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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서 올릴까 하다가 자르기에는 분량이 짧은 거 같기도 하고 애매해서 그냥 올림. 자그마치 나흘이나 붙잡고 있었다...
https://brunch.co.kr/@ennui/17 이건 내 브런치 주소인데 편하게 읽으려면 여기서 봐도 되고(구독이나 좋아요 해주면 더 고맙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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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위대한 소설이 우리에게 감추지 않는 것
Q. 소설 《롤리타》에 대한 다음의 대화를 읽고 올바른 것을 고르시오.
①영희: (분을 삭이면서) 《롤리타》는 비윤리적인 소설이야. 험버트가 하는 말은 순 변명뿐이고, 작가는 갖가지 미사여구와 영양가 없는 말장난을 험버트의 자기변호 및 자기 연민과 뒤죽박죽 섞어서 소아 성애자의 역겨운 욕망을 애써 미화하고 있어.
②철수: (가르치려는 듯이) 너 제대로 안 읽었구나? 오히려 작가는 페도필리아를 조소하고 절제 없는 욕망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려는 거야. 아무렴 편집자인 정신과 의사는 괜히 등장했으려고. 게다가 그렇게 욕망을 쫓던 험버트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를 보라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깨닫고 감옥에서 죽잖아.
③현우: 《롤리타》는 비윤리적인 소설이 맞는데, 그게 영희가 꼭 옳다는 건 아니야. 이 소설이 비윤리적이라면 그건 애초에 작가가 윤리적 가치 판단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야. 말하자면 ‘비윤리’가 아니라 ‘비 윤리’라고 할까? 나보코프의 관심사는 험버트의 금지된 욕망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것뿐이야. 쉴 틈 없는 언어유희와 밀도 높은 문장 들은 나보코프에게는 도구이자 목표인 셈이지. 덧붙이자면 소설의 ‘롤리타’는 나보코프의 개인사와도 떼어 놓을 수 없어. 《롤리타》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작가의 처지가 반영된 소설이야.
정답: ④답이 없다. (해석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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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은 이쯤에서 관두자.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명백한 오답은 가려낼 수 있다. 소설을 읽을 때에는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더구나 《롤리타》는 소재만 파격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듯하면서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치밀한 구조적 설계로 인해 한 번 읽고 덮어서는 소화하기 버거운 작품이 아닌가?
화려하고 선정적인 소설의 외견에 ‘눈길’을 뺏기고도 중심을 못 잡고 미끄러질 독자들—나보코프 따라 하기!—이 걱정되었던지 나보코프는 작품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세하지만 다소간 퉁명스러운 코멘트를 달았다. 코멘트는 독자에 대한 걱정보다는 역정으로 가득하다. 그는 소설을 교훈극으로 받아들인 존 레이 박사의 잠재적 고객들은 물론 텍스트 바깥의 정보와 이론에 텍스트를 끼워 맞추려는 학자들에게도 불쾌감을 표한다. 《롤리타》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윤리적 비난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멍청한 소리라며 일축한다. 나보코프는 험버트 험버트가 아니며, 남몰래 끓어오르는 욕망을 정당화하고자 펜을 들지도 않았다.
작품은 때로—사실은 자주—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법이므로 독자는 작가의 주문에 잠자코 따를 의무는 없다. 그러나 《롤리타》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①영희와 ②철수의 해석이 핀트가 어긋난 오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소재와 주제는 서로 얽힐 수 있을지언정 같은 것은 아니다. 《롤리타》의 책장을 덮은 뒤에 새삼스레 페도필리아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정리하거나 타인에게 입장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내밀한 욕망은 교정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그 욕망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사회 규범을 바꾸는 것은 전연 다른 문제다. 독자 제현께서는 《롤리타》가 도덕 교과서가 아닌 소설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지 마시라.
틀린 선지를 지웠으니 소거법에 따라 남는 번호를 마킹… 하기 전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한번 곰곰이 따져 보자. 보기에 없는 정답이 또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일단 남은 것은 ③현우의 주장이다. (현우라는 이름은 물론 문학동네판 《롤리타》의 해설자이자 저명한 서평가인 로쟈 이현우 님께 빌린 것이다. 편의상 경어는 이하 생략하도록 하겠다.)
