건제는 내적인 원동력을 가진다는 돕의 입장을 뒷받침할 새로운 논거가 없었다는 것을 비판한다. 둘째로 돕이 봉건제 쇠퇴의 한 요소로서 상업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스위지는 발달된 상품생산의 기반에서만 화폐지대로의 변화가 상당한 규모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이행논쟁은 1970년대 브레너 논쟁으로 확대된다. 브레너(Robert Brenner)는 봉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농민들의 조직화 수준과 영주들의 대응력이라는 계급투쟁과 갈등에 그 동인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돕과 유사하다. 그는 봉건제의 해체가 봉건 소농의 성장과 봉건적 잉여수탈관계 사이의 모순으로 인해 생산성의 위기와 더불어 농민의 존립 자체가 위협당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브레너는 인구론자들과 시장론자들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먼저 인구론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봉건제가 인구증가→물가상승→임금하락이 발생하는 A국면과 인구감소→물가하락→임금상승이 발생하는 B국면의 반복과 교차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레너는 이에 대해 인구증가로 토지수요 또한 증가함에 따라 농민에 대한 영주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여기에는 계급투쟁의 변수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앞에서 말한 현상은 영주가 농민들에게 고정지대 이상의 과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성공적으로 확보했을 겨우에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편 시장론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봉건제 해체가 시장 및 교역의 확대에서 발생했으며, 시장의 성장은 노동지대에서 화폐지대로의 전환을 가져오고 이에 따라 부역노동이 감소하고 자유농민이 증가한다고 말했다. 브레너는 이에 대해 런던과 파리 근교, 동유럽에서 봉건 반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농업자본주의의 성장과 전개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업자본주의의 전개는 해당 지역의 계급투쟁과 갈등의 역학관계에 의해 규정되는데, 동유럽의 경우 서유럽에 비해 농민들의 조직화 정도와 투쟁 역량이 빈약했고 상대적으로 영주의 경제외적 지배와 대응 역량은 강고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행에 있어 후진적인 양상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영국은 농민반란이 대부분 진압되었다. 농민층 내에서 대차지농이 등장해 대량의 자본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생산기구나 제반 생산수단을 급격히 발전시키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농민층은 양극 분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농민층의 조직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농민층은 양극 분해되기 보다는 소농경영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농업에 자본이 투입될 여지가 적어졌다. 브레너는 프랑스에서 국가의 역할에 주목했다. 프랑스에서 국가는 소농층으로부터 조세를 획득하기 위해 봉건 영주에 강한 억제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농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브레너의 설명이다.


브레너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있어 새로운 주장을 한다. 세계체제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사회체제 안에서만 어떤 사회 변화를 거론할 수 있는데 이러한 도식 안에서 유일한 사회체제는 세계체제이다. 그리고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는 그 기원에 있어 중심, 주변, 반주변부로 나누어진 경제적 분업구조로부터 발생하였으며, 하나의 통합된 경제체제 속에서 성장하고 전개되어 나왔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상업화론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매커니즘은 국지적인 연구를 넘어 세계체제에서 이해할 때에만 인식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참신하다고 할 수 있다.


2. 자본주의 이행기에서 절대주의의 역할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에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절대주의의 본질을 공납의 광범한 형태 변화를 통해서 농민대중이 획득한 이익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또 이를 거슬러 농민대중을 그들의 전통적인 사회적 지위에 묶어 두려고 계획된 재편성되고 재충전된 봉건적 지배기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절대주의 국가는 결코 귀족계급과 부르주아지 간의 중재자가 아니고, 귀족에 대항하여 태동하는 부르주아지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위협받고 있는 귀족의 새로운 정치적 갑주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절대주의 왕정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서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앤더슨은 이 시기 절대주의 왕정이 나타난 원인으로 장미전쟁, 백년전쟁, 2차 카스티야 내란 등의 극단적인 봉건적 무질서가 끝나고 왕의 정치적 권위가 갑작스레 회복되었다는 점, 농민소요의 위협과 매뉴팩처 단계로 발전해가는 도시 부르주아지의 흥기로 인한 압력에 있다고 보았다.


