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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도루, 중국근현대사 4-사회주의를 향한 도전, 삼천리, 2013.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개혁 개방이 이루어져 시장경제의 물결이 중국을 휩쓸었고 명실상부 세계의 시장이자 공장으로 우뚝 서 세계 경제 2위의 대국이 된 2020년의 시진핑 시대에도, 중국의 공식 이념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이다. 그만큼 중화인민공화국과 사회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중국이 처음부터 사회주의 국가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대일전선을 이끈 양측인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간의 회담이 8월부터 10월까지 충칭에서 열렸다. 이후 1946년 1월에 개최된 정치협상회의에서는 국공 양당을 중심으로 민주동맹까지 참가하는 연립정권 수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민당 내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46년 3월 제2회 국민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 유지를 위한 갖가지 결의가 채택되었다.

1946년 6월 국공내전이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개전 초기 국민당에 유리했던 전국은 국민당의 경제적 파탄과 공산당의 여러 전략적 요소가 맞아떨어진 결과 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도피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림 중국이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건국 전날까지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채택한 공동강령에 기반한 ‘신민주주의’가 공식 건국이념이었다. 물론 그것은 노동계급의 지도를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형식적으로나마 공산당 인사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체제는 기피되었다. 

한편 1950년 중앙정부 하에 재정경제위원회가 조직되어 민간 기업과 공산당원 외의 전문가의 협력을 이끌어내 나름의 성과를 보였고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공산당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다. 농촌에서는 토지개혁이 실시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3억의 농민들에게 분배되었고 결혼법을 제정해 여남 모두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모든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공산당의 사회주의 정책을 두려워 한 민간 기업 경영자들이 홍콩이나 타이완으로 이동, 민간 기업의 비중이 급속히 낮아졌다.

외교 무대에서는 단연 소련이 가장 중요한 상대였다.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체결돼 소련과의 군사동맹, 3억 달러 가치의 유상차관, 소련이 중국에서 차지한 각종 이권들의 반환이 이루어졌다. 서구권 국가와의 외교는 중국이 과거의 조약을 모두 폐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새 국면으로 진입했으나 이는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내부적으로는 신장, 내몽골, 티베트 등 주변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국민당 정권 말기의 민족 독립 운동을 차단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케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참전하였다. 처음부터 중국이 그럴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북상하자 한반도에서 미군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다음은 자국이 표적이 될 거라는 위기감에 10월 19일 중공군은 압록강을 도하했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 전역에 냉전이 확산되었고 중국은 서구권과의 무역 관계 제한, 유엔에서의 중국을 향한 침략자 규정 등 대외 관계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특히 타이완 문제에 있어서 1954년 11월 미국타이완공동방위조약 체결, 1955년 1월 미국 의회에서 ‘타이완 결의’ 채택이 이루어져 대륙과 타이완의 대치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3반운동과 5반운동을 통해 국민경제의 부흥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이는 사법기관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충분한 물증 없이 이루어져 억울한 사례가 많았다. 아직 사회주의의 실행단계가 아닌 신민주주의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3반운동과 5반운동을 거치면서 개별 민간 기업 경영자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와 감시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이후 공업의 공사합영, 농업집단화를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화가 강행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회주의화에 반해 비교적 온건한 사회주의 노선의 표명이 1956년 9월의 공산당 제8회 전국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이후 ‘백가쟁명’을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당에 대한 온갖 비판들이 쏟아졌는데 이는 공산당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기에 1957년 6월부터 이를 진압하기 위한 ‘반우파’ 투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반우파’ 투쟁으로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고급 인력들이 사라졌고 이는 행정 능력을 크게 약화시켜 ‘대약진’운동과 같은 공상적인 경제 정책이 시행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소련과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는 중국이 AA(Asia-Africa)외교에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공산당 내부에서는 의견 대립이 벌어졌는데 신중한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다수파와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소수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하필이면 국부나 다름없는 마오쩌둥이 소수파에 속했기에 1958년 일반적인 당 운영에서는 불가능한 ‘제8회 전국대회 제2회 회의’라는 이례적인 회의를 통해 사회주의의 가속화가 무리하게 시도되었다. 결국 이는 ‘대약진 운동’이라는, 2천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참상으로 직결되었는데 전술했듯 이를 사전에 막을 이들은 이미 ‘반우파’ 투쟁을 통해 제거된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59년 3월 티베트 봉기가 발발하였고 중국은 무력 진압을 강행해 철저히 진압, 티베트의 체제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이 돼서야 대약진 정책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이 시작되어 시장경제가 부분적으로 부활하고 농업과 경공업 진흥 정책이 펼쳐졌다. 그러나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자연재해로 돌림으로써 근본적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중소분쟁이 벌어졌고 대신 서유럽과 일본에 접근했다. 한편 중국이 기대한 AA외교는 인도와의 국경분쟁,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로 벽에 부딪혔다. 이후 소련과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과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미소라는 세계초강대국 모두와 대립하면서 고립감을 느낀 중국 지도부에게는 난국의 타개를 위한 강력한 지도력의 확립이 필요했고 이는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하면 먼저 생각나는 건 누구라도 홍위병일 것이다. 이들은 중국 경제가 계속 침체된 가운데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쉬이 정규직을 구하지 못해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던 젊은 실업자 내지 반실업자들이었다. 그들은 “네 가지 낡은 것을 파괴한다”는 슬로건 아래 사회주의 이전의 역사적 사상과 문화, 풍속, 습관 모두를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문화유산의 파괴, 예술인과 지식인의 죽음뿐 아니라 경제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홍위대 내부에서도 사상적인 내분이 벌어져 파벌 싸움이 지속되었는데 1968년 7월 27일 홍위병끼리의 파벌 싸움에 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마오쩌둥이 직접 질책하는 등 공산당 지도부도 그들의 폭주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았다. 이는 1968년 12월 22일 홍위병의 하방 방침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혼란을 정리한 건 군의 개입을 통해서였는데 1967년 2월 이후 각지에서 해체 상태에 놓인 지방정부와 당을 대신해 군의 주도로 혁명위원회라는 새 권력기구가 질서 회복을 담당한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70년대에 진입한 중국의 경제 상태는 타이완이나 한국 등 주변국에 비하면 상당히 낙후되고 답보된 것이었다. 농업, 공업, 소매업 등 각종 분야에 있어서 전쟁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인민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중국 지도부가 선택한 것은 대외전략의 전환이었는데 ‘핑퐁외교’로 잘 알려진 미국과의 관계 개선, 1972년의 중일 국교 정상화가 그 대표적인 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가장 다가온 내용은 바로 ‘반우파’ 투쟁에 있다. 대약진운동은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흐름을 보였는데 비판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반우파’ 투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비판을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중국의 실패는 사회주의의 실패라기보다는 무비판적 집단의 실패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비단 사회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나치나 일제 등 전체주의 국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 기이한 팬덤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등 우리 사회가 점차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수천만 명이 죽은 중국의 현대사로부터 우리가 교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