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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과 그의 시대, 김태웅, 아카넷, 2018.


우리는 여태껏 개화와 수구라는 이분법에 국한해 개화기 당시의 인물들을 파악해왔다. 그러나 개화와 수구의 구분이 일본 침략주의 논단의 산물이라는 연구와 후쿠자와 유키치, 기쿠치 겐조 이후 조선말기 고종 대 정치사를 보는 일본 측의 기본 시각으로 정착하였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이광수, 최남선, 이병도, 이선근 등에 의해 수용되어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연구가 말해주듯이 그러한 이항대립적 프레임은 일본 제국의 영향이 매우 크다.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개화와 수구의 대립이 갑오개혁에 이르러 개화의 승리로 종결된다는 한국사 교과서의 통설적인 역사 지식과 다르게 실제 당대 사료에서 증언하는 개화와 수구의 대립은 갑오개혁 이후 비로소 전면화되었다는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갑오개혁 이전의 인물들을 개화와 수구라는 도식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화와 수구뿐만 아니라 온건과 급진이라는 개화파를 향한 이항대립적 프레임도 자연스레 폐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기존의 학설에서는 첫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의 적극간섭정책에 대한 비판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강조의 무게, 둘째,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는 범위와 속도, 셋째, 개화독립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 등의 견해 차이를 이유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어윤중이다. 그를 어떻게든 온건과 급진의 이분법에 국한해 파악하기 위한 기존의 학계의 노력(?)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해방 이후 어윤중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옥균이 해방 후 남북한에서 근대의 선각자, 자주독립을 추구한 애국자로 추앙받으면서 그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어윤중은 사대 친청파로 치부되거나 소극적 현실주의자로 격하되었다. 이병도의 경우, 개화독립당에서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을 제외시키면서 심지어 그들을 박영효, 서광범 등 소장 개혁파들의 장애물로 묘사하였다. 이기백 역시 《한국사신론》에서 이병도의 서술에 비해 의미를 좀 더 부여하고 있으나 어윤중 등을 여전히 청의 원조에 의존하는 인사들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어윤중의 감생청 설치를 높이 평가하거나 일제 강점기 이후 주창된 수구파 대 개화파의 대립투쟁이라는 도식적 이해 방법이나 개화파 내의 급진·온건의 노선 분립의 해석으로는 당시의 개화정책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도출해 낼 수 없다며 기존 학계의 이항대립적 프레임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구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하다. 학계의 주류는 사대-독립, 보수-개화라는 이항대립 구도에 입각해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이라는 기본 틀에서 근대민족운동을 파악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본 독후감에서는 어윤중의 행적을 어린 시절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어윤중을 온건개화파로 단정짓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연구가 어째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와 동시에 최대한 어윤중의 삶과 그의 행적인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온전한 실체를 파악해 보려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근현대사회와 달리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유소년기·청년기 학문 수련과 인간관계 못지않게 가문의 학문적 성향, 정치적 위상과 경제적 기반이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어윤중의 가문과 그가 어릴 때 자라온 환경 등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윤중의 본관은 함종이고 시조는 어화인이다. 어화인은 남송 풍익현 출신으로 난을 피해 고려로 귀화한 인물이다. 초기에는 강원도 강릉에 정착하였다가 평안도 함종 고을을 세거지로 삼았다. 이후 6세 어석공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현달한 족속으로 세거하여 함종을 본관으로 삼았다. 중시조는 조선시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시호가 양숙공인 어세공이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양숙공파로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친은 약우, 조부는 명능이고, 증조부는 재상이다. 경기관찰사 어진익이 이 집안 출신이고 심지어 경종의 비인 선의왕후가 어윤중의 직계 조상 어유봉의 조카였을 정도로 어윤중 가문은 노론의 당당한 문중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역적으로 몰리지도 않았는데 왜 몰락했을까. 이는 어윤중의 성장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선 어윤중의 3대조 어재상이 후사가 없어 어재황의 아들 어명능이 후사를 이었으며 2대조 어명능도 사촌인 어명좌의 아들 어약우가 후사를 이었다. 후손이 적다는 것은 가계를 이어갈 혈연적 유대가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4대조 어용빈이 참봉직을 제수 받은 이래 어느 후손도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당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유구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후일 영조)의 건저에 소극적이었고 선의왕후가 주저하여 훗날 노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집안이 선의왕후를 예후하였던 영조 연간을 지나면서 정계의 핵심에서 밀려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이후 다음 대 어용빈과 어용림은 중앙 정계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박지원의 먼 친척 동생이자 순조 생모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어용빈은 화가 단원 김홍도와 절친하였으며 박준원의 이웃이었다. 또한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과도 교제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여전히 노론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이후 출사한 인물이 없으므로 가문이 더욱 쇠미해졌다.