《롤리타》가 非 띄고, 윤리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우리도 이미 동의한 바. 언어를 떡 주무르듯 구사하는 나보코프의 센스가 유감없이 발휘된, 언어예술로서 소설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걸작이라는 점도 반박하려야 반박할 수가 없다. 이현우도, 나보코프 본인도 주장하듯이 《롤리타》의 본령은 금지된 욕망에서 길어 올린 심미적 희열, 요컨대 시적인 에로티시즘(poerotic)에 있다.
이현우는 이에 더해 《롤리타》를 나보코프의 생애와 엮으려 시도한다. ‘롤리타’가 ‘잃어버린 시간’의 은유라는 것이다. 1부 5장에서 험버트는 자신의 페도필리아 성향을 털어놓고 그의 욕망을 일으키는 소녀들을 특별히 ‘님펫’으로 분류하는데, 이현우는 여기서 님펫의 자격이 9세부터 14세까지의 소녀로 제한된다는 것에 주목한다. 험버트의 욕망이 단지 ‘설명하기 어려운 몇 가지 요소를 갖춘 미숙한 여자아이’를 향한 것이라면, 굳이 나이 제한을 둘 연유는 없다. 몇 살이나 먹었건 간에 매력적인 요소들만 고루 갖추면 될 테니까. 그러나 험버트(나보코프)는 “그때그때의 현상이 지배하는 공간적 세계”가 아닌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 노니는 특정 나이대의 소녀를 콕 집어 호명한다. 이는 험버트의 유년기를 충만하게 채웠다가 미처 이별을 준비하기도 전에 돌연 사라져 버린, 열두 살 소녀 ‘애너벨 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느 여름날 첫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17p)는 험버트의 고백에서는 유년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나 자신의 창조물, 어쩌면 롤리타보다 생생한 롤리타”(101p)에서는 상실된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읽어 내는 이현우의 독법은 모두 이러한 시간적 제약에 근거한다.
험버트의 롤리타에서 나아가 이현우는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추적하려 한다. 유복했던 유년기를 뒤로 하고 비참한 망명길에 올라 평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나보코프의 생애에서 ‘또 다른 롤리타’를 감지한 것이다. ‘롤리타’는 금지된 사랑의 열병일 뿐만 아니라 험버트와 나보코프의 잃어버린 시간이며, 향수라는 것이 이현우의 주장이다. 그는 《롤리타》를 작가의 단독적 비극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한 결과물이라고 평가한다.(524p)
그러나 이현우의 주장은 곧바로 매서운 도전과 겨뤄야만 한다. 비판을 제기할 이는 다름 아닌 작가 나보코프다. 작가의 말에서 나보코프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던가? 비단 《롤리타》에서뿐만 아니라, 나보코프는 본디 작가와 작품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과 작가를 무 자르듯 나눌 순 없다. 작품에는 불가피하게 작가가 반영된다. 게다가 우리는 벌써 독자가 작가의 거수기가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원저자가 부인한다고 해서 그럴듯한 해석을 물리친다면 손해를 보는 것은 독자다. 텍스트의 안팎을 요모조모 뜯어본 뒤에도 기각할 수 없는 해석이라면 한사코 외면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이를 뒤집으면 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롤리타를 나보코프의 향수로 읽으려면 그만큼 면밀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뜻도 된다.
놀랍게도 이현우는 나보코프가 자신과 《롤리타》를 분리해 주기를 요청했던 장소인 ‘작가의 말’에서 되레 돌파구를 찾는다. 머리말에서 ‘존 레이’를 연기하며 독자들을 속아 넘겼던 나보코프가, 작가의 말에서는 자기 자신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현우는 “맨얼굴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가면”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평소 작가/작품 분리론의 지지자였던 나보코프가 구태여 작가의 말을 덧붙인 것은, 롤리타(유년기)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진의를 감추고 그 흔적을 소설에서 애써 지우기 위한 ‘트릭의 트릭’이 된다.
