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J.팔라시오, 원더, 책콩, 2017.
R.J.팔라시오의 소설 《원더》의 주인공은 선천적 안면기형을 지닌 10살 소년 어거스트다. 소설은 주인공 어거스트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인물들 각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풀어져 나간다. 그 중 가장 내게 와닿은 인물은 주인공의 누나, 올리비아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퉁퉁 부어 붕대로 둘둘 감아 놓은 그 조그만 얼굴, 생명이 꺼질세라 작은 몸에 꽂아 놓은 온갖 링거 바늘과 튜브들'을 수없이 보았다. "사달라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거나 엄마가 학교 연극에 오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게 오히려 미친 짓"이란 걸 여섯 살 때 깨달았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그녀보다 동생에 신경을 쓴다. 그녀는 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은하계의 움직임에 익숙"하다.
은하계의 변화는 그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찾아온다. 그녀의 학교는 사는 동네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무도 그녀의 동생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누나가 아닌 자신 스스로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한다. 무언가 꺼림칙하지만 그것이 그닥 싫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연극행사를 가족에게 알리지 않는다. 만약 가족이, 특히 동생이 연극을 보러온다면 은하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테니.
이런 올리비아를 두고 단순히 나쁘다고 평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신체의 고통은 어떻게 측량화하여 그 순위를 매길 수도 있다지만 마음의 고통은 그럴 수 없다. 어거스트도 신체적 고통과 더불어 극심한 심적 고통을 받았지만 올리비아 역시 신체적 고통을 받지 않았을 뿐, 심적인 차원에서는 동생과 그리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아픔은 함부로 비교가 불가하다. 타인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올리비아의 행동이 옳다고도 할 수 없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아픔에 매몰된 나머지 동생의 아픔을 생각치 못하였다. 어거스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할 때 그가 느낄 감정은 얼마나 참혹할까.
올리비아가 이에 대해 아예 무심한건 아니다. 친구들에게, 애인에게 의식적으로 동생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 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모부와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동생에게 쏠리는 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그들을 원망하고 동생을 질투한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싫어서 괴로워한다. 아마 내가 올리비아에게 끌린 이유는 그녀와 내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적잖은 마음의 아픔이 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의 아픔에 눈이 멀어 타인들의 아픔에 얼마나 무감각하였는가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한 부끄러움도 잠시, 다시금 내게 힘든 시간이 찾아오면 그에 휩쓸려 나를 내 아픔에 가둔다. 그러다가도 조금 진정이 되고나면 다시 다른 이들의 아픔에 귀기울인다. 또 얼마안가 내 아픔에 집착한다. 그렇게 나는 나와 남들의 아픔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며 살아간다. 아마 완전히 벗어나기는 무리겠다.


소설 속 올리비아는 해피엔딩이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이 무한한 아픔의 세계에서 나를 지키면서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나아가면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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