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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루쉰의 소설 몇 편을 다시 읽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들춰본 뒤로는 다시 펼치지도 않은 책이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사실에 알듯말듯한 부채감을 느꼈던 것 같다. 루쉰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대표작 두 편밖에 읽어보지 않은 것은 일종의 기망에 해당할 테니까.
어쨌거나 오늘 루쉰의 소설 열 편을 다시 읽었고(역본은 전형준 교수가 번역한 창비판으로), 그리고 루쉰이 위대한 소설가라고 하는 내 생각은 딱히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무엇보다도 놀랍다고 생각하는 것, 루쉰이 선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그가 취하는 글쓰기 방식 아닐까 싶다. 그는 그 당시 모더니티의 첨단을 달리는 지식인이었으면서도, 결코 설교로밖에 읽히지 않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를테면 한국 문학사에서 루쉰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광수의 작품과 비교해본다면, 최초의 한국어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에서는 계몽적 엘리티시즘과 단단한 자기확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정>의 인물들은 스스로가 근대성의 기수가 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고, 당연하지만 계몽되어야만 할 조선 사회는 구태와 악습에 빠져 있는 하찮은 것으로 그려진다. 많은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제국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피식민 지식인의 정치적 설교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루쉰의 경우에는 설교하는 어투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 행간에 있어 어느 정도 설교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완곡어법 없이 조야한 날것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에서, 계몽적 지식인의 알레고리라 할 수 있을 주인공은 결코 자기확신에 차 있는 그런 종류의 청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정신증에 시달리는 미치광이처럼 묘사되며, 오직 조소의 아이러니를 통해서만 재현되고 있다. 루쉰은 일관되게 <일기>의 내용을 정신병자의 헛소리처럼 써내려가지만, 바로 그 헛소리가 일말의 진실을 꿰뚫는 말이라고 하는 것, 즉 거대한 식인 사회와도 같은 전근대 중국의 모습을 꿰뚫는 호소라는 것이 작품이 흘러감에 따라 드러난다. 그럼에도 <일기>가 설교가 아닌 까닭은 현실 앞에서 무력한 지식인의 의식, 세상이 계몽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지식인의 의식이란 단지 광인의 헛소리와 같다는 자조가 아이러니와 긴장을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학적인 면에서는 루쉰의 후기 작품들, 그러니까 보다 모던한 글쓰기 방식을 취하는 신화적인 작품들이 훨씬 더 정교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글쎄. 나는 개인적으로 <광인일기>나 <아Q정전>, 혹은 <비누>와 같은 작품에서 후기작보다 더 선명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것은 이들이 비교적 리얼리즘적인, 다시 말해 실제로 보다 선명한 작품들인 탓이겠지만, 리얼한 방식으로 쓰여진 작품이 100년 뒤에 읽히면서도 동시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탁월함일 것이다. <비누>와 같은 작품은 지식인의 자기고백을 그러나 분명한 거리를 두고 그려낸 작품인데, 거기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훨씬 현대적인 작품들에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비누>에서는 위선적인 보수적 지식인 - 이를테면 서양 문화를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영어 교육을 시키는 식의 - 쓰밍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의 계몽적인 의식은 교묘한 방식으로 그의 성적인 욕망과 연결된다. 그가 이야기하는 계몽이란 실제로는 남성적인 주체의 오만한 욕망, 즉 외부세계 전체가 자신이 바라는 바대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욕망과 연결된다. 심지어 그가 길거리에서 만난 거지소녀에 대한 연민은, '무지한 민중'을 '계몽해버려야만' 한다는 식의 욕망이 실제로는 일종의 강간에 대한 욕망이라는 자조로 이어지는데, 이런식의 자조를 이처럼 해학적으로 처리해내는 것은 요즘의 소설가들에게도 험난한 작업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루쉰의 소설은 어느정도는 설교적인 소설, 좀 더 온건하게 말하자면 '혁명적인' 소설이지만, 그러나 그런 설교가 언제나 아이러니와 완곡어법을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성을 유지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이광수의 <무정>과 그의 작품들을 비교했는데, 솔직히 이건 이광수 입장에선 좀 억울한 비교이지 싶다. 요즘에 와서야 <무정>이 형편없는 작품이고 그런 작품이 국문학의 시초라니 부끄럽다는 말들이 많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선구자이면서도 설교자가 아니었던 루쉰이 그만큼 탁월한 작가였던 게 아니었을까.
긴 분량의 글 개추부터 박고 읽을게요 감사함당
고향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