그럴듯한 해석이지만 나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롤리타》 초판본에는 작가의 말이 없다. 나보코프의 등장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 아니라 소설이 원체 논쟁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추가된 작가의 변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롤리타》를 험버트에 대한 작가의 옹호로 읽는지, 또 이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보코프를 들볶았겠는지 생각해 보라.) “어쩌면 이러한 자전적 장치 때문에 독자들이 작가와 등장인물을 혼동할 수도 있겠다”는 나보코프의 말은 그의 평소 지론에 비추어볼 때 속임수라기보다는 너무 과한 의미 부여에 대한 염려로 읽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시간과 노스탤지어에 대한 이현우의 해석도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9세부터 14세까지’라는 님펫의 기간 제한은 그다지 엄밀한 것 같지는 않다. 험버트는 모니크의 나이를 대강 열예닐곱쯤으로 추측하면서도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더구나 그는 아버지와 자신을 길러준 이모, 세 살 때 여읜 어머니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상이나 그리움을 품고 있지 않으며, 그의 유년기에 가장 강렬한 기억인 해변에서의 정사를 롤리타와 재현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해변에서 험버트는 롤리타를 “바다소 보듯” 한다.(264p) 이 밖에도 나보코프는 롤리타와의 첫 만남에서 “나의 롤리타는 애너벨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65p)라거나 “나는 벌써 오래전에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다”라는 둥 롤리타가 단순히 상실된 시간의 환생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한다. 물론 이는 《롤리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비평을 원천 차단하려는 장치일 테지만, 이현우의 주장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애써 반박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감상법의 옳고 그름을 논할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이현우의 해석에 대한 나의 지적은—오답이 아닌 모든 해석이 그러하듯—검증할 수 없는 것이며, 반증되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나는 이현우의 해석이 얼마간의 의구점에도 불구하고 《롤리타》를 읽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코프 본인도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는지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무의식적으로 본인을 투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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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방향을 좀 바꿔 보자. 나보코프는 상징과 비유를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말했지마는, 작가 자신과 예술을 풍부하게 감상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상징과 비유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험버트가 뻑뻑한 콜트를 친구라 부르고, 롤리타를 빛이요, 몸에 붙은 불이요, 죄이자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쁜 것은 상징과 비유가 아니라, 길을 잃게 만드는 나쁜 상징과 나쁜 해석이다.
고로, 의미에 목마른 독자라면 메타포와 알레고리의 바다로 나가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닷물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듯이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 해석은 말짱 도루묵이다. (참고로 도루묵은 바닷물고기다.) 무수한 해석을 낳는 메타포와 알레고리가 바다라면, 텍스트는 돛과 든든한 선체, 나침반이다. 텍스트에서 근거를 찾고 그 적실성을 검증하는 작업은 해석의 구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멀리 돌아 다시 ‘롤리타’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롤리타의 의미와 상징,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 그리고 작가 나보코프의 관계 등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언제나 과잉 해석—예를 들면 《롤리타》를 유럽과 미국에 대한 우화로 읽는다든지 하는—을 경계한 작가의 당부는 당부대로 주의하되, 텍스트 안팎에 흩어진 진주알들을 꿰어 그럴싸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자.
언어예술로서 《롤리타》의 가치는 아까 언급하기도 했고 일부러 부연하지는 않겠다. 취향에 안 맞을 수는 있어도 《롤리타》가 시적인 표현과 말맛을 살린 유머, 정갈하고도 도발적인 문장과 관능적인 묘사로 채워진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롤리타》가 지니는 서사예술로서의 가치, 소설의 이야기와 형식이 자아내는 마력에 대한 분석은 아무래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앞의 문장에서 매력 대신 마력이란 단어를 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읽기에 《롤리타》는 마법적인 소설, 또는 마법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도취의 순간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당신은 ‘마법에 걸린 사냥꾼’(The Enchanted Hunter)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설 안의 장소이자 가상의 희곡인 ‘마법에 걸린 사냥꾼’은 이야기의 흐름상 중요한 역할을 맡을 뿐만 아니라, 험버트 험버트, 퀼티, 롤리타, 심지어는 나보코프의 마법에 홀린 독자에 이르기까지 텍스트 안팎의 여러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은근히 환기하는 중요한 메타포이다.
