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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심심, 2019.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아마 다들 동의할 것이다. 나만 해도 잠을 오래 못 잔채 침대에 누우면 어린 시절 친모가 내게 욕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때가 종종 있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그저 기분이 꿀꿀할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직접적으로 신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만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암, 심장질환, 만성폐쇄성폐질환, 뇌졸중,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기대수명을 20년이나 짧게 만드는 원인이라면?
소아과 의사인 저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베이뷰 헌터스 포인트라는 낙후 지역에서 아이들을 진찰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아동기의 불행과 건강 손상 사이에 생물학적인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는 자신이 27살 시절에 버클리대학교의 생물학자 타이론 헤이스 박사의 연구실에서 했던 실험을 떠올린다. 그것은 올챙이들에 관한 실험이었다. 올챙이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코스테론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실험은 인위적으로 올챙이들에게 스트레스를 가하여 코르티코스테론이 올챙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올챙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법은 단순하다. 그저 그들의 수에 비해 웅덩이의 물을 조금만 주면 그만인 것이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얼마 안 가 개구리가 될 발달 후기 단계의 올챙이들은 코르티코스테론에 노출된 결과 변태 속도가 높아져 더 빨리 개구리가 되어 웅덩이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원래 실험이 기대한 결과였다. 그런데 발달 초기의 올챙이들은 사실상 성장이 멈췄다. 게다가 면역 기능과 폐 기능이 떨어지고 삼투조절 문제(고혈압)가 생겼으며, 신경 발달에도 손상을 입는 등 예상치 못한 부정적 결과들이 나왔다.
그렇다면 올챙이가 아닌 인간에게는 이러한 부정적 결과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저자는 생각했다. 올챙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코스테론에 노출되는 것처럼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에 노출된다. 그때부터 저자는 아동기에 코르티솔에 노출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선행 연구를 찾기 시작한다.
몇 달 간의 작업 끝에 저자는 한 논문을 발견한다. 빈센트 펠리티 박사와 로버트 안다 박사 연구 팀이 1998년에 쓴 〈아동 학대 및 가정 기능장애와 성인기 주요 사망 원인들과의 관계:부정적 아동기 경험(ACE)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펠리티 박사는 비만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비만 환자들과 그들의 아동 학대 경험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그는 이후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역학자인 안다 박사와 함께 ‘부정적 아동기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줄여서 ACE 연구에 착수한다. 그들의 목표는 18세가 되기 전에 환자들이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ACE의 열 가지 구체적 범주는 다음과 같다.
1. 정서적 학대(반복적)
2. 신체적 학대(반복적)
3. 성적 학대(접촉)
4. 신체적 방임
5. 정서적 방임
6. 가정 내 약물남용(알코올중독자나 약물남용 문제가 있는 사람과 함께 거주)
7. 가정 내 정신질환(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 또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과 함께 거주)
8. 어머니가 폭력을 당함
9.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10. 가정 내 범죄행위(가족 중 투옥된 사람이 있는 경우)
이 열 가지 범주는 하나에 속할 때마다 1점으로 계산되었다. 그리고 펠리티와 안다는 ACE 지수가 높을수록 건강에 대한 위험도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컨대 ACE 지수가 4점 이상인 사람은 0점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만성폐쇄성폐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3.5배 컸다.
몇몇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ACE의 열 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하고 열악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인 만큼 인과관계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최초의 ACE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탄탄한 중산층 거주지인 샌디에이고에 사는 이들이었고 70%가 백인, 70%가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누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후속 ACE 연구들도 최초의 연구 결과가 옳았음을 계속해서 입증했다. 즉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소득이나, 인종, 의료 접근성과 무관하게 흔하고 심각한 질병 다수의 위험 요인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앞서 올챙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코스테론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얘기했다. 이 코르티솔은 혈압과 혈당은 높이는 한편, 인지(명료한 사고)를 억제하며 기분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코르티솔은 수면도 방해하며 지방 축적을 자극할 뿐 아니라 몸이 당분과 지방 함량이 높은 음식을 갈망하게 만든다. 생식기능 역시 억제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우리 몸은 피드백 억제라는 일종의 스트레스 온도 조절 장치를 사용해 스트레스 반응이 제 할 일을 마친 뒤에는 저절로 꺼지게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비유로 옛날 옛적 인류의 조상들이 숲에서 곰을 마주칠 때를 예시로 든다. 당장 곰을 마주칠 때는 코르티솔이 분비되지만 곰을 피해 안전한 동굴로 돌아오면 코르티솔의 분비는 중단되고 평상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만약 곰과 함께 동굴 안에서 살아야 한다면? 즉 아동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의 생활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환경이라면? 아동은 계속해서 코르티솔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스트레스 반응이 너무 자주 활성화되거나 스트레스 요인이 너무 강력할 때면 피드백 억제 장해가 생긴다. 즉 스트레스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나 체내 시스템 전체에 계속해서 코르티솔을 쏟아붓는 것이다.
