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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이유
ㅅㅁㅅ씨가 진행하는 [책 읽어드립니다] 라는 프로그램이 방영중이다. 본 적은 없지만 부수적인 효과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데, 방영된 책이 기깔나는 양장본으로 재출판 된다는 점이다. 솔직히 이뻐서 샀다.
카뮈가 바라본 조경
‘페스트’라는 단어가 지금 막 최초로 언급되었다. 이 시점에서, 베르나르 리외가 창가에 서서 느끼고 있는 망설임과 놀라움에 대해 설명하려고 서술자가 끼어드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카뮈의 문체는 딱딱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푸석푸석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길 가다가 누가 총 맞아 죽어도, “총알 구멍은 깔끔히 뚫려 있어서, 파편을 찾아 끼워 넣을 수 있을 거 같다.” 라고 서술할 양반이다. 그런 카뮈가 페스트가 퍼진 도시를 그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카뮈가 아닌 작가였다면, 개개인의 슬픔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환자가 감염되어, 그간의 생활을 후회하고, 앞으로 남은 날들을 충실히 살자고 다짐하거나, 스크루지 같은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갑자기 주변사람에게 다정하게 굴다가 모두의 슬픔 속에 마지막 숨을 내뱉지만 끝에는 웃고 있었다는 게 내용이었을 것이다.
여름날에 마침 총을 갖고 있고, 날이 덥길래 사람 쏴죽이는 병신 같은 주인공을 창조해낸 작가답게, 보통의 작가들 보다는 더 멀리서, 도시 전체를 바라봤다. 결국 카뮈이기에, 페스트의 덫에 걸린 도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숨겨진 화자
게다가 서술자(적당한 때에 밝혀질 것이다)는, 우연히도 상당수의 진술을 직접 수집할 수 있고 또 서술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에 끼어들 수 있는 입장에 있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연대기를 쓸 자격을 갖지 못했으리라.
[페스트] 도입부에 카뮈는 화자를 숨긴다. 화자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1940년대,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페스트 사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할 것임을 다짐한다. 이를 통해 두가지를 발견해낼 수 있다. 첫째로, 화자가 누가 되었건, 그 인물은 ‘오랑시’ 안에서 거주했다. 독자는 그 인물이 끝까지 살아 남을 것인가, 어떻게 해서 살아 남았는 가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카뮈의 퍽퍽한 문체에 대한 방어수단이자, 농담으로 읽을 수 있다. 페스트라는 재앙에 대해 서술하는 작가로서, 사람에 대한 연민이 주를 이루지 않은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방어이기도 하며, 자신의 팬이라면 응당 알 만한 사실인, 작가의 시그니처인 퍽퍽한 문체에 대한 농담이기도 하다. 자신의 문체를 소설에 녹여내는 방식이 독특하고 창의적이었다.
차가운 글과 페스트
페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날들은 화려하고 잔인하며 거대한 화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정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뭉개 버리는 한없는 제자리걸음으로 기억되었다.
카뮈는 도입부에 서술했듯이, 화자를 객관적인 입장에 배치했기 때문에, 시민 개개인의 슬픔, 고통 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멀리서 바라본다. 국산 재난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과 친구 간의 사랑이나 우정은 엿 바꿔 먹었다는 듯이, 사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나열하는 경우는 없고, ‘어제보다 사망자 통계치가 500명 늘었다.’ 가 전부다.
놀라운 점은, 이 간극, 인류가 마주할 수 있는, 생물학적인 재앙의 최고치인 페스트라는 상황적 배경과, 작가의 차가운 문체가 만들어낸 간극이 독자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 간극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페스트의 잔인성에 대한 페이소스를 제공한다.
2번 읽은 거 같은 1회독
충실한 증인이 되기 위해, 증언은 주로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국한하고 서류(조서, 문헌, 소문 등)를 우선적으로 전했다.
작품의 말미에, 드디어 화자가 드러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 이전에 화자가 누군지 알아 맞추는 게 어렵진 않다. 그치만, 작가가 나서서 “얘가 걥니다.” 라고 확정을 짓고 나면 다르게 읽히는 게 당연하다. 코난을 보면서도 어 쟤가 범인같은데? 싶다가도, 진짜로 쟤가 범인이면 헐 진짜 쟤네 싶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서 그간 읽었던 문장들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게 된다. 조경으로 바라보던 시점이, 개인의 시점으로 옮겨지고, 3인칭으로 적혔던 인물들이 개인의 관계 속에서 재배열되면서, 감정을 배제하고 바라봤던 풍경들이, 개인이 생존해낸 현장이 된다.
불공평
“다른 사람들은 ‘페스트, 우리가 페스트를 이겨 냈어’라고 말하고 있겠네요. 그런 작자들은 조그만 일로 훈장을 달라고 할걸요. 허나 페스트라는 게 대체 뭐겠어요? 살다 보면 생기는 일일 뿐이죠.”
페스트는 감정적인 면에서 공평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페스트가 없던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은 페스트 안에서 친밀함을 찾았다. 닫힌 도시 안에서, 한정된 사람 속에서 친밀함을 찾아야 했던 시민들은 친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부대끼게 되었고, 그 결과로, 공허함을 느끼던 인물은 그 속에서 우정을 느꼈다. 페스트를 하나님이 내린 교훈으로 받아들인 신부는 페스트 근절을 위한 봉사를 쉬지 않으면서 이를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여겼다. 누군가는 이별을 겪었다. 도시가 닫혀 출입이 곤란해진 사람들은 도시 밖에 연인을 두고온 것을 후회하며, 도리어 더 큰 사랑을 느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밖과 소통하려고 애쓰는 한편, 페스트라는 공유할 수 없는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괴리감을 감추느라 애쓴다.
페스트는 생존이라는 점에서도 불공평했다. 누군가는 페스트가 기성을 부리던 시기에 기적과 같이 치유되지만, 누군가는 페스트가 끝나가는 시기에 끝끝내 죽고 만다. 페스트가 끝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과 재회하는 한편, 누군가는 페스트 속에서 떠나 보낸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다시 느낀다. 이런 감정과 생존이라는 불공평함을 그려내면서, 카뮈는 사람이 가진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찬양
사람들은 항상 다 똑같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힘이자 무고함이었고, 바로 여기에서 리외는 모든 슬픔을 넘어 자신이 그들과 하나라고 느꼈다.
화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고난을 이겨낸 시민들을 긍정한다. 어떤 일이 있었건, 페스트를 무엇이라고 해석하건, 그들은 페스트를 이겨냈고, 그 속에서 인류로서 잃어선 안될 것들을 지켜냈다. 그렇기에, ‘보통’이라고 하는, 흔한 인간의 특성을 화자는 ‘무고함’이라고 표현하며, 그들을 피해자의 편에 세우고 그들을 긍정하며 마무리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바 엔터좀 칠라그랬더니 디씨 바로 뻑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