이를테면 험버트에게 ‘롤리타’는 마법의 주문이나 사랑의 미약이 아닐까? 일상을 부수고 틈입하는 초월적인 순간,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세이렌의 노래라면? 느닷없이 솟구치는 순수하고 황홀한 기쁨은 광기와 구분할 수 없다. 마법에 걸린 행위자는 의지와 의무의 영역을—"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마저” 뛰어넘어,(98p) 아무런 계산 없이 행위 자체로 뛰어든다. 험버트 험버트는 병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정신 착란증 환자다. 우리는 이들을—그리고 우리를—홀리는 이 마법의 정체에 주목해야 한다.
1) 험버트 험버트와 클레어 퀼티
누구라도 눈치챘을 테지만 퀼티Quilty는 guilty(유죄의)라는 형용사에 구체적 형상을 씌워 만들어낸 상징적 인물이며, 험버트 험버트와 거울상 관계를 이룬다. 딱히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먹어 치워야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원죄를 지니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험버트는 원래부터 유죄Guilty이지만 그 죄는 아직 형태를 부여받지 못한 채로 잠재되어 있다. (퀼티는 초반부터 계속 언급된다.) 그러나 캠프Q에서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데려오는 그때에 죄는 구체적 형상Q+uilty을 띠고 험버트의 앞에 나타난다.
퀼티와 험버트는 죄를 공유한다. 죄목은 사춘기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를 기망하고, 쾌락과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 그녀의 운명에 어두운 흉터를 남긴 것, 그 흉터를 외면하거나 망각되도록 놔둔 것일 테다.
퀼티는 독자로 하여금 험버트의 죄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롤리타가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가 아닌, 그의 분신이자 안타고니스트인 퀼티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퀼티를 응징하려고 하지만, 기실 그가 응징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험버트는 롤리타에게서 누구도 보지 못하는 매력을 포착하고, 누구보다 열렬하게 그녀를 숭배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아빠는커녕 애인이 되는 것마저 실패한다. 험버트의 실패는 오롯이 그 자신의 책임이다. 그는 오로지 돌로레스의 육체와 도발적인 천박함으로 이뤄진 가상의 ‘롤리타’를 손에 넣는 것에만 흥미가 있는 무책임한 탐미주의자니까. 열두 살에 멈춰 성장하지 않은 험버트는 오직 자신만 있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살며, 그가 사랑한 것은 실제의 소녀 돌로레스가 아닌 상상 속에서 재구성한 롤리타이다.
아름다움과 예술, 사랑과 노스탤지어의 메타포인 ‘롤리타’는 사냥꾼의 심장을 마법처럼 잠식하고, 뇌를 마비시킨다. ‘마법에 걸린 사냥꾼’은 롤리타의 마력을 거부할 수 없다. 도취적이고 도착적인 이 현상은 “믿기 어렵겠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186p), 험버트의 소망은 “섹스가 아니라 그 위험천만한 마력을 영원히 붙잡아두는 것”(213p)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sex은 예술의 시녀”(411p)라는 험버트의 대사는 롤리타가 지닌 신비의 정체를 보다 또렷하게 보여준다. 험버트에게 롤리타는 이미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예술이다.
물론 험버트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 환희의 순간은 순간일 뿐이고, 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2) 롤리타와 퀼티
롤리타는 어째서 퀼티를 사랑하는가? 험버트는 퀼티로 인해 죄악을 인지하지만, 퀼티는 되레 롤리타를 망각하고 지워 버린다. 험버트는 거울을 통해 퀼티를 보지만, 퀼티는 험버트를 볼 수 없다. 그는 단지 ‘마법에 걸린 사냥꾼을 쫓는 마법에 걸린 사냥꾼’이 되어 하염없이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다. 무책임한 탐미주의자 험버트보다도 타락한 탐미주의자가 바로 퀼티다.
