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전적으로 저자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부곡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이 책이 저자의 아버지에게 바쳐진 책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본문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도 아버지Father이고, 책의 시작에도 책의 끝에도 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 책이 사부곡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인터스텔라는 놀란 감독이 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라는 이야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인류의 과학적 사고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출판사에서 새로 지은 한국어 제목은 물론이고, 원제 역시 The Upright Thinkers: The Human Journey from Living in Trees to Understanding the Cosmos 일만큼 제목에서부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알 수 있다. 나무 위에 살던 인류가 어떻게 우주의 신비를 이해해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과학적 사고의 역사를 가장 처음부터 살펴보면서 동시에 어떻게 인류가 이런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과학 발전과 관련된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은 인간의 역사를 가장 처음부터 다룬다. 호모 사피엔스의 여려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태생 포유류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유명한 루시와 다른 포유류들과의 분화에서 시작해서 고대 도시의 탄생과 문화의 발전, 그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 전문직의 탄생과 언어, 수학, 마지막으로 법 개념의 발명까지. 수백만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첫 장에서 다룬다. 2장이 17세기 일어난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을 다루고, 3장은 현대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대한 이야기라면 1장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 밑바탕을 탐구한다. 첫 장에서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점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문화와 문명의 차이. 다른 동물에게도 문화는 존재한다. 한 원숭이가 모래 묻은 바나나를 물에 씻어 먹는 것을 보면 다른 원숭이들도 이를 모방한다. 하지만 이는 모방에 그칠 뿐 축적되지 않는다. 인류는 아이디어나 가치들을 축적하고 계승했다. 이를 혁신의 토대로 삼을 수 있었고 바로 이 점이 문화와 문명의 차이다. 위대한 사상가들 중 진공 상태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립된 천재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킨다거나 기술 영역에서 놀라운 발명이라는 업적을 세운다는 신화는 풍부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신화는 예외없이 허구이다. 과거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멀리볼 수 있었다는 뉴턴의 유명한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다만 저자는 뉴턴을 받치고 있는 거인들의 범주를 정할 때 후크와 데카르트, 갈릴레이나 케플러 뿐 아니라 처음으로 콘 모양 토기가 아닌 밑면이 평평한 토기를 만든 신석기 시대의 대천재나 사상 처음으로 점토판에 이웃에게 꾸어 준 식량이 얼만지 적은 위대한 혁신가 또한 잊지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호모 사피엔스 만이 왜? 냐고 묻는 동물이라는 점. 침팬지들은 천장에 매달린 바나나를 먹을 수 있으면 그 뿐, 그와 관련된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질문을 한다. 마지막으로 법 개념의 발명. 사회법규와 자연법칙은 모두 법law라는 용어로 쓸 수 있지만 오늘날 둘 사이에 공통점은 거의 없다. 종교에서 비롯된 법 개념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데에서 시작해 자연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설명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발전한 과정을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와 과학적 사고의 역사라는 한국어판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인류학, 고고학, 사학, 비교동물학, 법학 등 수 많은 학문을 넘나 들며 과학적인 사고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정말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 2장과 3장은 조금 다르다. 1장에서 시작된 과학적 사고를 이끌어 온 사상가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이는 믈로디노프의 전문 영역이다. 학부 과정은 화학에서 시작해 양자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전문성이 바로 여기서 반짝반짝 빛난다. 2장은 근대 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에 주목한다. 갈릴레이에서부터 시작해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뉴턴이 완성시킨 근대 물리학. 연금술에서 시작해 파라셀수스의 화학chemistry, 보일의 실험과 프리스틀리의 산소, 보일의 법칙과 라부아지에의 질량 보존의 법칙, 돌턴의 원자설과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까지. (아! 다윈의 진화론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이 모든 내용을 지치지도 않고, 깔끔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믈로디노프가 아니라면 이처럼 방대한 내용을 이토록 흥미로우면서도 집중력 있게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꼭지 꼭지가 미드의 에피소드들 마냥 꼬리를 물고 이어져, 다음 내용이 궁금해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다만 2장에서부터는 어느 정도 수준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첫 장에서는 믈로디노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상술한 과학자나 법칙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쉬이 따라가기엔 벅찬 내용이다. 고등학교 수준의 과학 지식이면 충분하지만, 내 주변에도 이 즈음에서 책을 덮을 문과 출신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분들에게는 애도의 뜻을 전한다. 하지만 뉴턴이 그의 소중하디 소중한 시간을 신의 존재 증명이나 시덥잖은 연금술 연구 따위에 썼다는 이야기나 멘델레예프는 성격이 너무나 강해서 아내조차 그를 피해 다녔다는 일화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더욱 치명적인 점은 이 것들이 단지 재미에 그치지 않고,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이제 알아갈 과학자들과 그들의 성과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향신료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데에 있다.
