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라오어2 평가글에서 퍼옴.

근데 포모의 역사나 그 한계를 꺼라위키 답지 않게 잘 정리해서, 포모가 대강 어떤 건지 이해하는 데 좋아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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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의 도입


우선 제작진이 시도한 행위가 예술적으로 새롭고 참신한 시도였다고 보긴 어렵다. 그냥 현대예술의 해체주의를 게임에서 시도해 본 것일 뿐이다.

[52] 해체주의란, 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등장한 예술 경향의 하나다.[53] 시간상으로 보면 1970년대쯤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개념주의와 해체주의가 대표적인 경향이나 현상으로 많이 언급된다. 개념주의는 실제 자연적, 물질적, 물리적으로 관찰되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예술로 다루는데 집중하는 경향을 말하고,[54] 해체주의는 기존에 존재하던 어떤 것, 특히 이성중심적 사고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복하고 파괴하여, 그 이성중심주의에 밀려 무시되어 왔던 것들을 재조명하고, 그렇게 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경향이다. 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개념주의와 해체주의 경향이 짙어지게 되었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 시대에 합리, 이성, 효율 등을 강조하는 태도가 결국 제국주의, 전체주의, 환경파괴 등의 부작용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이 모더니즘 시대는 대략 19세기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까지로 보는데, 이 시기에 유럽의 벨 에포크, 미국의 광란의 20년대와 골든 에이지, 두 번의 세계대전, 냉전, 베트남 전쟁 등이 있었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호황이어서 희망이 가득하던 시절 뒤에, 그 희망이 좌절과 절망으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나던 때였다는 말이다. 당연히 지식인들 입장에서는 "왜 잘나가다 이렇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거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해 온 인식이나 방법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동안 우리가 지나치게 합리, 이성, 효율만을 중시한 나머지 간과하고 무시한 것들이 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문화계 쪽에서는 기존의 주류였던 이성중심주의, 구조주의 등을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가 저 개념주의와 해체주의 경향의 대두다.

자연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구체적인 형상이 광고나 프로파간다나 지배자 우상화를 위해 악용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염증을 느낀 예술가들은 모더니즘 시기에 추상예술에 천착하였고, 이후에 "굳이 형상을 표현할 게 아니면 그냥 개념만 표현하면 그만 아니야?"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개념주의가 현대예술계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정착된다.[55]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기존에 존재하던 어떤 예술 작품을 '차용'하여 이를 해체, 전복하는 해체주의 예술이 늘어난다.[56]

그리고 이런 해체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감상과 해석의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전 시기처럼 관객, 관람자, 감상자가 이미지에 이입하거나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관조하며 그것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견지하도록 비판에 간섭을 일으키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차단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원래 연극계에서 먼저 나온 것인데,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안한 소격효과(낯설게 하기)가 그 예시이다.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파가 연극에서 주장한 카타르시스 이론에 비판적이었는데, 극중 등장 인물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걸 본 관객은 일시적으로 쾌감, 희열, 전율 같은 감정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인 승화나 해소의 단계에까지 이르진 못한다고 본 것이다. 관객이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극중 상황을 감정 이입하지 않고 동떨어진 상황에서 바라보아야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런 비판적인 시각 하에서만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의 프로파간다에 선동 당하는 결과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브레히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그가 나치가 지배하던 독일에서 태어나고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비롯해 나치가 행하는 각종 선동과 황색선전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런 소격효과는 그대로 시각예술 분야에도 도입되었고, 콘스탄틴 브랑쿠시처럼 인물 얼굴에 이입하지 못하도록 조각상에서 얼굴 묘사를 없애고 아예 형태와 물질성 그 자체만 남기거나, 조셉 코수스처럼 인물 모습이 아예 없고 글 텍스트만 남긴 작품들이 나타난 것이다. 네모난 입방체를 늘어놓아 물질성과 위상 관계만 보여주는 미니멀리즘 작가 중에는 아예 인간형태주의(anthropomorphism)를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전체주의 같은 부작용을 강화하는데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 동상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는 것처럼 대상을 우상화, 신격화하는 일이 없게끔 만들려 했던 것이다.  



해체주의의 한계


이렇게만 들으면 포스트모더니즘식 방법론이 다 옳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우선 이 해체주의가 나온 지도 40년이 넘었는데 그 동안의 성과를 되돌아 보면 효과가 미미하다. 가장 큰 이유는 우선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전 유산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하다. 아무리 그런 이미지가 선동에 오용되고 무비판적 사고를 조장할 수 있어 나쁘다 해도, 완전히 인간 형태를 없애거나 자연적 사실주의를 배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이 이런 사실적 재현과 복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면서 인간이 직접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대신 오늘날 매체 환경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재현적 이미지가 범람하게 되었다. 기성 대중의 반발은 차치하고, 이런 방대한 재현적 이미지를 다 해체, 전복, 파괴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애초에 인간은 생리적으로 이런 기성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점도 해체주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250만년 동안 자연의 재현 이미지에 노출된 상태로 진화해왔다. 이걸 고작 수십 년 만에 해체, 전복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설탕이 비만과 당뇨를 유발한다고 해서, 설탕을 모두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설탕의 단맛을 싫어하도록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느니 아스파탐 같이 당뇨는 유발하지 않으면서 맛도 좋은 다른 대체 감미료를 개발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마찬가지로 재현 이미지가 나쁘다고 아예 재현 이미지를 없애느니, 그 재현 이미지와 효과는 비슷하면서도 오용될 가능성은 적은 이미지를 찾아내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해체주의의 한계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해체주의의 방법론대로 그런 재현 이미지를 다 없앤다 해도, 사진이나 SNS 등으로 쉽게 복제, 전파가 가능한 오늘날에는 그렇게 남은 추상 이미지나 메시지도 오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해체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문화수용자의 비판 의식을 고양시켜 문화를 향유할 때 분별력을 가지게끔 하는 것인데, 과연 거리를 두고 원전을 해체, 전복, 파괴한다고 비판적인 시각이 배양될지는 의문인 것이 사실이다. 연극계에서 행해졌던 소격효과 실험은 극장 안에서만 작동했으며, 시각예술은 갤러리 화이트 큐브 안에서만 작동했다. 극장이나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 관람객은 그냥 대중이 되고 다시 대중매체에 노출되고 비판적인 시각을 거두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기존 예술 제도권에서 벗어나 대중예술의 판 안에서 이런 해체주의 시도를 해보려 했다. 노골적으로 해체, 전복, 파괴하진 않았지만, 한국 출신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한 예술가인 백남준이 했던 작업도 결국 새로운 매체 환경을 주관을 가지고 수용하여 주도적으로 향유하자는 목적이 담긴 것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이 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같이 대개 이런 작업은 대안이 되기엔 지속성이 없는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계가 왔다는 시각이 팽배해서,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 나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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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2 평가 항목에서 퍼온 내용인데. 이 게임이 대체 어쨌길래, 해체주의 담론이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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