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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차가운 현실 속에 살며

뜨거웠던 낭만의 꿈을 기억하고

우리 중엔 초록색 불빛을 믿는 이가 있기에

우리 삶에 눈물과 미소가 가득한 것이 아니겠는지

한줄 요약
끝나버린 낭만을 향하여, 내일의 태양을 믿으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될지라도.


위대한 개츠비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안 그래도 읽어보려고 벼르고 있었고, 이참에 읽게 됐다. 출판사가 하도 많았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가장 좋다는 열림원의 김석희 역을 사서 읽었고, 역자 후기도 포함해서 정말 괜찮게 읽었다. 이건 사족에 가까운 이야기고, 사실 요 근래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서도 가끔 위대한 개츠비가 언급되는데, 작가계의 인싸책이라는 인식 때문에 도대체 왜들 그리 개츠비 타령을 하는가 싶었다.

그래서 어떻냐고? 충분히 할 만했다. 작가계의 인싸를 넘어서서, 그저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재밌게, 감동적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으며, 고전으로 남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물론,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들었다. 이 책의 평가는 이 책 자체가 아닌, 독자의 태도에 따라 갈리겠구나.

위대한 개츠비는 서사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닉 캐러웨이라는 남자가 제이 개츠비라는 남자와 이웃으로 지내며, 그를 관찰하고 그와 관련한 일들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1인칭 관찰자 구조이다.(물론 적지 않게 닉의 이야기도 껴있긴 하다.)

내용도 심히 간단하다. 개츠비가 데이지라는 여자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좀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츠비가 낭만을 손에 쥐려고 발악한 것이 위대한 개츠비의 서사다. 쉽게 말해서 치정극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문장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겠다. "사람들이 흔히 아는 고전의 인식을 만든 작품"이라고. 딱 그렇다. 물론 따지자면 미국 문체에 좀 더 품격을 더한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아는 배경 묘사에 공을 들이고(초반에 저택과 그 장식품, 혹은 인물의 외관 따위를 묘사하는 것에 충분한 공을 들인다는 부분에서), 또 인간에 대한 고찰을 때때로 표현하는 것은 흔히 아는 고전소설에 대한 인식에 부합한다.

그러니 좋게 말하면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품격도 나름 갖춘 문체란 뜻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깊게 파고든다거나 만연체 같은 문장에서 우러러나오는 깊은 감동은 여기서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문장의 풍미를 즐긴다기보다는, 내용과 서사를, 각 인물들을 좀 더 눈여겨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스포라 할 것은 많이 없다. 그리고 개츠비에 대한 인물 평가는 스포와 관계 없이 할 수 있으므로, 이 리뷰에선 그를 중점으로(사실 당연한 것이다) 다루겠다.

개츠비를 다루기 이전에 데이지에 대해서도 먼저 말해둬야겠다. 데이지의 인물 자체가 상징하는 바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데이지가 굉장히 낭만적인 여자처럼 나왔고, 살짝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감이 있다. 또 읽기 이전부터 데이지를 둘러싼 수많은 악평(...)도 읽다보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데이지가 현실을 상징하는 이유는 개츠비 때문이다. 데이지가 아무리 낭만적으로 굴어도, 미친 것처럼 행동해도, 결국 개츠비의 낭만을 따라가지 못한 채 거절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녀는 개츠비를 사랑했지만, 톰도 사랑했다. 그 한 가지 사실에 얽매였단 건, 사실에 구애받지 않는 (개츠비의) 낭만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데이지 자체가 현실을 상징할지라도, 개츠비에게만큼은 낭만을 의미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낭만이었고, 이상 그 자체였다. 그것이 우리에겐 기이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한 여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에 대해, 사랑을 겪어본 자조차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더군다나 그가 사랑을 얻기 위해 한 일들까지 본다면 더더욱 괴상하게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 낭만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이란 게 중요하다. 그렇다, 낭만이다. 낭만을 가진 자만이 개츠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앞서 개츠비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 있겠다고 했는데, 그 태도가 바로 낭만에 관한 태도다.