- 3장에서는 양자론을 다룬다. 어찌 보면 2장보다 더 어려울 수 있겠다. 보통 고등학교 공통과학 수준의 물리학은 양자역학에 대해 대충 보여주고 말기 때문이다. 평소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 물리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면 다소 생소한 이름들이 대다수다. 막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이 문을 열고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라는 주인공들의 등장까지. 친한 사람은 굉장히 재미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빨리 끝나기 만을 바라는 남의 결혼식 같은 내용이다. 다만 이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들어 왔고, 양자 역학에 대해 대략적인 이해라도 하고 있는 독자라면 책장을 넘기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440쪽 안에 수 많은 사상가들과 그들의 업적, 그 업적의 토대와 당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까지 다 담아내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만큼 상세한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설명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약점이면서 동시에 책장을 넘기는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이론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하려면 굉장히 긴 수식이 필요하고 그 수식에는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이 다루지 않는 부분도 포함된다. 그런 내용이 다 들어 있다면 과연 이 책을 읽는 사람 중 몇 명이나 지금처럼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내용은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아니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과학적 사고의 역사를 다룬다. 믈로디노프는 뉴턴의 고전역학이나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자체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학법칙에 영향을 주는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도 힘주어 말한다. 과학은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다. 동시에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 또한 과학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둘은 공진화한다. 뉴턴과 다윈, 돌턴은 자신들의 업적에서 신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고,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등장은 양자 역학의 무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막스 보른은 "나는 이제 확신한다. 이론물리학은 실제로 철학이다." 라고 썼다. 뉴턴 역학으로 인해 팽배해 있던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양자 물리학이 깨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좋은 사례가 된다.
- 이책에서 다루는 위대한 사상가들은 하나 예외없이 인내와 투지, 뚝심과 꾸준함을 가졌다. 특히나 심지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불굴의 투지grit는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특성이다. 지금 와서 보면 명백해 보이는 이론들이 당시에는 터무니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가치한 헛소리라는 세간의 평가나 주변 학자들의 비난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마음 덕분이다. 이는 과학계 뿐만 아니라 증권가나 청소업계, 육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통용되는 비법이다. 이로써 우리가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명확하게 보여준 길을, 중요하지도 않은 분야에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 (믈로디노프의 어느 다른 책들처럼) 중간중간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이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 재밌게 풀어가기 위한 기법일 뿐 독자의 집중을 방해하거나 책이 가고하 했던 방향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 믈로디노프는 주변 과학자(특히나 리차드 파인만)나 아버지와의 기억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훌륭한 능력을 지녔는데, 이 책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아버지와 나눈 대화들이 특히나 많이 등장한다. 전술했다시피 이 책은 사부곡이다. 고등학교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항상 이런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부친 사후 20년 후에 집필한 책이다.
- 저자의 아버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평생 과학과는 큰 접점이 없었고(아들이 과학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폴란드 유대인으로 태어나 홀로코스터를 겪고 미국에서 가정을 이뤄 평생 힘들게 살았지만, 항상 아들(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이 어떤 것을 배우는지 궁금해했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과학 이론들을 왜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그 이론들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도 궁금한 수학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기꺼이 빵을 내어줄 만큼 호기심이 강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고스란히 저자에게 미쳤고, 그 결과 믈로디노프는 이 책을 썼다.
- 이런 종류의 책들 중엔 좋은 내용이 나쁜 번역에 가려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책은 전혀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나 앞부분을 다시 읽게 되는 부분은 없었다. 무엇보다 440쪽을 읽는 동안 번역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을 쓴 저자 뿐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옮긴이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 평소 저자의 책은 항상 재밌게 읽어 왔고, 이 책 또한 굉장히 재미있게 읽어서 다른 독자들도 나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기분에 들떠 있었나 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몰라도 중구난방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믈로디노프는 과학을 알기 쉽고도 흥미롭게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한 스티븐 호킹의 극찬을 한 줄 적어 놓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모쪼록 이 책이, 평소 과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일품요리가 되고, 믈로디노프를 처음 접한 독자에게는 그의 저서들이라는 만찬을 시작하는 전채요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우 매끄럽게 잘 읽히는 좋은 후기였음. 이상한 글이 아님
후기추 :(
리뷰 ㅊㅊ
존나 재밌어뵤이게 썼달!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