사실 절대주의라는 말은 잘못된 명칭이라고 앤더슨은 지적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유럽의 왕정도 무제한적 전제주의라는 의미로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군주정들은 그 권력이 최고에 달했을 때조차도 신의혹은 자연의법으로 지칭된 관념들의 복합체에 의해서 제한을 받았으며, 절대주의 사상의 기초를 닦은 보댕도 통치권자가 신민에게 행사하는 기본적인 과세권과 경제적 권리들을 제한하는 봉건적 원칙들을 지지하였고 신분의회의 가치 또한 옹호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절대주의의 시작인 루이 11세 시기는 결코 중앙집권화되거나 통합된 국가가 아니었다. 프랑스는 12개의 총독관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왕족이나 지도적인 귀족들의 독립적인 행정이 가능했다. 더구나 각 지방에서 최고 사법적 권위를 가졌으며 군주에 의해 창설된 지방 고등법원들은 그 수와 중요성이 계속 증대됐다. 월러스틴은 하르퉁과 무니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절대적이란 무제한적이 아니라 감독받지 않는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사적인 어감을 제거하면 절대주의란 국가통제주의로 부르는 편이 낫다고 월러스틴은 주장한다. 국가통제주의란 국가기구의 수중에 더 많은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이며 16세기에 이것은 절대군주의 수중에 권력이 들어가도록 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제 이 글의 본론인 자본주의 이행기에서 절대주의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절대주의 왕정의 정책 중 하나인 관직매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절대주의 왕정은 관료기구의 직책을 팔아 왕실의 수입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관직을 구매한 자는 허가된 특권과 수수료 제도 등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여기에 부르주아지가 참여하면서 그들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상승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귀족이 사회적 위계에 정상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체제속으로 예속적인 동화를 해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토지에 투자하면서 그 체제에 스스로 동화하려고도 시도했다. 한편 귀족이 부르주아지와 동화되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경우 섬나라 특성 상 외적의 침입이 거의 없다는 점과 대규모 상비군으로 국왕에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귀족들이 상업에 뛰어드는 일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16세기에 이르면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동엘비아, 스웨덴 등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절대주의 시기 지배적인 경제정책은 중상주의였다. 중상주의는 국내교역의 지방주의적 장벽들을 폐지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에는 고정된 양의 상업과 부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금괴나 주화의 유출을 금지한 반면 상품의 수출은 장려한 정책이다. 프랑스의 왕립 매뉴팩처와 길드, 영국의 특허회사들이 이 시기 대표적인 중상주의의 산물이었다.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전쟁과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몽크레티앙이나 보댕 등의 중상주의 이론은 전쟁의 필요성과 수익성을 강조하는 호전적인 것이었다. 또한 콜베르는 루이 14세에게 왕립 매뉴팩처는 왕의 경제 연대이며 동업조합은 그의 예비군이라고 말했다. 중상주의의 이러한 견지는 국제정치의 제로섬 모델에서 나와 경제적 보호주의를 고취시킨 국제무역의 제로섬 모델로 나아갔다고 앤더슨은 말했다.


절대주의가 부르주아지의 본원적 축적에 일정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첫째로 귀족계급의 재산과 특권의 보호를 위한 절대주의의 법체계는 부르주아지의 기본적 이익을 보장해주었다. 둘째로 국가에 대한 대부가 활발해지면서 이를 통해 큰 돈을 버는 부르주아지들이 등장했다. 셋째로 절대주의는 식민지 사업과 무역회사들을 후원해 부르주아지들이 해외에서 활동하기 용이하게 해주었다. 넷째로 절대군주들 간의 경쟁자들에 대한 상공업적, 무역적, 군사적 투쟁은 부르주아지들에게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절대주의의 봉건적 성격은 끊임없이 자본에 대한 약속을 깨뜨려버리고 무산시키는 것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푸거 가는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파산으로 망했고,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개신교 부르주아지들을 내쫓았으며, 런던 상인들은 런던 시의원 코카인의 법안으로 재산을 강탈되는 등 절대주의가 부르주아지와 끝내는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이에 대해 절대주의 국가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봉건귀족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며 절대주의 국가의 종말은 그 계급이 가진 권력의 위기 즉, 부르주아 혁명의 도래와 자본주의 국가의 출현을 알려주게 된다고 말했다.


3. 결론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16세기는 자본주의 이행기에 속하기도 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개로 갈린다. 하나는 봉건제 내부의 모순에서 기인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와 시장 등 외부의 충격에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두 주장을 절대주의를 고려하여 살펴보면 둘 다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 봉건제 내부의 모순에서 기인했다는 주장은 토지의 노동생산성을 주요 원인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비판받을 만하다. 절대주의 왕정은 중상주의를 기치로 상공업을 장려하였지만 부르주아지들을 탄압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나타났을 생산성의 확대와 쇠퇴도 고려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부의 충격에서 기인했다는 주장은 절대주의가 영국에서는 영국내전까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까지 견고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에 다 읽지는 못했지만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저 두 이론의 단점을 극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회가 되면 꼭 『근대세계체제』를 전부 다 읽어보고 싶다고 느꼈다.


참고문헌


모리스 돕 외, 『자본주의 이행논쟁』, 김대환 편역, 동녘, 1984.

유재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분석과 자본주의, 『코기토』 제81,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7.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 자본주의적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 나종일 외 옮김, 까치글방, 2013.

최우영, 「자본주의 이행 일반론의 이론적 비교: 계급투쟁론, 시장론, 신제도론 그리고 맑스」, 『사회사상과 문화』 22권 제1, 동양사회사상학회, 2019.

페리 앤더슨,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김현일 외 옮김, 까치글방,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