한편 어윤중의 출생지는 여러 설이 나뉜다. 주로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와 외속리면 봉비리를 지목하는데 특히 전자는 현재도 마을 노인들 사이에 ‘어판사댁’이라고 전해지는 가옥이 있어 유력한 출생지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곳이 그의 삶에서 차지하는 기간이 길다고 하여 출생지로 단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한편 어윤중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에서 출생한 뒤, 선곡리로 이사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윤중의 조상인 어숙권의 별묘와 어세권의 사당이 남아있고 1910년대 초반 토지조사부에 다르면 함종어씨가 고덕리에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경기도 수원설이 있다. 어윤중이 손수 지은 어머니 이씨 묘비명에 따르면 어윤중의 어머니가 수원에서 성장하였고 함종 어씨에게 출가한 뒤에도 친정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수원에 기거하다가 어윤중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윤중이 어렸을 때 수원에 거주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윤중이 훗날 박원양의 시신을 거둔 일로 탄핵을 당할 때 그 상황을 변명하면서 박원양이 자신의 소시적 스승이었다는 점 그리고 《매천야록》에 따르면 박원양이 수원에서 서당 훈장으로 어린 학동을 가르치면서 겨우 풀칠을 면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근거에 입각해 어윤중은 수원 모친의 친정집에서 출생해 성장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출생 사정은 그가 외조부로부터 실학을 전해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윤중 자신은 9살 때인 1856년에 모친을 여의고 이즈음에 아마 광주의 어씨 집성촌으로 이사했다가 16살 때인 1863년에 부친마저 여의었다. 일약 고아가 된 셈이다. 이때 그는 함종 어씨 집성촌이 소재하는 경기도 광주군 덕천면 고덕리에 더 이상 거주하지 못하고 충청도 보은군 외속리면 봉비리에 내려왔다. 당시 어윤중은 이곳 보은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후일을 도모했다. 이때 1849년생인 풍양 조씨와 혼인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화순 최씨 집성촌이 있는 삼승면 선곡리로 들어왔다. 전술했듯 현재에도 이곳 주민들은 최태하 가옥 뒤편에 자리한 가옥을 ‘어판사댁’이라고 부른다. 또한 1913년 5월 토지조사사업 당시 어윤중의 장손 어강이 선곡리 지번 322, 308, 309, 318을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윤중은 이곳에서 성장하였으리라 확정할 수 있다.

어씨 일가가 애초부터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놓이지는 않았다. 그들 자신이 보은에 집성촌을 두고 있었지만 일부는 18세기에 상경하여 고위 관직에도 진출했다. 대표적으로 어유봉 형제를 비롯한 여러 선조들이 노론의 당당한 일원이었고 심지어 선의왕후를 배출할 정도로 위세가 큰 문중이었다. 하지만 4대에 걸쳐 벼슬길에 들어서지 못하면서 양반으로서의 가격이 떨어졌고 심지어 지방으로 내려가야 할 처지에 몰렸다.

