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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목은 지성사란 무엇인가?지만

내 생각엔 '케임브릿지 학파란 무엇인가?' '언어맥락주의로의 초대' 등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책은 포칵, 스키너와 같은 1세대 학자들을 필두로

정치 사상 및 지성사 분야에서 비슷한 문제의식과 학문방법론을 가지고 수많은 연구를 이루어낸

소위 케임브릿지 학파 내지 언어맥락주의자들에 대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1) 그럼 도대체 케임브릿지 학파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20세기 초반 영국 지성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사상사를 이해하는 담론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산업화 이후 전 유럽을 휩쓸었던 마르크스주의였고,

둘째는 자유주의 사관, 소위 휘그 사관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특정 시기의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의 계급구도를 정당화하는 도구다.'라는 관점으로

중세 기독교의 신학은 봉건제의 이데올로기, 계몽주의, 자유주의 같은 사상들을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였다.


반면, 휘그 사관은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입헌군주정 등을 최종지점으로 두고

영국의 역사를 이런 목표들에 도달하기 위한 진보의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시기의 성공회로의 개종을 과거 가톨릭에 비해 개인의 자유, 헌정주의를 발전시키는 사상적 '발전'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에 성공회의 기반을 확고하게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군이며, 가톨릭을 고집했던 블러디 메리 여왕은 폭군이었다.

이런 시각은 먼나라 이웃나라등의 학습서나 여타 대중교양서를 통해 우리 나라에도 널리 퍼져있다.  


위 두 개의 담론은 정치적으로는 대립적이었을지는 모르나 

역사에서 하나의 목표나 도식을 설정해두고, 

과거 사상가들의 논의에서 전제되어있던 당대의 역사적 맥락은 지워버린채 

자신들의 도식에 맞춰서 해석하고, 멋대로 평가해버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케임브릿지 학파로 분류되는 포칵, 스키너 등의 학자들은 이러한 종래의 목적론적인 사상사 연구를 비판하고,

과거의 사상가들을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자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구상, 발전,심화시켜서 오늘날 일군의 학자 그룹을 만들어냈다.



2) 여기까지만 보면 

'엥? 옛날 텍스트 읽을때 역사적 맥락 따지는 건 기본 아니냐?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님?'하고

조금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어맥락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 맥락'이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하고 조금 다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맥락이란 일반적인 역사적 배경 조금 서술하고 그거랑 연관시켜서 그 시대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맥락은 탐구하고자 하는 '저자와 텍스트와 명확하게 연결된' 특수한 맥락이다.

저자와 텍스트를 그저 막연한 시대적 배경 속에 끼워맞춰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그리고 일반론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인 논쟁, 대화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저자와 텍스트가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게 무엇이었는가, 언술을 통해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언어맥락주의 학자들은 맥락을 재구성하기 위해 저자와 관련된 여러 다른 텍스트를 검토하고

텍스트와 관련된 '문헌학적 정보'와, 독자들은 주로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사회학적 조사'도 동원한다.

과거의 저자가 무슨 텍스트를 읽었는지, 어떤 논쟁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독자를 염두해두었는지 등등의 구체적 맥락을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제시한다.


동시에 이 특수한 맥락은 언어적 맥락이란 점도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서든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든 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저자가 텍스트에 동원할 수 있는 단어, 개념, 논리형식, 수사적 기법, 가치관, 역사관 등의 언어적 자원은

그 자체로 시대나 공간, 심지어 동시대라도 계급, 성별 등등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3) 위와 같이 "특수한 맥락 속에서 저자-텍스트가 의도한 바"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방법론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일반화, 단순화된 여러 담론들을 비판하는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옛날에 의상의 화엄사상은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을 정당화하는 사상이었다고 교과서에서 배운적이 있었다.

의상의 사상에 대한 이런 정치적인 해석은 한국사 신론으로 유명한 故 이기백 교수가 주장하던 바였다. 

그러나 의상의 저서를 단순히 신라의 통일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신라 왕실을 옹호하는 텍스트로 보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언어맥락주의에서 보자면 의상의 여러 저서들은 대부분 불교사상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불교사상사적 논의에서 의상이 취했던 입장과 나름의 고민을 무시하고 

신라의 삼한통일과 중앙집권화라는 정치적인 흐름에 의상 사상을 끼워맞춘 해석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 신라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의상이 의식했다고 해도

'그런 정치적 상황을 어떤 언어적 자원을 통해 이해했는가'도 고려해야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정치적인 큰 변화라도 '당시에 과거 여러 나라들이 흥하고 쇠했다.'는 개인의 역사학적 지식을 통해 

저자 개인은 그 사건을 '별 것 아닌 걸'로 인식할 수도 있다.


4) 개인적으로 이 책이 유용했던 것은 앞으로 다른 역사책을 볼 때

유의해야할 점을 명확히 짚어둔 데에 있다.


특히 '근대화'나 '고대 율령국가의 성립' 같은 거대한 도식을 제시하고

거기에 당대의 인물이나 텍스트를 우겨넣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책은 앞으로 지양하게 될 것 같다.

이런 단순화, 환원화가 너무 지나치니까 '정조가 더 오래살았으면 우리나라도 근대화 됐을 것.'

'성리학이 조선 초기엔 개혁적이어서 좋았는데, 사림 거치면서 유교탈레반이 되고 조선 망했음.' 같은 무리한 해석이

대중역사담론을 지배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정조는 서구적 근대담론은 접해본 적도 없는 인물이고 어디까지나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서 활동했던 인물인데

이런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대중교양서는 이런 과거 인물들에게 현대인의 희망을 여과없이 투사하여 멋대로 상상하곤 한다.


포칵이나 스키너는 이미 국내 학계에 소개된지 오래되었고

이들의 연구방법론을 적용한 논문도 있긴 하지만

아직 대중들에게는 홉스봄, e.h 카 같은 인물들에 비해 너무 생소한 이름이다.

이 책이 역사를 새롭게 보는 시각에  기여했으면 좋겠다.


5) 이 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케임브릿지 학파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소개하고 옹호하는 만큼

다른 학파들 -개념사, 지식사회사, 사회사-에 대해서는 많이 공격적이다.

하지만 케임브릿지 학파가 아닌 다른 학자들도 그들 나름의 의견과 논리는 있을 것이다.

거의 '언어맥락주의 선언문'에 가까운 이 책만 가지고 그들에 대한 비판을 여과없이 수용하는 건 공정치 못한 일이다.


진화심리학과 다른 학파들을 균형있게 소개해준 '센스 앤 넌센스' 같은 책처럼

사상사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언어맥락주의 외에 다른 학파도 우호적으로 소개해주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 번역자인 이우창씨가 알고보니까 블로그나 필진 같은 활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역자 해제가 아주 명쾌하고 친절하게 잘 써져 있다.

내용정리할때 편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