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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학교 대회 제출용으로 박상륭 평론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죽한연 파트만 가져와 봄.

박상륭의 문학은 경전이 아닌 소설로서 평가 받아야 마땅하며, 무작정 박상륭의 관념을 극찬하기만 하는 평론가들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인데,

결과적으론 많이 아쉬운 평론이 돼버렸음. 박상륭 관련 글은 쓰고, 후회하고, 또 쓰고, 또 후회하고, 의 반복인 것 같다.

그나마 죽한연 파트는 나쁘지 않아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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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이 선보이는 악명 높은 잡설(雜說) 탓에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듯하지만, <죽음의 한 연구>는 작가 개인의 사무친 외로움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나는 종교나 정신분석의 측면에서 분석하기보단 작가의 개인사와 연관 지어 표현론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려 한다.

그의 문학에 큰 전환기가 있으니, 바로 69년의 캐나다 이민이다. 간호사 아내를 따라 캐나다로 거처를 옮겼고, 병원의 영안실에서 시체를 청소하는 일을 하며 <죽음의 한 연구>를 집필했다. 김주연 평론가의 회상에 따르면, 박상륭이 출국하기 전날 밤, 그의 절친인 박태순과 치고 박고 싸우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둘을 말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박태순은 “현재의 정치와 사회를 방임하고 캐나다로 도피하려는 꼴이 같잖다”며 박상륭을 매도했다. 박태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캐나다 행을 기점으로, 그의 문학은 더욱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죽음의 한 연구>는 ‘유리’라는 내면적 공간을 설정하여 현실과 격리된 곳에서 그의 사상을 자유롭게 집대성했다. 이처럼 그의 캐나다 이민은 <죽음의 한 연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 디아스포라적 징후들

<죽음의 한 연구>는 곳곳에서 외로움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꼭 작가의 감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박상륭 특유의 ‘잡설’이란 서술방식은 애당초 자신이 할 말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외로움의 징표를 포착하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탐구가 될 것이다.

먼저 육조(주인공은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지만, 육조 혜능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므로 육조라 지칭하도록 한다.)는 계속해서 자신이 떠돌이 중임을 강조한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주인공. 그것은 어떻게 보면 박상륭 자신의 투영이 아닐까? 일단 육조의 앞부분 행적을 정리해보며, 더 구체화시켜보도록 하자.

1) 창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2) 어떤 돌팔이 중을 따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3) 돌팔이 중(스승)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유리’란 곳에 40일 간 머물게 된다.
<유리장>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한 연구>에서도 친부 부재와 비정상적인 가족사가 드러난다. 이는 60년대 단편에서 보였던 ‘황폐한 대지’, ‘고향의 상실’에서 더 나아가, 애당초 정신적 기반으로 삼을 고향이 없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런 유년기의 한이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뾰죽한 손톱으로 내 배를 긁어 구멍을 내서는, 저 수백 년 자락지며 모아놓았던 여울, 저 수백 년 노래하며 못다 부른 곡조, 수백 년 출렁이며 아직도 못다 한 한, 그래서 엉긴, 조수의 앙금 맑음한 것을 집어넣는다. (상 140p)

내게 고향은 이미 없었다. 고향으로부터도 나는 개종해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 167p)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육조는 떠돌이 중과 함께 돌아다니며 문전걸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떠돌이 중은 육조에게 의붓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소심한 성격의 어린 육조는 아버지란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가족도 없고, 고향도 없다는 인식이 바로 육조의 출발점이다. 그 사무친 외로움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진다. 박상륭은 장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꼭 한번, 이 세상 너무도 많은, 아버지들 중의 하나의 음성으로, 자기의 제자를 늙은네께 부탁했었소. 그 늙은네(육조의 스승) 그래본 적이 없던, 대꼬챙이 같은 친구였댔소. 대사(육조)가 너무 외롭게 자라왔다고 했지. 대사의 젖은 그 외로움이었다고 했지.” (하 190p)

더 나아가, 아예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후반부의 육조는 캐나다에서 한국어를 쓸 수 없었던 박상륭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2. 끝없는 보편화의 여정

생각해보자. 친구나 지인들과 떨어지고, 먼 타국의 병원 시체실에서 글을 쓰는데, 무엇을 쓰겠는가? 평범한 일상의 얘기를 쓸 수 있겠는가? 박상륭에게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타자를 보편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결국 <죽음의 한 연구>는 끝없는 보편화의 여정이라 요약해볼 수 있다.

김현은 육조의 모친을 창녀로 설정한 것은 ‘특정인의 아내’가 아닌 ‘모든 남자의 보편적 요니(=여성성기)’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작품 속 등장하는 6번의 죽음도, 각기 다른 죽음이 아닌, 모두 하나의 죽음이다. 예를 들어, 육조는 자신의 스승이 죽었을 때, “어쨌든 내가 늙어 어느 녘에 죽었구나.”(24p)라 말한다. 그것은 스승과 자신이 다르지 않고, 스승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죽음의 보편화’를 설파하고 있다.

