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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僞善)이라는 단어의 뜻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착한 체'다. 예시까지도 들 수 있을 것이고, 개중에는 실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허울 좋은 공약들을 내건 정치인들, 겉으로는 희망을 설파하지만 뒤에서는 잇속을 챙기기 바쁜 타락한 종교인들...... 하여튼, 우리의 삶 속에서 위선이라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표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가장 가까운 표현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위악(僞惡)은 어떤가? 이번에도 단어의 뜻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체'다. 그렇지만 위선이라는 표현에 비하면 훨씬 느리게 답이 나올 것이며, 적어도 나는 보편적인 측면에서 위악이라는 표현이 위선이라는 표현보다 훨씬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다. 왜일까? 거짓말이란 사람들이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내뱉는 것들이고 그런 맥락에서 위선과 위악은 형제나 다름이 없건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가면을 쓸 때 나쁜 체보다는 착한 체를 훨씬 많이 하기 때문이다. 나쁜 체를 하면 대체로 손해가 돌아오기 마련이고 착한 체를 하면 대체로 이익이나, 하다 못해 중간은 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럴까? '착한 체를 하면 대체로 이익이나 중간은 간다'나, '나쁜 체를 하면 대체로 손해가 돌아온다'는 우리 사회의 명제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사고를 학습시켰나? 더 나아가서, 왜 가면을 쓰는가?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우리가 가면을 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일러준다. 우리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가면을 쓰기도 쓴다는 사실을.
은희경의 소설은 칙칙한 회색을 밑바탕으로 깔고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명제 하나를 부정하거나 명제의 이면을 폭로한다. 이번엔 뭘 부정했냐고? 나는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은희경은 낭만적 가치의 표상인 사랑이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갖는 휘발성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사랑은 낭만적 가치다─를 따르는 이들이든 부정하는 이들이든 살아가는 이들 중 대다수는 그러한 명제에 마음이 묶인 채 살아간다고 말한다. 명제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낙관주의자와 염세주의자도,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도. 혹여 은희경은 독자 여러분께서 이게 무슨 소리인지 깨닫지 못할까봐 친절하게 마음이 묶인 사람들의 태도와 묶이지 않은 사람들의 태도를 작품 속에서 대비시켜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요셉이라는 냉소적인 화자를 통해서 패턴과 이데올로기의 세계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왜 가면을 쓰는지, 그리고 가면이 가진 함의가 무엇인지도 가르쳐준다.
친사회적 이데올로기, 이른바 패턴으로 칭해지는 사회의 구조를 거부함으로써 개인의 고유성을 수호하려는 요셉은 언뜻 보면 완전한 존재로 보인다. 두 주인공 중 '현재'를 담당하여 전개를 이끄는 역할을 맡은 점에서 그런 시각은 더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셉의 방종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이따금씩 드러나는 요셉의 내면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 한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셉은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패턴의 세계, 즉 사회를 향해 냉소를 던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단지 이런 태도를 유지해나갈 뿐 속으로는 은연중에 저 패턴 속의 가치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낭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안의 속물적인 이면과 낭만적 가치에 조소하는 요셉의 매혹에 빠진 이면을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의 주제에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제를 나타내는 인물은 또 다른 주인공인 류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어릴 적 류는 부모님의 관계의 시작과 파국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찰나의 매혹에 빠져 어머니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았지만 결혼 생활이 시작된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식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매혹이 끝난 뒤의 이야기, 이미지가 완결된 뒤의 세계에 속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패턴의 세계'에 들어선 사람이었기에 이미지가 완결된 뒤의 이야기를 꾸려나갔다. 이미지의 완결 이후의 이야기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으로 녹아듦을 의미했고, 누군가는 그럴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그래야만 했다. 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보았고 그녀의 삶은 어머니의 삶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류는 어렴풋이 그 삶 속에서 겪은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매혹 덕분이었음을 느낀다. 사랑이 끝난 관계를 홀로 지탱했던(패턴의 세계에 속할 수 있었던) 류의 어머니와는 달리 류는 이미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고, 사랑이 매혹에 의해 불붙으며 또한 불이 꺼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매혹에 빠진 이들, 패턴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는 류의 아버지의 류는 단독자이며 이들은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다.
때문에 요셉의 시점에서는 주로 고통이, 류의 시점에서는 주로 고독이 나타난다. 요셉은 수많은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현재의 이야기를 이끄는 축을 맡지만 정작 그의 줄거리는 '류를 찾아가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한다.'일 뿐이다. 그는 고독하진 않지만 고통스럽다. 류는 과거의 이야기를 맡고 그 어떤 인물과의 상호작용도 없다시피하며, 요셉과는 반대로 류의 줄거리는 누구에게도 이끌리지 않는다. 때문에 류의 줄거리 속에서 그와 마음을 나누는 인물은 없다. 류는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고독하다. 다만, 요셉은 이런 어둠 속에서 노래할 수 없고(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류는 노래할 수 있다(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그런 연민 속에서 류는 평화를 얻고 자신의 고독을 받아들였다.
요셉과 류는 서로 사랑에 빠졌지만 결말에서 보이듯 류는 사랑의 종말을 인정하고 더 이상 사랑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요셉은 류와 헤어진 지 오래 지난 현재 시점까지도 류를 찾아 헤매며 사랑에 빠졌던 과거 속에 갇힌 채 살아간다. 사랑이 끝난 뒤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뒤섞일 수밖에 없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의 온갖 이데올로기를 비웃는 요셉이야말로 그러한 결말을 누구보다 원하고 있던 것이다. 이는 요셉의 사고가 단순히 개인적 고유성을 사수하기 위해 빚어진 태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끝난 사랑에 매달리는 인물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위해' 탄생한 방어기제이기도 함을 암시한다. 작품의 말미에서 적힌 류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고, 요셉은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는 문장은 아마도 이런 요셉의, 아니, 우리의 씁쓸한 비밀을 말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개추
굉장히 좀… 푸석하네… 잘 읽었어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