어윤중은 가학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어윤중이 외가가 있는 수원에서 성장했기에 외가인 여주 이씨 가문의 영향을 받았다. 모친 여주 이씨의 4대조 이석주는 송시열의 제자로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한도를 정하는 한전제도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고 고을 단위에서 병농일치를 실현해보려고 시도했다. 그 대상은 수원의 둔전으로 농민들이 군역을 지면서 그곳에서 농사를 짓기를 원했다. 이러한 점에서 정조의 농업개혁론과 부합되는 측면이 많았다. 모친의 사망 이후에는 본가가 소재한 광주로 돌아와 부친 어약우로부터 가학을 배운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수학은 부친이 사망하는 1863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친 어약우가 어윤중의 조부 어명능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윤중의 가학에는 어명능의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 짐작된다. 어윤중은 조부 어명능이 완성한 어유봉의 《기원집》을 고이 간직했을뿐더러 이를 증보하여 간행하고자 할 정도로 가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어유봉은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동일하게 오행의 이를 갖추었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함으로써 낙론계열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겠다. 특히 이 집안은 반남 박씨 박지원과 밀접하다는 점에서 낙론에서 출발한 북학파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어용림이 박지원의 고모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어윤중의 4대조 어용빈은 박지원과 동갑으로 교유가 매우 활발했다. 한편, 어명능은 훗날 정약용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정학연과 가까운 문우로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어명능의 실학사상은 자연스레 어윤중에게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윤중이 초창기 유학에 충실하다가 방향을 전환, 개화를 중시하게 된 것도 일본 문물을 접하고 난 뒤의 일순간의 변화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조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어윤중 집안은 노론 낙론계열로서 어윤중은 낙론을 가학으로 삼아 인척 관계였던 박지원의 북학사상, 외가 여주 이씨 이석조의 근기 실학사상을 흡수했다. 따라서 어윤중은 어떤 특정 학파의 사상에 경사되지 않고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여러 사상을 절충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어윤중은 21세 나이로 1868년 7월 지방유생 50명을 선발해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는 칠석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 3월 20일 정시에서 어윤중은 합격자 32명 중에서 병과 17등을 차지했다. 당시 이건창, 강문형, 김만식 등도 함께 병과에 합격하여 어윤중과 함께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윤중은 5월 승정원의 임시 관직 정7품인 가주서로 임명되어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6월에는 주서로 추천될 뻔했는데 이건창에 밀렸다. 이후 1871년 1월 11일 어윤중과 이건창은 둘 다 홍문록에 올랐다. 언관의 기능을 수행하는 홍문관 관리의 후보가 된 것이다. 또한 1878년에는 이헌영, 이건창 등과 더불어 암행어사로 지방에 내려갔다. 어윤중은 이처럼 주로 삼사, 승정원 또는 규장각이나 선전관청 등 명예롭고 중요한 청관요직을 두루 거쳤다.

어윤중은 1869년 승정원 정7품 벼슬인 가주서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서 어윤중은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잠시 재직했다. 그 후 어윤중은 기사관, 전적, 감찰, 정언, 문신겸 선전관 등을 거쳤고 이후 1871년 1월 11일 어윤중은 홍문록에 올랐다. 언관의 기능을 수행하는 홍문관 관리의 후보가 된 것이다. 동해 2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고 시독관을 겸임하여 진강에 참석해 고종에게 유학에서의 성군의 도리를 아뢰었다. 또한 홍문관 관리로서 고종에게 경연을 그만두신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며 자주 경연을 열어 신료들을 만나 총명을 개발하고 학문을 진보시키기를 바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유학자로서 어윤중의 신념은 이후로도 계속 드러난다. 관료 생활을 시작한 지 어언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윤중은 고종에게 왕도정치를 추구할 것을 간언했다. 외세의 위협을 막아내고 나라를 보위하는 방법 역시 왕도정치라고 보았다. 또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절용론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 재정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윤중은 유교 왕정 이념에 입각한 성군정치론과 재정절약론을 줄곧 주장한 셈이다. 결국 그는 체제의 지속적 안정과 소민 보호를 축으로 하는 중세적 재정절용론에 그친 나머지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하는 근대적 식산흥업론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윤중은 기성 관료들과 달리 성장과정에서 조선의 현실을 관찰하면서 절감했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윤중은 가학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였지만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들을 맞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신환의 제자인 한장석·서응순과의 교류는 그의 가학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신환은 고증학이 고증을 위한 박학과 치밀성에만 경도함으로써 실용성을 상실하고 주자학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심성론으로 기울어진 가운데 학문의 실용적 측면을 정치적 실천으로 옮길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당시 시대적·사회적 현안이었던 삼정의 개혁에 관심을 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토지에 세금을 집중시킴으로써 조세부담의 공평성을 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제시했던 이들 학파의 결포론은 어윤중이 서북경략사와 갑오개혁기 탁지부 대신으로서 취했던, 환곡을 혁파하여 토지에 집중하는, 이른바 파환귀결 조치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된다. 전자의 결포론이 전세, 군역세를 대상으로 취한 조치인 반면에 후자의 파환귀결은 환곡을 대상으로 취한 조치이지만 그 원리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어윤중의 삼정개혁은 여기서 출발했을 것이다.

