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녹색평론사, 2012.
우리 세대에게 있어서 ‘유교 탈레반’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탈레반이 어떤 집단인가. 극단적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 조직 아닌가. ‘유교 탈레반’이라는 단어는 탈레반과 같이 유교를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행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유교의 근본은 무엇인가. 흔히들 떠올리는 것이 삼강오륜, 충효 등의 수직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것들일 테다. 특히 여성차별을 필두로 해서 2020년인 이 시대에서 유교의 논리는 고리타분한 걸 넘어서서 다분히 범죄적이라고 평해도 무방할 정도다.
또한 우리는 유교하면 단연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을 떠올리고 이는 조선 말기의 망조의 원인을 유교로부터 찾는 데까지 자연히 생각이 거슬러 올라가진다. 즉 유교의 여러 병폐가 결국 조선의 망국을 이끌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아직도 그러한 병폐가 잔존해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인식 역시 만연하다.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겠는가. 이 정도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유교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그러한 생각을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담겨있는 원문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그와 같은 병폐는 원래 유교가 지향하는 바와 동떨어져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총 3부, 15장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본 결과 상세한 부분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어도 전체적인 큰 틀에 있어서 저자의 그러한 주장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기야 예수와 부처, 알라의 말씀을 빙자해 이 세상에 해를 끼치고 신자들을 속이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런 되먹지 못한 종교인들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들이 얘기하는 가르침 자체가 글러먹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 이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책은 세 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 ‘유교, 오해 풀기’, 2부 ‘유교, 이해하기’, 3부 ‘유교에서 길찾기’가 그것이다. 먼저 1부에서는 다섯 장에 걸쳐 우리가 여태껏 오해한 유교의 논리와 개념들을 다룬다. 사실 나는 이 1부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는데 지금껏 내가 교양과 상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죄다 허구였음을 저자가 낱낱이 파헤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부만큼은 이 다섯 장을 모두 상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여태 이렇게 유교에 대해 말 그대로 ‘일자무식’했었구나 식겁했다.
1장 ‘위민(爲民)은 없다’는 우리가 흔히 수험서 따위에서 배워 온 ‘맹자=위민사상’이라는 도식을 산산이 깨부순다. 백성을 위한다는 것은 군주를 국가의 주인으로서 전제하는 시혜적이고 위계적인 시선이고 이는 결국 백성을 수단화하는 결과로 행해진다. 저자는 맹자, 그리고 유교에서 얘기하는 것은 위민이 아닌 바로 여민(與民)이라고 주장한다. 여민은 백성과 함께 더불어 한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위민의 위계와 시혜가 끼어 들 틈이 없다.
2장 ‘민본주의는 번역어다’는 이러한 해석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민본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Democracy라는 단어의 번역어로 쓰였다. 지금은 민본보다는 민주라는 번역어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일본이 외국어 번역의 선구자였고 천황이 있는 일본에서 민주라는 말은 불경한 것이었기에 민주를 대신해 민본이 쓰인 것이다. 반면 중국은 민주라는 단어를 택했다. 이는 당시 중국의 황제가 이민족인 만주족이었고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항심이 민본보다 민주를 택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맹자의 사상이 민본주의로 칭해지게 된 것일까. 이는 일본의 학자들이 민본의 원형은 서경의 민유방본(民維邦本)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기 조선에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민주주의와 민본주의가 소개되면서 전자는 서양의 정치로, 후자는 동양의 정치로 보는 분류법이 파생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즉 ‘맹자=위민사상’이라는 도식과 마찬가지로 ‘맹자=민본주의’라는 도식 역시 그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긴 어느 정치사상이 백성에게서 그 근본을 찾지 않겠는가. 중국의 현대 사상가 머우쫑산의 말처럼 중국의 정치사상은 법가를 제외하고, 아니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법가까지 포함해도 모두가 다 민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맹자만의 특색은 아니다.
3장 ‘충효(忠孝)는 없다’도 마찬가지로 유교하면 떠오르는 충효가 기실 공맹과 그닥 관계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상대방 처지를 접어서 생각함'을 뜻하는 서(恕)와 짝을 지어 '충서'라는 표현을 이루거나, 신뢰(信)와 짝을 지어 '충신'으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 용례이지 충효는 거의 그 사용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충효는 유교가 아닌 한비자에서 비롯한 법가의 원리가 한나라 초기 동중서에 의해 제국의 통치 원리로 쓰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자는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공자의 유교에 대해 오로지 충효의 봉건 도덕을 가르쳤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고전을 읽는 쪽의 편향이다. 공자의 논어에서 말하는 충(忠)은 반드시 그 대상을 군주로 한정하지 않는다. 효(孝)를 중요한 도덕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효행일 뿐 몸과 생명을 희생하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공자의 논어를 봉건적인 상하관계에서 작용하는 ’멸사봉공‘이라는 뜻의 충·효를 가르친 책이라고 읽는 것은, 오히려 도쿠가와 시대 봉건제도 아래에서 살았던 일본사람들이 자기의 봉건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와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충효가 유교와 상관없고 그것은 일본식 사무라이 전통에서 기인했음을 증명해낸다.