여기서 말하는 낭만이란,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치환해도 좋다. 이상이 될 수도 있고, 꿈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낭만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소망이며, 목표이고, 또 머나먼 것이다. 어쩌면 닿지 못할 수도 있고, 개츠비의 경우 이미 끝나버린 것이기도 하다. 붙잡기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다. 바로 거기서,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가지는 태도가, 개츠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짓는 것이다.

낭만을 믿는가? 믿는다면 얼마나 믿는가, 그것에 대해 노력하고 있을 만큼? 죽도록 노력할 만큼? 혹 다른 질문으로 바꾸자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미소지을 수 있는가? 혹, 낙관을 얼마나 가질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다. 낭만을 믿고, 낙관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에 미소지을 수 있다면, 개츠비를 이해할 수 있다. 개츠비의 낭만은, 개츠비의 낙관은, 개츠비의 미소는 바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개츠비는 실패했을 뿐이다. 닿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닉 캐러웨이라는 관찰자를 내세웠다. 이는 정말 탁월한 결정이었다. 닉이란 관찰자를 내세움으로써, 개츠비에 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의 낭만을 아주 근접하게 체험시키며, 동시에 그에 대한 객관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의 구조와 장치로서의 기능하는 바에 가깝다.

닉의 존재는, 닉의 관찰은, 닉과 개츠비와의 인연은 그 결말부에 이르러서 모든 의미와 결실을 되찾는다. 앞서 말했듯, 개츠비의 이야기는 치정극이다. 개츠비를 아무리 낭만으로 포장해봤자, 그 결과는 유부녀를 빼앗으려다가(본인 입으로는 되찾는다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한 이야기다. 이야기로 따진다면 통속적인 대중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치정과 허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닉의 독백은 앞선 모든 서술을, 그저 하나의 통속소설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낭만과 위로의 걸작으로 끌어올렸다.(독자의 태도와 닉의 독백의 합작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그저 조롱투의 "참으로 대단한 개츠비 나리"에서 "위대한 개츠비"로 만든 것이 바로 결말이며, 닉의 독백이고, 그토록 유명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 피츠제럴드의 묘비명인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좋게 봤다면 개츠비를 긍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개츠비가 그래서 옳냐고 물을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다. 난 개츠비의 낭만이 옳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나 역시 불가능한 낭만을 품은 사람으로서, 이미 늦었을지 모르는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결코 그의 낭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수단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할 뿐이다.

나는 낭만만큼이나 낭만의 추구에 있어서 옳음과 선함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개츠비와 같은 초록색 불빛을 봤을지라도, 또 그것을 끝까지 믿었을지라도, 결코 개츠비와 같이 걷진 못했을 것이다. 닉과 개츠비와의 관계를 대조군으로 묶자면, 그들보단 덜하고, 다른 사람과 개츠비보단 더 가까운, 그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일 것이다.

그렇기에 난 더더욱 그의 마지막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고, 그대로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 만약은 없다. 어떤 만약도 개츠비를 개츠비로 만들지 못한다. 개츠비가 현실의 벽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개츠비로 남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것도, 그 모두가 개츠비를 개츠비답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건 아무도 알지 못했던(허나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던) 예정된 결말이었다. 바꿀 여지는, 없다.

나의 인생은 개츠비와 같진 않을 것이다. 허나 이것은 자신이 아니다. 불안과 다짐에 가깝다. 내가 아무리 옳음과 선함을 추구한들, 개츠비와 같이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박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나 또한 개츠비의 마지막과 같지 않으리란 이유가 없다. 왜냐면 나 또한 개츠비와 같이, 그 초록색 불빛을 봤고, 그것을 믿으며,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랴. 나는 여전히 그것을 믿고 있다. 그것이 설령 내게서 멀리 달아났다 한들 상관없다. 내일은 좀 더 빨리 달리고, 좀 더 멀리 팔을 내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맑게 갠 아침이......

그래서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