한편 어윤중은 박원양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박영효·박영교 형제와 연결되었으며 자연스레 박규수 집의 사랑방에서 김옥균,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김윤식, 박영효, 박영교 등과 자리를 같이 했다. 특히 어윤중은 신기선, 김옥균과도 1872년 이전부터 이미 교류하고 있었다. 이후 1882년 봄 김옥균은 어윤중이 써준 소개장을 갖고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났으며 임오군란 당시 어윤중은 “일본군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있는데 김옥균과 서광범 두 사람은 모두 동지의 벗이다.”라고 했다. 갑신정변 이전만 하더라도 어윤중과 김옥균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어윤중의 가계와 박규수의 가계는 어유봉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었다. 박규수의 아버지 박종채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대신해 박규수를 지도한 박규수의 척숙, 이정리·이정관 형제의 조부인 이보천이 바로 어유봉의 문인이자 사위였다. 따라서 박규수는 어윤중과 혈연 관계인만큼 학문적으로 매우 밀접했을 것이다. 끝으로 어윤중은 관직 생활 과정에서 박규수의 지도를 받았음에 주목할 만하다.

어윤중은 관직 진출 이후 민씨 척족인 민영익과도 교류가 활발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민영익 집 대문을 출입한 사람들을 8학사로 불렀는데, 어윤중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8학사로는 어윤중을 포함하여 어중칠, 조동희, 홍영식, 김흥균, 홍순형, 심상훈, 김옥균이 거명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민영익과 매우 밀접했는지가 분명치가 않다. 무엇보다 어윤중과 민영익의 관계이다. 민영익은 어윤중보다 12살 연하의 인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후광을 입고 개화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인 민태호가 유신환의 제자이며 동문수학한 유만주 문하에서 유길준과 함께 수학했다. 따라서 그는 유신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의 필요성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은 경계했다. 후일 민승호가 대원군에게 미움을 받아 폭사를 당하자 민영익은 그의 양자로서 권력의 중추에 섰다. 당시 민영익은 매일 세 번씩 입궐하는 특전을 누렸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인 1876년에는 이조참의에 제수될 정도로 승승장구의 기세로 나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민영익과 가까웠다고 알려진 이른바 8학사도 민영익의 이러한 위세를 적극 이용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어윤중 역시 본인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민영익의 위세는 매력적인 요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이들 사이에는 유신환을 매개로 연결될 고리가 컸고 사상적으로도 친화성이 컸다. 어윤중은 이처럼 관직 진출을 전후하여 가학의 품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학풍과 조우했으며 이후 시대를 이끌어 나갈 인사들과 본격적인 친분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이었다.