4장 ‘삼강과 오륜은 다르다’는 제목 그대로의 내용이다. 흔히 유교하면 떠오르는 삼강오륜에서 삼강과 오륜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다. 삼강이 옳으면 오륜은 그르고 삼강이 그르면 오륜은 옳은 것이다. 시대적으로 삼강보다 오륜이 더 먼저 발생한, 즉 좀더 공맹의 원 사상과 가까운 개념이다. 이는 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삼강의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은 군주, 아버지, 남편이 곧 신하, 아들, 부인의 근본이자 주인이라는 지배종속적이고 수직적 권력관계다. 반면 오륜의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삼강과 달리 쌍방의 상호적 관계를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親이 있어야 하고 군주와 신하 사이에는 義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둘 중 한 쪽이라도 그러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면 관계가 파탄에 이를 것을 의미한다. 즉 삼강과 달리 어느 한쪽만이 관계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5장 ‘가족을 다시 보자’에서는 열녀문, 효자가, 정려문 따위로 상징되는 조선 후기의 가족주의가 기실 유교의 가족주의와는 유리된 것임을 주장한다. 논어에서는 “군자는 그 자식을 멀리함을 배웠노라”라는 발언이 나오는데 이는 곧 자기 자식이라고 하여 사사로이 아끼지 않고 제 가족조차 공적으로 대하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유교하면 떠오르는 가족주의, 연고주의는 적어도 공자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도 공공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오해와 정반대되는 해석조차 가능하다.
이렇듯 1부에서 저자는 유교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푸는데 장을 할애하는데 그 내용이 다 이치에 맞고 문헌에 기반한 것이니 그 누가 오해를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1부를 통해 기존에 지니고 있었던 유교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인식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또한 왜 지금까지 학교 도덕, 윤리 시간에는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지 않아서 유교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키는가에 대한 일종의 분노(?)도 들었다.
1부에 이어서 2부 ‘유교, 이해하기’에서 유교 이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저자가 내세우는 것은 다름 아닌 여민이다. 앞서 얘기했듯 여민의 세계는 함께, 더불어의 세계다. 단일한 지배-복종의 권력 관계가 관철되는 세계가 아니고 말 그대로 횡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며 또 서로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자율적으로 관계를 맺는 예(禮)의 세계다. 이처럼 이상적으로 보이는 여민의 세계를 현실에 이룩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제도적 구상이 부재한 이상은 그저 망상에 그칠 뿐이다.
맹자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민체제의 제도들을 탄생시킨다. 먼저 여민체제의 뼈대는 정전제다. 사전과 공전이 혼합된 이 우물 모양의 토지 제도를 통해 백성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고 공전을 가꿔 조세로 내면서 서로 사귀고 서로 도우며 서로 의지함으로써 서서히 그리고 “자연히 친목”하게 된다. 여민의 이념인 함께, 더불어가 일상에서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이다. 다음은 조법, 즉 세금을 내는 제도다. 맹자에게 있어서 “세법으로는 ‘조’법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공’법보다 나쁜 것이 없다”는 경제학자 용자의 말을 일리가 있다. 조법에서는 백성이 흉년이면 국가도 흉년이고 백성이 풍년이면 국가도 풍년이다. 공법에서는 국가의 재정이 백성의 삶과 무관하게 책정된다. 자연히 조법이야말로 함께, 더불어의 세계인 여민의 세계에 실로 맞는 세제가 아닌가.
