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부 사물의 사실적 존재가 아니라 외부 사물이 정신에 형성한 ‘인상’에 직면한다. 일단 이성이 인상을 통해서만 마주하는 이 내면 영역을 발견해왔다면, 이성은 자신의 임무를 성취하고 있다. 철학자는 이제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토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이 우연히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외부 사물에 눈을 돌리게’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훈련해 왔던 사람이다. 에픽테토스는 그런 태도의 명쾌한 본보기를 제시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자에게 경기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관찰자들의 ‘세속적인’ 무리와 달리 거기에서 자신과 자신의 ‘행복’에만 ‘관여한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우연히 나타난 것만이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승리한 사람만이 승리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렇듯 여전히 현실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사유하는 내가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소리 업슨 대화(모든 사유는 의미상 추후 사유다)의 고독으로 이탈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사람이 어딘가를 갈 때 목표에 관심을 갖지 않고 걷기라는 “자신의 활동”에만 관심을 갖는 것, 즉 “심의할 때는 심의 활동에만 관심을 갖지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경기 우화의 관점에서 볼 때, 먼눈으로 보고 있는 이러한 관찰자들은 한낱 현상 세계의 단순한 허깨비 유령과 같았다.

 이러한 태도를 올림픽 경기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옛 우화에 등장하는 철학자의 태도와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명성이나 이득을 얻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경기 자체를 위해 경기에 관심을 갖는 단순한 구경꾼이다. 그러한 사심 없는 관심의 흔적은 여기에 남아 있지 않다. 자기만이 관심의 대상이며, 논박할 수 없는 자기의 통치자는 논쟁적인 이성이다. 이것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향해 있는 비가시적인 정신의 눈, 즉 진리를 담당하는 내부 기관인 ‘사려 깊은 이성’이 아니라 합리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능력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것은 사유 과정에서 실현되는 하나 속의 둘(소크라테스)과 같을 수 있으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식에 훨씬 가깝다.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중 일부인데... 독린이라 넘 어렵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