1877년, 어윤중은 전라우도 암행어사를 역임하면서 전라도 일대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지방수령과 아전들의 착취와 이에 따른 백성들의 피폐가 자현재해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감한 그는 곧 12개조의 시무개혁안을 만들어 별단으로 제출했다. 그가 제시한 12개조의 개혁안은 크게 부세 감면과 부세운송의 폐단 제거, 지방행정제도의 개선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고종은 그의 개혁안을 곧 조정회의에 붙였다. 논의 끝에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일부 사항만을 시행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여러 도서지역에서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거두는 폐단을 시정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어윤중은 1880년에 홍문관 응교의 자격으로 부교리인 김옥균 등과 함께 근무했다. 이때 김옥균과 매우 가까이 지내며 개화방략 등을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이듬해 1월 11일, 34세의 나이로 동래부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심상학, 홍영식 등이 함께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본래 고종에게 일본에 건너가 그들의 개화정책과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우려하여 암행어사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현재는 ‘조사시찰단’이라 불리우는 동래부 암행어사 12명은 4월 11일에 쓰시마에 도착한 뒤 4개월 동안 시찰활동을 수행하고, 7월 14일에서 23일 사이에 도쿄를 떠나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어윤중과 김용원 등 관료와 유길준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일본에 남았다.

그는 조사시찰단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지 않고 고종의 명에 따라 나가사키에서 톈진으로 건너가 리홍장을 비롯한 청국의 외교통상 전문가들과 만나 양국 간의 현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상호 의견교환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양측 모두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상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윤중은 나름대로 조선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양측의 논의는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어윤중은 일본 및 중국의 견문을 통해 조선의 급선무는 부국강병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가 일본과 중국을 견문하면서 남긴 기록인《수문록》과《재정견문》에 살펴보면 어윤중은 국가통합장치의 도입을 꾀하고 경제통합의 조감도를 그리고 국민·문화 통합방안을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윤중은《수문록》에서 유교의 폐단을 “우리나라가 평소에 유교를 숭상하고 게다가 유약하고 나약함에 빠진 것을 어질다고 하기 때문에 용감하게 기상을 떨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라고 서술하면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일본의 지폐와 국채, 은행, 조세 등 재정과 관련한 7개 항목을 서술한《재정견문》에서 어윤중은 일본정부가 단행한 세제 및 금융 개혁이 부국강병을 이룬 토대임을 간파하고 1873년에 실시된 지조개정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렇듯 어윤중의 개혁사상은 12개조의 시무개혁안을 올릴 때만 해도 민생안정을 목표로 한 중농의 부국강병론이었지만 조사시찰단 경혐을 계기로 재정정비와 산업진흥 등 중상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으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어윤중은 일본과 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1882년 다시 문의관의 자격으로 이조연과 함께 청으로 파견된다. 그는 곧 영선사 김윤식과 합류해 중국의 톈진공창에 파견된 공학도들의 학업상황을 점검한 뒤 리훙장 및 해관총독 저우푸 등과 만나 조미통상조약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청의 최대 관심사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이었다. 그가 한창 협상을 진행하는 와중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임오군란이 평정된 후 민씨 척족에 의해 재차 문의관으로 임명되어 중당된 장정 협상을 마무리하였다. 민씨 척족이 청의 무력에 의지해 권력을 장악했기에 어윤중에게는 협상의 여지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윤중은 최대한 조선 측에 이로운 방향으로 협상을 마무리하도록 애썼다. 그 결과 그나마 청 상인의 내지채판을 막을 수 있었고 홍삼세를 절반으로 삭감할 수 있었다. 비록 장정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청에 대한 속방관계를 성문화함으로써 청 상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윤중이 전대의 사대전례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근대적인 외교통상관계로 이행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하는 게 타당하겠다.

장정 협상을 마무리하고 9월 24일 귀국한 어윤중은 고종의 명에 따라 설치된 감생청의 총책임자인 구관당상으로 임명되었다. 12월 29일 작성된 「감생청 감생별단」에서 그는 종친부를 10촌으로 한정하고, 의정부 당상을 70세 이하로 한정하고, 각종 공물을 사옹원이 통합하고, 와서와 조지서를 혁파하고, 혜민서와 통폐합해 전의감에 소속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암행어사 활동과 일본 시찰을 벌였던 어윤중이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긴급하게 혁파하거나 조정해야 할 항목들을 뽑아 추림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나 어윤중은 감생청의 설치 이전인 10월 12일에 이미 서북경략사로 임명되어 있었고 감생청에 대한 전주이씨 종친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감생청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설립 반년 만인 1883년 5월 1일 철폐되었다.