그러나 그럼에도 롤리타는 발군의 심미안을 지닌 험버트가 아닌 퀼티를 사랑한다. 왜일까? 이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은 불가능하다. 애초부터 비논리적인 일이므로. 험버트가 걸렸던 마법의 덫에 롤리타도 걸렸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퀼티는 스스로를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으로 여길 테지만, 실은 그 또한 나보코프가 부린 마법에 걸린 한낱 피조물일 뿐이다. 또한 자신이 쫓던 험버트에게 쫓기는 사냥감이기도 하다. (퀼티에 대한 험버트의 살의 역시 마법의 다른 이름인 광기에 의한 것이다. 험버트의 퀼티 살해는 롤리타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숙명이다. 롤리타는 험버트의 손에 퀼티가 죽기를 바란 적이 없다. 퀼티를 죽이고 험버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작가 나보코프다.)
3) 예술과 예술가
《롤리타》의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나는 로가 테니스를 치는 장면을 꼽겠다. (나보코프도 이 대목을 소중한 부분 중 하나로 언급했다.) 롤리타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다. 웃음을 잃어 버린 롤리타를 웃게 하는 것은 테니스의 즐거움이 주는 순수한 희열이다. 롤리타는 아름답고 우아한 폼과 몸짓으로 이 순수한 기쁨을 체현하고, 험버트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희열한다.
더없이 황홀한 장면이다. 아마 소설의 주인인 나보코프나 주인공인 험버트는 일개 독자인 나보다 수십, 수백 배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 테다. 이 장면이야말로 《롤리타》가 눈 깜짝할 새에 도망가 버리지만 순간이나마 완벽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 하는 예술가의 딜레마를 그린 알레고리라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리라.
결론적으로 나는 《롤리타》가 아름다움을 게걸스레 핥아 먹으려는 예술가의 광기를 아주 잘 표현한 소설이며, 따라서 롤리타를 예술의 알레고리로 읽으려는 시도는 여타의 것보다 더욱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한없이 긍정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롤리타》는 과한 수사적 액세서리로 치장한 고급 통속소설에 그쳤을 것이다. 《롤리타》가 위대한 작품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험버트의 추한 민낯과 그가 치르게 되는 대가를 통렬하면서도 비통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윤리고 뭐고, 오로지 심미적 희열을 위해 글을 썼다는 나보코프의 작의와는 달리 《롤리타》는 인물들의 인생에 새겨진 아픔과 슬픔에도 진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러한 결론은 앞서 《롤리타》가 ‘비 윤리적’인 작품이라는 우리의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나보코프에게 윤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괜한 위악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보코프는 예술과 아름다움만을 추구했다. 《롤리타》가 윤리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철저하게 아름다움에 탐닉한 결과이며, 두어 줄짜리 교훈으로 요약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이토록 숙고를 요하는 힘겨운 작업이다.
서술자 험버트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214p)고 술회한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죄악을 가르는 경계 같은 것은 원래 없다. 그 구분은 모두 자의적인 논리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정해진 것뿐이다. 누구도 그 완벽한 경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죄악에 잡아 먹힌 인간에게 어떠한 계기가 도래할 때, 간접적으로만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술과 사랑은 광기의 자식이고, 죄악은 부녀간의 근친이 낳은 사생아다. 이 소설이 윤리적인 작품이 아닌 까닭은, 롤리타를 상실한 험버트가 님펫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하듯 죄를 인정한 서술자 험버트가 다시 주인공 험버트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롤리타》에는 속죄가 없다. 광기는 처음과 똑같이 험버트를 잠식할 것이고, 아마 험버트는 처음보다 능숙하고 편안하게 다시 죄를 저지를 테다. 깨달은 자조차 벗어날 수 없는, 이 아이러니와 모순의 갈림길이 곧 인생이며, 위대한 예술작품은 이를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대상화하는 존재며, 험버트는 우리와 다른 외계인이 아니다. 그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악인 것을 아는 악은 악인 것을 모르는 악보다 덜 끔찍하고 치유에 가까이 있다”고 일찍이 보들레르는 말했다. 만일 소설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이 죄의 기록인 덕택일 것이다.