토지와 세금 문제라는 거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백성 개개인의 문제로 가보자. 맹자는, 더 나아가 유교는 인간이 홀로 동떨어진 고독을 최악의 타락 형태로 보았다. 그렇기에 국가는 다른 누구보다도 홀아비와 과부, 독거노인과 고아들인 환과독고(鰥寡獨孤)를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무연고자들을 여(與)의 세계에 진입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것이었고 이는 곧 환과독고와 같은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정망의 확충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와 같은 여의 세계를 깨닫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배워야 깨닫고 깨달아야 행할 수 있는 법. 그렇기에 맹자는 학교 제도를 주장한다. 여민체제를 제도화하는 핵심적 관건이 바로 여민을 가르치는 교육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민체제의 제도화는 순수제도라는 감찰제도와 시사(詩史)라는 ‘여민의 미디어’를 통해 마무리된다. 순수제도의 여민적 특징은 군주와 백성 간의 소통성과, 경제적 불균등을 고르게 분배하는 데 있다. 군주가 직접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어떻게 더 나아지게 할지 함께, 더불어 고민하는 것이 바로 순수제도다. 이 어찌 여민체제적이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군주가 전국을 다 돌아다니며 순수제도를 시행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시사를 통해 군주는 그 안에 담긴 백성의 생활, 욕구와 바람을 캐치해내야 한다. 맹자는 왕궁에 민간의 시를 수집해 군주에게 보고하는 적(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즉 춘추전국시대의 ‘미디어’라 봐도 무방하다. 순수제도와 시사 역시 여민체제를 제도화하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의 제도화를 이야기함으로써 여민의 세계가 이상에 그치지 않고 이 땅에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한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여민체제에서의 삶은 상대방을 나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동등하게, 독립된 삶의 주인공으로서 상대방을 영접하는 것이다. 맹자에 앞서 공자가 제시했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되 하나로 만들지 말라'는 원리 역시 맹자의 여민체제 하에서 관철된다. 상대방을 소외시키거나 사물화하지 않는 곳, 위민이라는 ‘위하여’의 세계를 배척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의 원리’, 이것이 맹자가 꿈꾼 여민체제의 운영원리였다.
맹자의 사상이 진실로 이럴지 언데 어찌 저자가 맹자의 사상을 ‘위민’으로 개념화하는데 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사상은 곧바로 ‘군주를 위하여’ 그리고 ‘민족, 국가를 위하여’식으로 둔갑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의 생명과 삶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로 전환하기 쉽상인 것이다. 이는 맹자가 바란 세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민에 대한 오해를 떨쳐내고 여민에 대한 이해를 장착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2부에서는 맹자가 역설한 여민체제를 중심으로 유교에 대한 저자 나름의 이해를 조리있게 풀어 설명한다. 여기서는 핵심인 여민체제만을 정리해 설명했지만 그 외에도 유교의 정치적 이상향인 요순에 대하여, 또 유교에서 얘기하는 정의(正義)애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유교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유교에서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도는 큰 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부인 3부 ‘유교에서 길찾기’는 이 책의 제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즉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2500년 전의 유교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자본의 악랄함와 무한경쟁사회에서의 피로함 사이에서 유교는 어떤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유교라면,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좋을 터.”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오늘날이 교육이 무너지고(11장), 인과 덕을 상실하였으며(12, 13장), 시장과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14, 15장)고 진단한다. 이와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유교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있다. 본디 앞서 보았듯이 유교의 본질은 나와 너 사이의 인간관계의 빛을 발하는 데에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유교가 현실의 문제들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저자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에 따르다보면 공맹의 말씀만 따르면 이 세상이 행복해질 것만 같아진다.
이상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추려보았다. 책을 통해 나 역시도 전술했듯이 유교에 대한 오해만이 가득했던 무지에서 겨우 약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책의 말처럼 공맹의 유교가 21세기의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본질은 춘추전국시대 이후로도 변한 적이 없지만 농경시대였던 공맹의 시대보다 너무나도 복잡해진 21세기에 그러한 본질을 맹자와 같이 구체적으로 제도화해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결국 21세기의 유교는 개인의 윤리원칙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여민의 세상은 한낱 공상적 이상으로만 남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마 이 책의 저자도 그러한 물음에 쉽사리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확한 방법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주저 않고 먼저부터 포기해버렸다면 이 세상의 진보가 어찌 있었겠는가.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성인의 대열에 오르는 공맹의 언행을 모두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몰라도 사소한 부분들부터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면 언젠가는 자연히 그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유교는 일용지간(日用之間)이라, 평범한 일상 속에 진리가 숨 쉰다”는 저자의 말마따나 나의 평범한 일상에 진리가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이 책의 독서를 통해 생긴 것 같다.
이걸 하루만에 다 읽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예전에 읽었었던 거 다시 들춰보면서 독후감 쓴 거ㅎㅎ 오늘 읽은 책은 따로 있고 ㅇㅇ 오늘은 뭔가 글이 잘 써져서 예비용 두 권 더 써야지.. 그래야 술도 묵고 할 듯 ㅋㅋㅋ
감상문 쓸 때 문단 구분을 확실해주면 읽는 사람 입장에서 좋을 거 같음. 그래도 잘 읽었다. 안 그래도 담에 읽어볼랬믄데 - dc App
어? 문단 구분 되게 했는데 왜 이러지 한글에서 복붙해서 그런가.. 수정해야겠네 ㄱㅅㄱㅅㄱ
우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