비록 자신이 총책임자였던 감생청이 흐지부지되었지만 어윤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어윤중은 서북경락사로서 조선의 경계를 확정짓고, 장정의 실행으로 인한 북방무역의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직접 토문강과 두만강 등 국경일대와 관서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뒤 청 대표와 담판을 벌였다. 또한 어윤중은 유민을 막아 변방을 개척하려는 속셈으로 초산과 창성 등지에 흩여져 있던 18개 진보를 폐쇄하고 함경도의 큰 폐단으로 환국문제를 지적하면서 ‘파환귀결’을 통해 재원을 합리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어윤중의 이러한 서북경략사 활동에 대한 고종과 조정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1884년 그는 서북경략사의 직책과 더불어 병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차례로 겸임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이해 5월에 서북경략사의 직책을 면직 받아 호조참판의 직무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가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경제에 전념한 지 불과 5달 만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다행히 그는 정변이 일어나기 11일 전에 37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 영선을 보러가기 위해 선곡리로 내려갔기에 김옥균 등과 절친한 사이임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 어윤중은 수차례 사직상소를 올리며 낙향코자 하였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윤중은 고종의 신뢰 속에서 한성부 우윤, 승지, 한성부 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86년 12월 예조참판에 임명된 이후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고 고종이 이를 승인한 뒤 민씨 척족을 포함한 반대파의 견제로 인해 오랜 기간 한직을 떠돌아야만 하였다.

어윤중이 다시 활약상을 보이는 때는 1893년 갑오농민전쟁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동학교도들이 충북 보은의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교조신원 및 척왜양을 기치로 내걸고 소위 ‘보은집회’를 열자 호서와 호남 지역이 크게 진동했다. 이에 놀란 조정이 급히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해 이들을 해산케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윤중의 인식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동학교도들을 ‘비도’라 부른 것과 달리 이들의 집회를 직접 보고난 뒤 장계를 올리면서 이들을 ‘민당’으로 지칭했다. 그는 무력을 통한 해산에 반대하고 동학교도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의견을 청취했고 탐관오리에 대한 숙청 등 그들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고 조정의 관대한 처분을 약속하며 이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어윤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참지 못하고 이듬해 3월 전봉준이 들고 일어나면서 전국이 일시에 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조정은 농민군을 막기 위해 청군을 불렀고 일본은 청군의 출병을 구실로 곧바로 대규모 군사를 파병하였다. 농민군의 해산 이후에도 일본은 내정개혁을 강요해 조정은 6월 26일 개혁을 주관할 기관으로 군국기무처를 설립하였다. 어윤중은 청일전쟁의 와중에 실시된 갑오개혁에서 교정청과 군국기무처 등에 참여해 일련의 재정경제 개혁을 과감히 추진했다. 이는 그가 정국혼란으로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이 번갈아 서는 와중에 계속 탁지부대신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갑오개혁 당시에 나온 일련의 재경부문 개혁안은 모두 어윤중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개혁에 임하면서 고종과 민비의 작은 요청일지라도 법률에 어긋날 경우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오개혁 때 시행된 경제개혁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재정개혁이었다. 당시 재정의 고갈은 관료집단의 증대와 군사조직 개편 등으로 지출규모가 확대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신식 군영의 설치 등 조선의 각종 개혁정책을 권유하면서 재정고갈을 유도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민씨 척족세력의 세도정치로 인해 가렴주구가 일상화되면서 중간관리자들이 세금을 빼돌린 것도 중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어윤중은 이런 폐단을 근원적으로 혁파코자 국가재정을 하나로 통합해 조세수납을 탁지부로 일원화하는 방안을 공표하였다. 