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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비평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비평에 대한 희곡, 연극 그 자체에 대한 메타적인 희곡이었다. 그 예상이 완전히 엇나간 것은 아니다. 분명히 <비평가>는 비평에 대한 희곡이고, 연극에 대한 희곡이다. 그것을 메타적으로 읽어내는 접근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 편의 결투를, 칼과 칼이나 주먹과 주먹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로 이루어진 결투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잠깐 작중인물들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해보자.


  볼로디아 당신이 그걸 쓴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안 보러 갑니다. 이제는 연극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 작품들이 지겨워요. 셰익스피어도 그런 작품을 몇 개 썼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쁘지 않은 작품이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극에 관한 작품들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한테만 재미있어요.


  스카르파 이 작품은 연극에 관한 작품이 아닐 겁니다. 명예에 대한 작품이 될 겁니다. 죽음으로 끝날 겁니다. 명예에 대한 작품은 죽음으로만 끝날 수 있어요.


  거칠게 요약하자면, <비평가>는 볼로디아라는 비평가와 스카르파라는 극작가 사이에서 오가는, 명예를 건 최후의 결투이다. 스카르파의 말대로 오로지 죽음으로만 끝날 수 있는. 결투라는 방식으로, 그야말로 가장 연극다운 방식으로 연극에 대해 말하는 희곡. 연극 그 자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 가장 연극적인 구성을 취하는 희곡. 그것이 <비평가>라는 작품에서 내가 받은 인상이다. 이것이 올바른 감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정한 감상이기는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스카르파는 세속적으로 성공했으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극작가다; 볼로디아는 한때 인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시들해진 비평가다. 그의 평론은 가혹하지만 진실을 꿰뚫어보는 힘을 갖고 있고, 스카르파는 그 의견을 듣기 위해 볼로디아의 집을 찾아간다.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과는 반대로, 볼로디아는 스카르파의 새로운 작품에 대해 혹평하고, 2막의 모든 것이 가짜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여자는 완전히 가짜라고 평가를 내린다.


  스카르파의 새 작품은 권투에 대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와 볼로디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작품이기도 하다. 1막의 내용은 젊고 유망하며 얼마든지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권투선수 에릭과, 연륜 있는 뛰어난 코치이지만 노쇠했으며 이제 더는 경기를 하지 않는 테베우스 사이의 시합을 다룬다; 그것은 동시에 세속적으로 성공한 극작가 스카르파와 통찰력 있는 비평가이지만 작품을 쓰지는 않는 볼로디아의 시합이기도 하다. 에릭은 쉴 새 없이 테베우스를 몰아붙이지만 그가 준비한 단 한 번의 반격, 단 한 번의 순간을 꿰뚫는 반격 앞에서 무너져내린다. 링 위에서 그것은 피와 주먹과 폭력으로 표현되고, 링 바깥의 스카르파와 볼로디아 사이에서는 언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볼로디아가 승리한다. 볼로디아는 이어서 스카르파에게 2막의 여자는 가짜라고 말하고, 그것은 당신이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여자를 진정으로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 여자는 가짜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볼로디아를 찔러 죽이는 말은 거짓이나 기만이 아니라 진실, 그가 두 문장마다 한 번씩 언급하는 진실이다. 자기 스스로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왕>의 결말이 그런 것처럼, 끝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비평가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결말은 당연하게도 진실에 의한 파멸이다.


  이 작품의 진실은 이렇다: 볼로디아가 사랑했던 여자는 그를 떠나 스카르파에게로 갔고, 스카르파가 2막에 올린 여자는 바로 그 여자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진실은, 한때 스카르파를 꿰뚫었으며 그의 세계 전체를 바꾸어놓았던 진실은 이제 볼로디아의 세계를 관통한다. 이 결투에서 살해당한 것은 물론 볼로디아 쪽이겟지만, 그러나 스카르파의 세계는 이제 볼로디아의 세계로 변한다. 그를 가르친 것은 볼로디아였고 그는 볼로디아에 의해 만들어진 작가였으니까. 그리하여 <비평가>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번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한 비평가의 연극적인 죽음과, 한 극작가의 비평적인 죽음으로.


*


  일상 속에서, 우리는 아주 나쁜 배우이면서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비평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꾸며내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솜씨로 타인의 자기연출을 간파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기만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내는 솜씨의 조야함에 대해서, 위선과 자기옹호에 대해서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고 비난을 퍼부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세상은 불타버릴 것이고, 사회는 결코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극에 대해서는, 더 나아가서 문학에 대해서는 진실을 요구한다. 스카르파는 연극과 삶에서의 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스카르파 그러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게 오해였군요. 그러니까, 세상을 불태우는 걸 다루라는 거였군요. 사람들을 진실의 신 앞에 놓고 변화시켜서 세상을 불태우라는 거였군요. 볼로디아, 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연극은, 그걸 만드는 사람들조차 변화시키지 않아요. 용감함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실제 삶에서 완벽한 겁쟁이들이고, 무대에서 자유를 외치는 연출들은 실제 삶에서는 끔찍한 폭군들이지요. 작가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만 봐도, 우리는 우리가 쓰는 단어들을 날마다 수백 번은 어기며 살지요. 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해 왔습니다. 당신은 바뀌었나요, 스승님?


  그렇다. 문학은 진실을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실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문학에서의 진실은 일상언어의 명료함이 아니라 시적 언어의 애매함이라는 형태로만 나타나고, 우리 삶을 채워나가는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을 배반하는 형식의 깊이감으로만 나타난다. 문학적인 진실은 무력한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문학 속에서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타오르는 진실은 실제로는 서푼짜리 허구, 다만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척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피상적인 재현조차 거부하는 작가마저도 문학 속에 온전히 신의 언어를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학에 진실을 요구해야만 하는가?


  작중의 볼로디아는 낙담한 채로 이렇게 말한다.


  볼로디아 연극도 마찬가지에요, 연극까지도 소음에 굴복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날 극장에서 소음을 팔고 있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종교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공허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연극은 성직자들을 제공해주지요. 나는 그런 모조품들보다 본래의 교회가 더 좋스빈다. 한쪽 끝에서는 관람하는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쓰레기를 보여주고, 다른 쪽 끝에서는 설교를 하고, 한쪽 끝과 다른 쪽 끝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극, 인간과 인간의 신비로움을 위한 연극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공허와 작은 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연극은 없는 걸까요? 우리가 저항하도록 도와주는 연극 말이에요?


  볼로디아가 말하는 그것, '관람하는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쓰레기'도 아니고, 공허한 형식만을 되풀이하는 '종교'도 아닌 무언가. 그것이 정말로 문학 속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쁜 배우이지만 동시에 예리한 평론가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와서는 고귀함이라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라는 것이 과시적인 스노비즘을 위해서만 원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힘겹게 우리는 요구한다. 삶을 연기하면서도 우리는 문학에 대해서는 진실을 요구한다.


  한국어에는 낙이라는 말이 있고, 또한 한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각각 즐거움과 슬픔의 감정이지만 그렇게 단순한 단어는 아니다. 낙은 단순한 환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낙'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환희가 없다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우리 존재의 비극적인 측면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한은 단순한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 아래에 내재된 갈망을, 그리움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순간에 대한 인상을 동시에 내포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얻어야만 하는 진실이다. 종합적인 것. 총체적인 것. 환희 아래에 숨어 있는 비극과 비극 아래에 숨어 있는 환희. 직접적인 형태의 말로는, 명료한 일상언어의 힘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종합. 문학의 깊이라는 것, 문학의 진실이라는 것은 바로 이로부터, 오직 문학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종합으로부터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