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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리구 둘째루 자넨 자네의 결백을 횡재한 사람."
"결백을 횡재하다께?"
"자네와 나와 한 신문사의 같은 자리에 있다가 자넨 사직을 하구 나가는데 난 머물러 있지 않었던가?"
"그래서?"
"그것이 난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구 나면 이튿날버틈 목구멍을 보전치 못할 테니깐. 그대루 머물러 있으면서 신문을 맨들어냈구, 그 신문을 맨드는 데에 종사한 것이 자네의 이른바 나의 대일 협력이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자넨 월급봉투에다 목구멍을 틀얹지 않드래두 자네 어룬이 부자니깐, 먹구 사는 걱정은 없는 사람이라 선뜻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구 말았기 때문에 자넨 신문을 맨든다는 대일 협력을 아니한 사람,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그렇다면, 걸 재산적 운명이라구나 할는지, 내가 결백할 수가 없었다는 건 가난했기 때문이요, 자네가 결백할 수 있었다는 건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그것밖엔 더 있나? 자네와 나와를 비교 · 대조해서 볼 땐 적어두 그렇잖아? 물론 가난하다구서 절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부꾸런 노릇이야 부꾸런 노릇이지. 또 오늘이라두 민족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은 죄만치 복죄할 각오가 없는 배두 아니구. 그렇지만 자네같이 단지 부자 아버질 둔 덕에 팔아먹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는 절개두 와락 자랑거린 아닌상부르이."
민족의 죄인은 채만식이 자기의 친일행적을 반성하는 소설로 알려져있다. 제목부터가 그러하니까. 글 구성도 크게 보면 단촐하다. 먼저 친일 부역행위를 비판하는 사람이 나오고, 거기에 대해서 왜 내가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변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게 윗 대목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궤변이다 싶다가도 조금 혹했다. 나같은 이를 위해서 채만식은 친절하게 마지막에 주인공(친일 부역자)의 입으로 스스로 친일파의 변명을 논파한다. 친절한 구성이고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냥 재미있었다. 참 재밌었다. 채만식 작품들은 다 재미있었다. 그중 제일을 꼽자면 치숙이지만, 생각할 거리는 민족의 죄인이 더 많았기에 민족의 죄인에 대한 단상이나 적는다.
나는 역사교육을 전공한다. 전공했다고 말해도 무방할런다. 이제 남은 학점이 10학점도 채 안된다. 작년 "역사교육론" 시간에는 일제시대나 근현대 독재정권, 또는 독일의 홀로코스트 처럼 민감하지만 꼭 가르쳐야 할 주제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토의를 참 많이 했다. 학기가 반환점을 넘어가고 나서는 하루종일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문제로 책을 읽고 토론하고, PPT를 만들고, 직접 학습지를 만들어 수업 시연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선배들과 동기들, 나의 의견은 늘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소극적으로 나치에 동조한 사람들일지라도(즉 나치를 묵인한 사람들일지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문제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 상황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나치는 정당성을 가지고 악행을 자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첫번째 논리요, 목숨을 걸고 바른 일을 행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는 것이 두번째 논리요, 소시민들의 소시민적 행동을 그저 용인하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바른 일을 한 사람들의 일생을 욕보이는 것이며 다음에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도 역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라는 것이 세번째 논리였다.
하지만 "네 가족충"들의 궤변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듯이,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에서는 친일을 할 수밖에 없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흘러나온다. 당장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역사 앞에서 떳떳하라는 말보다 "배고파"라는 자식의 말이 더 크게 다가오지는 않겠는가? 채만식의 글 덕분에 나는 2020년에 역사교육론 수업을 들으며 나치 치하 독일인의 행동을 평가하는 관조자에서, 1940년 초기 조선으로 타임머신을 타게 됐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되니 또 생각이 달라진다. 정말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대단한 거지,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친일했던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욕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 소시민적 생각을 버리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 소시민적인 생각과 행동이 과연 글렀던 걸까? 오만 때만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작중 등장인물이 하는 소리가 궤변임은 알지만, 또 설득력이 마냥 없지는 않다고 느낀다. 삶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나이지만, 정말로 내 목숨이 왔다갔다 할 때 나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선택할 수 있을까?
가르치기는 반드시, 소시민적 태도를 버리라고 가르쳐야 한다.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시작돼야 다른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도 용기를 얻고 합쳐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서 크나큰 목소리가 돼야 나치의 홀로코스트, 독재정부의 비인간적인 통치 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가 그랬듯이 소시민이 움직여야만 나라가 바뀔 수 있다. 특정 계층(학생)의 목소리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먼저 깃발을 들고 나아갈 용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깃발 들고 나아간 이들의 뒤에 설 수 있는 정도의 자그마한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현실을 전혀 모르고 씨부리는 나의 방구석 망상은 아닐까? 내 목숨과 생활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학생들의 본능에 나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채만식의 자기변호를 궤변이라 생각하지만, 또 신랄하게 논파하지는 못하는 나이기에. 나라도 저런 변명을 하며 내 목숨을 챙겼을 것 같다는 생각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내게 교사가 될 자격이 있을까.
이거 자기변명 오지더라... 시골로 이사한 것도 구구절절 떠들고. 이태준 단편 해방전후랑 같이 읽으면 꿀잼므르. 당시 시대적 상황 생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