또한 어윤중은 내무대신 박영효 및 탁지부 협판 안경수 등과 함께 3백만 원의 대일 차관 교섭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일본 지폐를 조선의 법화로 통용시키고, 조선정부는 차관 전액을 변제할 때까지 지폐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어윤중은 이미 조선정부가 은본위제를 도입한 만큼 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본이 차관으로 제공한 지폐가 조선의 법화로 통용되는 것은 독립국의 체면을 손상하고, 조선 은화의 해외유출을 초래한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결국 차관협상은 오랜 논의 끝에 반액은 은화, 반액은 일본 지폐로 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그나마 반액을 조선의 법화인 은화로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어윤중의 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외채 차관에 결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충청, 전라, 황해 지방이 농민전쟁으로 인해 조세가 징수되지 않고 가뭄으로 당시 몇 달째 관료의 월급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열악한데다가 화폐 발행 등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침략을 우려하여 일본보다는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도입된 일본 차관에서 그나마 최대한 조선의 이익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어윤중은 차관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했을까. 이후 어윤중의 주도로 추진된 차관 도입계획 「기국채의」에 따르면 일본으로부터 추가로 500만 원을 도입해 재정 정리와 민간사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놓는 경제통합을 위한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였다. 「기국채의」에 제시된 향후 3년 간의 예산계획에 의하면 경인철도 부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이외에 왕실 재정 정리를 통한 정부수입 증대, 징세법 개선에 의한 새로운 세원 발굴, 민간 상공업 진흥과 같은 일련의 경제통합 조치를 실현함으로써 3년 뒤엔 더 이상 차관도입이 필요 없는 자립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려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자립경제의 기반 하에 군사·경찰·교육 등 국민통합의 제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주도한 어윤중은 우리 역사살 최초로 조직적 차관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계획, 나아가 국가발전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윤중은 이러한 계획을 제대로 이뤄보기도 전에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붕괴된 후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친러 세력들은 일본 수비대가 의병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파견 나가자 이 틈을 활용해 파천을 실행했다. 특히 김홍집 내각이 고종을 폐위한다는 설을 고종에게 알림으로써 고종의 파천 결심을 끌어냈다. 드디어 이날 새벽, 고종은 친러파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역괴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형진을 잡아서 즉각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조선주재일본 공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당일 어윤중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그는 아관파천 소식을 듣고 탁지부로 달려가서 장부를 정리해 그곳 관리에게 넘겨준 다음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탁지부 대신을 사직하고 중추원 의장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을미사변 직전인 1895년 8월 12일 휴가를 받아서 처자가 살고 있는 보은에 내려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고종은 어윤중을 을미사변 역적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특히 아관파천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서재필과 윤치호도 어윤중 살해의 불가함을 주장할 정도였다.