그러므로 《롤리타》의 윤리적 가능성은 차라리 서사예술이자 언어예술인 소설의 총체적미학적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소설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소설인가? 조심스럽지만 용기 있게, ‘언어로 진실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 소설이다. 이게 당신이 소설을, 그리고 《롤리타》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사실은 나보코프의 창작인) 옛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450p)
세금을 내는 것이 두려워 삶을 즐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도 기꺼이 ‘마법에 걸린 사냥꾼’이 되어 달아나는 아름다움을 뒤쫓자.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술이 없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다만 한줌의 사무치는 양심을 지키려 간절히 노력하는 수밖에.
댓글 달아줘서 고마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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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갈아 넣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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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내 감상문에선 '유년기의 환상'이라 단정했었지만, 사실 난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음. 험버트가 임신한 롤리타에게 함께 가자고 애원하는 부분에서, 롤리타를 단순한 상징으로 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임. 다만 그렇게 되면 롤리타가 짊어지고 있는 커다란 상징성을 어떻게 봐야하나... 이게 큰 난제인 듯.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통해 예술적 불멸을 노리는 것은 명백한데, 그러면 '롤리타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끝도 없이 제기됨. 유년기의 환상일 수도 있고, 문학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단 하나의 신비로움일 수도 있고. 결국 나보코프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혼란스러워하기를 바랬을지도. 여튼 잘 읽었음. 개추
고정된 게 없다는 게 소설의 미덕인 듯. 롤리타는 진짜 생각할 거리 많은 좋은 작품이더라ㅋㅋ 이틀에 한 권 읽기 새해 목표로 실천 중이었는데 이걸로 머리 싸매느라 실패함ㅜㅜ
너 말마따나 임신하고 늙은 롤리타에 대해 변치 않는 사랑이 이 소설에서 또 중요한 부분인 듯. 그 장면 맘에 들었음
ㅇㅇ 나도 그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봤어서...
난 그래도 테니스 치는 장면이 너무 좋더라. 별거 없고 어떻게 보면 전혀 강렬한 장면이 아닌데 거기만 기억이 나
아 그 장면도 좋아함 ㅋㅋ 사실 롤리타가 정말 명장면이 많긴 해. 초반의 애너벨 장면이나 총싸움 하는 슬랩스틱 장면, 마지막 장면도 좋고...
글 진짜 잘 쓰더라 나보코프. 간만에 확 와닿는 소설이었음. 2부 초반엔 드르렁했지만
언젠가 롤리타가 책장에 꽂혀있어도 당당한 날이 오길 바란다. 나는 쫄보라서 아직 못 꽂아놓을 것 같아 흑흑
리커버판 예쁘니까 당당하게 장만해 놓으라구~
진짜 너무 좋은 글이네요. 롤리타의 주제 의식과 스토리를 비롯한 여러 장면이 적잖이 나보코프스럽게도 희미하고 쉽게 잡히지 않는 소설이지만, 님의 정성스러운 서평이 롤리타라는 난해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는 롤리타를 단순히 나보코프 문학관의 알레고리로 해석했는데 서평을 읽어보니 그 이상 혹은 이런 알레고리를 초월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덕분에 롤리타를 재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떠오릅니다. 잘 읽었고 훌륭한 글, 감사드립니다.
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움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고마워요 - dc App
재밌게 읽었습니당 ㅋㅋ
감사합니다 - dc App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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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ㅋ천천히 피드백 줘도 됨. 이런 종류의 서평은 내 생각을 반영하되 내 이야기가 들어가지는 않아도 무방한 글인데, 네가 지금 쓰려는 글은 그 특성상 이야기가 필요하고, 네가 그 부분에서 갈증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네. 잘 해결하길 바람
개인적으로는 네가 특정될 만한 사항이 아니라면 독후감대회에서도 그랬듯이 이야기로 풀어가도 괜찮다 싶음. 뭐 그러다 보면 단순 독후감쓰기 팁을 얻고 싶은 갤러들한테는 아니꼬울 수도 있겠지만 네가 원하는 진정성 있는 독자도 있을 거임. 뭐 이런 부분은 네임밸류가 있는 작가가 아닌 이상 디씨에 글을 올리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보고... 개인적인 부분과 보편적인 부분의 비율을 잘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셈 치고 부담없이 써보면 어떨까 싶음.
소설만 읽었다가 최근에 영화를 재밌게봐서 찾아보다가 이글을 읽게됐는데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