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윤형, 26일 동안의 광복, 서해문집, 2020.
아마 역사교육과에 진학을 했으니 내 또래 사람들의 평균보다는 역사에 관심이 있고 역사 사실에 알량한 지식이 있다고 보아도 딴지를 걸 사람을 적을 것이다. 그런데 난 소위 얘기들하는 역사덕후, ‘역덕’과는 거리가 멀다. 내 역사 지식은 순전히 대한민국 공교육 커리큘럼에 근거한 것으로 역덕들처럼 특정 시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한 책이나 논문을 읽은 적은 드물다. 스물한 살 때까지는 책 자체랑 거리가 멀었고 이후 입대하고 나서야 그때그때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을 읽어나갔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 어디에서 역사를 좋아한다고 얘기를 선뜻 꺼내길 힘들다. 이런 내가 역사교육과에 입학해 근근이 학교 수업이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히 학교 역사 선생님들의 수업 덕분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수업에 나오지 않거나 수업 자체를 하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일자무식이라는 뜻이다. 이 책, 《26일 동안의 광복》이 다루는 채 한 달이 안 되는 이 기간이 그랬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한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국이 경성(서울)에 진주하는 9월 9일까지의 26일을 그려냈다. 그렇다 해서 책은 그 26일이라는 기간에만 국한되지도, 한반도라는 장소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책의 중점은 한반도에서의 26일이지만 저자는 중점이 되는 내용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전과 이후, 일본과 미국, 중국까지 훑는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라는 본업이 있는 저자가 참고문헌 목록에 있는 90여 권이 넘는 한미일의 단행본과 60여 개가 넘는 한일의 논문을 통해 각 인물마다 상반되는 이야기들을 대조하며 써 내려간 내용을 읽다 보면 제아무리 글품을 짜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저자의 고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 ‘24시간의 삼파전’은 해방 당일의 24시간을 낱낱이 파헤친다. 여기서 삼파전의 주체는 좌파의 여운형, 우파의 송진우 그리고 조선총독부다. 해방의 날에 좌우의 두 거두가 보여주는 입장 차이와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 소련군의 남하 소식에 결국 여운형에게 치안 등의 협력을 요청하는 총독부 내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삼파전은 매끄럽게 읽히면서 자연스럽게 다음에 벌어질 역사적 사실들을 향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2부 ‘민족의 구심력 vs 좌우의 원심력’은 해방 다음 날부터 벌어지는 좌우합작의 노력과 함께 좌우의 알력 다툼에 대해 다룬다. 여운형이 총독부와의 협력을 통해 해방 당일부터 주도권을 잡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좌우합작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건준에서 우파 세력이 제외되고 박헌영을 위시한 재건파 공산당 세력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하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0일 부인된다. 이보다 훨씬 많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좌우합작의 결렬 과정을 넘기다 보니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파 자본가-민족주의자들과 자신의 오물까지 먹어치울 정도의 옥고를 치루며 변절하지 않은 박헌영 등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합작은 민족의 건국이라는 대의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민족의 건국은 미국에 의해 그어진 38선에 각기 자리한 조선민주주의공화국과 대한민국으로 분단되어 치러진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현재 한국에서의 보수진보 대립의 근원이 이 26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하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조선의 독립은 연합국의 승리에 따른 결과라는 ‘해방의 국제성’을 받아들여 미군정 하에서 미국에 협력하면서 남쪽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바로 세계정세의 냉정한 파악과 그에 걸맞는 외교정책을 펼쳐야 하며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오늘날 보수의 근원이다. 반면 조선의 해방이 연합국에 의해 이뤄진 것은 맞지만, 조선인도 적잖은 피를 흘리며 해방에 기여했다는 ‘해방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했던 이들이 바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끼리’ 주체적 노력을 통해 우리 운명을 우리 힘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오늘날 진보의 근원이다. 