어윤중은 한양에 체류하면서 정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홍집과 정병하처럼 소위 ‘왜대신’으로 몰려 백성들에게 변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다음 날 한양을 떠나 자신의 친척이 거주하는 경기도 광주로 출발했다. 어윤중은 이곳에서 5일간 머물렀다. 그리고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가 없어서 충청도 보은으로 향하는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다 도중에 머물렀던 용인 고을에서 1896년 2월 17일 마을 주민 정원로에게 피살되었다.

그러나 어윤중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즉 살해자의 신원과 피살 장소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살해 동기는 불분명하다. 어윤중의 죽음에 관한 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어윤중이 평소에 원한을 가진 용인 주민에게 살해당했다는 원한설과 어윤중을 갑오역적이라고 인식한 용인 주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역적설이다.

위 두 설에는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어윤중의 살해는 이들의 단독 범행이었을까. 즉 어윤중이라는 고관을 일개 고을 주민들이 단독으로 살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고종이 1차 재판에서 직접 가담한 정원로와 임록길, 안관현을 각각 사형과 종신징역에 처했는데 왜 갑자기 감형시켰을까.

이러한 의문은 제3의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풀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어윤중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뒤 후반부에서 아관파천의 주도 인물인 이완용의 말을 근거로 삼아 어윤중 살해를 지시한 사주자로 이범진을 지목하고 있다. 물론 이 보고서는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져 친러파에 의한 사주설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범진이 어윤중 살해의 배후조정자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안관련과 정원로가 이범진의 근친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또 다른 제3의 자료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윤효정의《풍운 한말비사》라는 야사이다. 이 책에 따르면 사건의 중심에 유진구라는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는데《풍운 한말비사》에 근거하되 여타 자료와 연계하여 이 사건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유진구는 어윤중이 용인에 당도했을 때 정원로 집에 식객으로 와 있었다. 그는 을미사변 2달 뒤에 무인 출신으로 탁지부 대신 어윤중 휘하의 사계국장이었던 김재풍 등과 함께 궁내부 순사로서 명성황후 복수를 위해 경복궁에 침입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소위 춘생문 사건의 당사자였다. 당초 이들 무인은 베베르와 가까운 이범진 등과 춘생문 사건을 모의했다. 이들이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에 집결하면 이범진의 조카인 시위대장 이진호가 내응해 문을 열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궁내부 순사인 유진구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때 이진호는 고민 끝에 상관인 어윤중에게 이를 알렸으나 어윤중은 이진호에게 알아서 판단토록 위임했다. 이에 이범진의 통보를 받은 이진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신무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유진구는 법망을 피해 도주하다가 광주에 숨어 있는 신세가 되었다. 유진구는 거사 실패의 책임이 어윤중에게 있다고 생각해 늘 복수할 기회를 노렸는데, 이때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진구는 35세 평민 출신으로 북서 계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진구로서는 어윤중을 살해하기 위해 정원로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렸으며 정원로는 이를 듣고 대노했다. 그는 곧 동네청년들을 이끌고 가 어윤중이 묵고 있던 사랑방을 덮쳤다. 그러나 일행은 심상치 않은 마을 분위기를 눈치 채고 이미 떠난 뒤였다. 이들은 급히 가마를 추격해 어비울 주막 앞에서 일행을 붙잡았다. 어윤중은 가마에서 끌려나와 천변에서 무참히 타살되고 말았다.

윤효정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윤중은 결국 아관파천의 주역 이범진의 사주를 받은 유진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정원로 등을 비롯한 범행 가담자들이 어윤중과 직접적으로 원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닌데다가 어윤중이라는 대신을 살해했음에도 훗날 감형을 받는 것으로 보아 윤효정의 이러한 서술은 대단히 신빙성이 있다. 물론 정원로 등의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문에서 범인들의 배후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아 윤효정의 주장은 한낱 전해오는 풍문을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효정 자신이 탁지부 주사로서 어윤중을 상사로 모시다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두고 결별했을 뿐 여러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그가 춘생문 사건의 전모를 잘 알고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풍운 한말비사》가 그의 말년인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는 점에서 굳이 과거의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판결문에서 밝히지 못한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상 어윤중의 삶의 행적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친청파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어윤중은 청과의 장정 협정에서 비록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불리한 협정을 체결했지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 현실적인 차원에서 조선에게 유리함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조사시찰단 당시 작성한《수문록》과 《재정경문》만 보더라도 유교의 폐단을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메이지 유신의 재정 개혁을 높이 평가하는 등 흔히 알려진 대로 동도서기론적 면모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같이 일본형 국민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한 개혁가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나 어윤중은 김옥균과는 달리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시기상조로 여기고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을 꺼려했다. 즉 김옥균 등과는 국제정세인식이 확연히 달랐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윤중은 대체 어디에 속한 인물인가. 김옥균 등과 같은 급진개화파로 분류되기에는 국제정세인식의 차이가 걸림돌이 되고 그렇다고 동도서기론 류의 온건개화파로 분류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굳이 어윤중이라는 인물을 어떠한 분류에 속하도록 만들어야만 할까. 물론 어떠한 사상적 접점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어떠한 실천을 함께 했다면 그 부류는 특정한 분파로 묶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어윤중처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약소국 조선에서 기존의 전통 체제를 고려하는 가운데 시세의 변동과 현실적 여건을 늘 염두에 두면서 민과 소통하고 개혁을 실천하려 했던 관료마저도 그러한 도식에 포함시켜야 할 무조건적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이렇듯 어윤중뿐 아니라 여태 온건과 급진, 수구와 개화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갇혀버린 개항기 당시의 인문들이 더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비록 지금은 어윤중 한 명에 그쳤지만 훗날 좀더 나름대로 찾아보아 어윤중과 같은 근대의 경계인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