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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중요한 종교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주류의 의견을 담은 책을 읽고 싶었다. 그에 따라 시작점으로 잡은 작품이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인데, 보다 지적이고 전문적인 작품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초적인 대중서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이 딱히 내적인 개심을 이끌어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어째서 내가 순전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일 수 없는지, 어째서 기독교적인 사고에 이끌리면서도 끝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지만을 재확인하는 독서가 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의미없는 경험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작품은 내가 그동안 외부자로서 받아들여온 기독교의 교리, 다시 말해 '중세철학'이라는 두루뭉술한 테두리 안에서 받아들여진 기독교의 기초 교리를 주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스콜라 철학의 체계에 있어서는 '불완전성의 유비'라고 불릴 관점이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어 있는 사유가 아니라 한 기독교인의 생생한 고백으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은 기독교인에게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나 추천할 만한 작품이라고는 사료된다. 저자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채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을 전파하는데 열정적이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나열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이 작품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지 못했다. 우선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 세계', 그가 정의하는 '기독교적인 것'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는 서구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동치시키는 발상에 대해 과도한 일반화라는 뉘앙스의 비판을 가하는데, 그런 비판은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다. 서구의 모더니티가 기독교 문화와 별개라는 식의 주장은 더없이 순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서구 근대의 관료제가 구교의 교계체계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저자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자체가 기독교적인 이념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오늘날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념은 칸트의 사유에 기반하고 있고, 소유권적 자유주의의 이념은 로크의 주장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둘은 모두 기독교라는 뿌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서구 근대는 세계의 합리화와 세속화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근간은 기독교적인 사유에 기대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의미로의 순전한 기독교,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조건에 대해 제시되는 해명도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슐라이어마흐나 키르케고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신앙은 분명하게 도약을 요구한다. 우리는 탈마법화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세속화와 유명론과 상대주의는 오늘날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 되었다. 적어도 서유럽과 (오순절주의를 비롯한 일부 열정적인 신앙과 별개로) 동아시아의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런 조건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주는 쿼크와 랩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C, H, O, N과 미량원소의 결합체라고 교육받은 세대에게, 하느님의 나라와 독립가능한 영혼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이란 지구라는 먼지 위를 걸어다니는 탄소 먼지에 불과하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진지하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이중사고(<1984>에서 제시되었던 바로 그 의미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 제시되고 있는 변증은 기껏해야 상대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한 클리셰화된 비판뿐이다.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 스토아주의란 자살만이 유일한 결론인 철학이라고 말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자살이라는 결론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줄 만큼 충분히 설득력있지 못했다.
비판적인 태도로 작품을 읽기는 했지만, 이처럼 단순한 비판들은 모두 곁가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고백건대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에 제대로 감화되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인 믿음에도 감화된 적이 없다. 어떤 점에서 기독교가 정의하는 사랑은 독단적이며 또한 폭력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 다시 말해 카리타스(caritas)는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베풀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신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기독교의 체계에서 하느님이라고 하는 보편자는 성령의 형태로 교회와 인간 안에서 사랑을 실현하는데, 그러나 그 사랑은 실제로는 아주 일방적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기독교의 약속이라는 것은 쌍무적인 계약이 아니라 절대자에 의해 다만 주어지는 구원에 가깝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이 사랑하는 존재이기에 주어지는 사랑에 가깝다. 그런 일방적인 관계를 구원이라고 믿기를 강요하는 것은 내게는 과도한 순진함으로 비친다. 저자는 스토아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 순진한 태도로 정상적인 것, 정의로운 것, 보편적인 것을 찬양하는데, 나는 미셸 푸코 식의 비판을 빌려 그것을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신의 사랑을 찬양하면서도 동성애와 같은 인간적 사랑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못박아 두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처해 있는 딜레마 아니겠는가.
어쩌면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톰 라이트와 함께 하는 기독교 여행>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가 아니라, 좀 더 심도깊고 신학적인 논의를 소개하는 작품을 시작점으로 택해야 했을지도. 그러니까 내가 위에서 제기한 비판들은 사실은 아주 부당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개추먼저 박고 읽을게요
인용을 잘하면 글의 퀄리티가 확 높아지는구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