  또한, 김현은 <죽음의 한 연구>의 핵심을 ‘마른 늪에서 물고기 낚기’라 주장했다. 육조는 존자와 수도승을 살해한 죄로 ‘마른 늪에서 물고기 낚기’란 형벌을 받는다. 상식적으로 마른 늪에서 물고기가 나올 일은 없다. 결국 육조는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서 물고기를 창조해내야만 했다.

30p 가까이 계속되는 물고기 참선을 어떻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먼저 물고기 참선의 논리적 흐름을 살펴보자.

1) 물고기란 무엇인가? -> 물고기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형태는 하나이다. 물고기의 형태는 ‘양극을 갖는 타원형( () )’이라고 불리어질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2) 성경에서는 ‘사람’을 ‘물고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물고기는 물에 나오면 죽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물에 나오는 것을 ‘거듭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암시.

3) 소멸과 재생이 같이 일어나는 재출산의 공간은 성교 이외의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자궁은 물을, 남근은 물고기를 상징한다. 남근 역시 ‘양극을 갖는 타원형( () )’의 형태를 갖고 있다. -> 물고기 = 생명 = 남근

4) 사람을 포함한 모든 유정이 다 ‘양극을 갖는 타원형( () )’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 참선 속에서도 3개의 종교가 서로 뒤섞여 있다. 1번에서 ‘양극’은 주역을 참고한 것으로 예상되고, 2번은 대놓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3번은 탄트라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하권에서 장로 손녀와의 탄트라 섹스에서 더욱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내가 <죽음의 한 연구>가 경전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은, 이 참선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육조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종교가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김주연 평론가는 박상륭의 문학이 기독교를 지나치게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고기 하나에서 시작하여 모든 팔만 유정을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로 환원시키는 것. 그것이 박상륭이 머나먼 타향에서 착수한, 현실 세계와는 유리된 정신세계의 구축이다.

3. 영웅주의 서사가 갖는 효과와 한계

<죽음의 한 연구>는 이른바 영웅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작품 속에서 육조는 주위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수도녀를 겁탈했는데도 수도녀는 금세 육조와 사랑에 빠지고, 존자와 수도승을 살해했는데도 주위 사람에게 책망을 듣지 않고 오히려 위인이라 불려진다. 장로는 “대사의 스승(오조)은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아도 과녁을 맞추고, 대사(육조)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아도 과녁 너머 어디로 날라가 버립니다.”라고 말하며, 마치 소년만화에서 강자들을 비교하는 듯이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육조의 모티브가 된 육조 혜능 역시, 돌팔이 중으로 시작하여 선종의 수장까지 오른 인물이기에, 영웅 취급 받는 것도 나름의 고증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웅’이란 단어의 의미 속에 담겨 있는 인신, 구원자 등의 이미지로 접근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결국 <죽음의 한 연구>는 끝없는 보편화의 여정, 물고기 하나를 팔만 유정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이며,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물의 탄생을 기원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육조는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돌팔이 중에서 메시아로 변모한다.

물론 이러한 영웅주의적 성격이 짙어서,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후반부 형장에서의 전투 장면 같은 부분이 그렇다. 조그만 몸집의 육조는 본인보다 훨씬 크고 장대한 관리와 결투를 벌인다. 체급 차이가 워낙 큰 탓에 고전하지만, 차츰 육조는 힘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관리를 번쩍 들어 집어던진다. 굳이 왜 이런 무협지스러운 장면을 넣었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여성 등장인물에 관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 박상륭의 작품 세계 속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닌, 여성기로써 수동적으로 다뤄진다. 노자가 말하는 곡신(谷神), 즉 현묘한 암컷이란 개념을 많이 인용하는데, 여성을 각 개인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으로 뭉뚱그려 보는 것 같다. 단지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메타포라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육조는 남자인 촛불중과도 성교하지만, 촛불중은 수도녀를 죽이고 아편을 먹이는 등 행위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수도녀와 장로의 손녀는 그저 육조의 성적 대상이 될 뿐, 그 이외의 어떤 역할도 맡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죽음의 한 연구> 이후의 작품들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칠조어론>은 촛불중을 육조(六祖)의 계승자라는 뜻에서 ‘칠조(七祖)’라 지칭하는데, 그는 스스로를 ‘엿보는 자’라 부른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육조와 달리, 칠조는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이론을 완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박상륭이 귀국 이후에 쓴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에선 죽음을 마주한 소시민 노인의 심리가 두드러진다. 새로운 정신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 했던 박상륭의 여정은 거대한 메시아를 내세운 <죽음의 한 연구>에서 시작하여, 관찰자 촛불중을 거치고, 보다 현실적이고 협소한 죽음을 앞둔 노인의 넋두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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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요약
1. 난해소설이란 악명에 가려졌지만, 죽한연은 박상륭의 사무친 외로움이 투영된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꽤 슬프다.

2. 박상륭의 캐나다 이민은 그의 문학을 더욱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결국 죽한연은 육조의 의식을 통해 우주를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로 환원시키는 과정이다.

3. 지나친 영웅주의 서사 탓에,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장점이 확실한만큼, 단점도 분명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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