미 전국 과학 회의는 스트레스 반응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주로 운동선수들이 경기 도중에 느끼는 ‘긍정적 스트레스 반응’,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처럼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 반응’, 그리고 아이가 학대 등 강력하고 빈번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부정적 경험을 하는 동안 성인의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유독성 스트레스 반응’이 그것이다.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건강하게 발달하려면 긍정적 스트레스와 견딜 만한 스트레스를 모두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의 ACE 지수가 1점씩 올라갈 때마다 견딜 만한 스트레스는 유독성 스트레스로 변한다. 그리고 유독성 스트레스는 뇌의 구조와 기능만이 아니라 아직 발달 중인 아이의 면역계와 호르몬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DNA를 읽고 전사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그 생물학적 영향은 점점 퍼져나가 신체 내부 기관들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또한 저자는 다른 연구진과 협력해 트라우마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트라우마의 증상 수가 많은 청소년일수록 코르티솔 수치가 더 높고 해마의 부피는 더 작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처음 해마의 부피를 측정한 지 12개월에서 18개월이 지난 뒤 다시 한 번 해마를 측정한 결과 그들의 해마가 더 작아졌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들이 더 이상 트라우마 상황을 겪지 않을 때도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들은 계속 줄어들었는데 이는 과거에 겪은 스트레스의 여향이 여전히 그들의 신경 체계에 작용한다는 뜻이었다. 그것 말고도 ACE 지수가 4점 이상인 아이들은 과체중 또는 비만일 가능성이 2배, ADHD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32.6배에 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 같은 아동기의 불행이 평생에 걸친 건강 손상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핵심은 스트레스 요인을 적절히 완화해줄 수 있는, 즉 완충제 역할을 해줄 성인의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유독성 스트레스의 영향을 해결해줄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충분한 수면, 정신 건강관리, 건강한 인간관계 유지,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영양섭취, 마음챙김이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은 유독성 스트레스의 영향을 완화해줄 치료에 불과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방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아동에게 ACE 검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개별 병원 차원이 아닌 전체 공중보건 차원에서 국가와 사회가 아동기의 유독성 스트레스 노출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저자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영역이다. 실제 사회에서 그것이 적용되는 과정은 정치의 영역이다. 생각해보자. 이미 불우한 환경에 물들어진 아동의 곁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을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또한 충분한 수면, 정신 건강관리, 균형 잡힌 영양섭취 등등을 시행하려면 기본적으로 물질적 환경이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ACE의 악영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게다가 ACE 지수가 높을수록 여러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면 기업들이 ACE 검사를 통해 ACE 지수가 높은 이들의 채용을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ACE 지수 자체가 어떤 사람을 애초부터 구제불능으로 낙인찍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든다. 아마 단순히 의료적 접근뿐아니라 아동복지나 빈민 문제, 사회적 시선 등 여러 영역에서 간학문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싶은데..  어차피 방구석 백수가 할 고민은 아니지만.. ㅎ;;
의사가 쓴 책이지만 간간에 있는 유머를 포함해서 읽는데 어려움은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했고 아이들의 사례를 다룰 때에는 그의 진정성이 가슴 깊이 느껴지기도 했다. 감춰놓았던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 사실을 어떻게 잘 적용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나갈지에 대해서는 아마 우리 모두가 생각해볼 일인 것 같다. 내 트라우마도 생각나고 암튼 뭐 그랬다. 기분이 꿀꿀하다. 앞으로 내가 아프면 이 책이 생각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