이러한 저자의 가설을 접하고 나니 왜 반공주의자이자 우파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가 소위 진보로 불리는 이들에게 신성시되는지 알겠다. 다른 무엇보다 보수의 이승만에 비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백범이 분단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에 진심이었다는 점이 이 민족주의적 진보들에게 중요했구나 싶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실패했던 해방의 그날은 한반도의 ‘가장 짧은 하루’였던 동시에 이후 75년간 이어지는 고통이 시작된 ‘가장 긴 하루’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영화 혹은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앞으로의 국가 향방을 논하기보다 훨씬 연관성이 깊은 이 26일의 기간으로부터 한국의 미래를 고민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소련의 경성 점령을 철석같이 믿고 레닌이 자신에게 막대한 금액의 금괴를 건넨 20년대의 소련을 기대한 여운형에게서는 세계정세의 냉정한 파악과 그에 따른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 직전에 해방되어 결국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서는 주체성의 중요함을, 그리고 좌우합작의 결렬에 따른 분단과 이어지는 내전의 참극에서는 국운이 달린 사안에서의 협력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긴 방구석 백수인 내가 이거 읽고 이런 생각하면 뭐하나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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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정닉 추천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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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서 45~50년까지의 해방기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보통 임정의 김구, 건준의 여운형, 공산당의 박헌영, 우파의 이승만. 이렇게 4파전으로 구분하더라.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광복 후 26일만 딱 집어서 보는 것도 재밌겠넹
2021.01.14 11:51
근데 님 이거 며칠까지 진행할거임? 벌써 14권이네 ㄷㄷ -
상당히 재밌음. 저자가 미국 자료나 일본 자료도 조사해서 볼 거리가 매우 자세하고 풍성함.
2021.01.14 11:57 -
음,,, 언제까지 진행할 지는 모르겠는데 기왕 한 거 올해 끝까지 한번 가 보는게 목표긴 함 ㅇㅇ 정 힘들면 몇 번은 굳이 길게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읽고 독후감 안 쓴 책은 쌓여있어서 다시 한 번 쓰윽 읽어보고 몇 줄 적는 건 어렵지 않으니...
2021.01.14 11:59 -
365권 ㄷㄷ 응원하겠음
2021.01.14 12:07 -
김구 선생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함. 공산당이라면 테러를 밥먹듯 할만큼 혐오하는 양반이 나라가 두동강날 상황이 되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며 공산당 수괴를 만나러 삼팔선을 건너고.. 그러기가 쉽지 않은건데... 그러다 결국 본인 말대로 삼팔선을 베고 쓰러짐....
2021.01.14 12:43
이글 보니까 한국 현대사에 관심 많던 학생시절 생각나네 잘 읽었어.
한국 근현대사에서 45~50년까지의 해방기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보통 임정의 김구, 건준의 여운형, 공산당의 박헌영, 우파의 이승만. 이렇게 4파전으로 구분하더라.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광복 후 26일만 딱 집어서 보는 것도 재밌겠넹 근데 님 이거 며칠까지 진행할거임? 벌써 14권이네 ㄷㄷ
상당히 재밌음. 저자가 미국 자료나 일본 자료도 조사해서 볼 거리가 매우 자세하고 풍성함.
음,,, 언제까지 진행할 지는 모르겠는데 기왕 한 거 올해 끝까지 한번 가 보는게 목표긴 함 ㅇㅇ 정 힘들면 몇 번은 굳이 길게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읽고 독후감 안 쓴 책은 쌓여있어서 다시 한 번 쓰윽 읽어보고 몇 줄 적는 건 어렵지 않으니...
365권 ㄷㄷ 응원하겠음
김구 선생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함. 공산당이라면 테러를 밥먹듯 할만큼 혐오하는 양반이 나라가 두동강날 상황이 되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며 공산당 수괴를 만나러 삼팔선을 건너고.. 그러기가 쉽지 않은건데... 그러다 결국 본인 말대로 삼팔선을 베고 쓰러짐.... 이글 보니까 한국 현대사에 관심 많던 학생시절 생각나네 잘 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