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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지난 번 <눈먼 부엉이>와 같은 계기로 읽은 책이다. 본론부터 말하겠다. 같은 좌절이지만 그 결이 다르다. <눈먼 부엉이>가 잔혹, 피폐, 혼란 등의 단어로 요약된다면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허무와 상실"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

로맹 가리는 하늘을 나는 새다. 그렇기에 관조적이다. 그는 높은 곳에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듯이 그저 세상을 내려다 바라볼 뿐이다. 이 책은 그가 바라본 세상을 담은 그림, 지도, 즉 조감도이다.

이 조감도에 그려진 것은 대체 무엇일까?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성의 파괴(<어떤 휴머니스트, <지상의 주민들>).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한 신인류의 등장(<비둘기 인간>). 진짜만을 추구하다 영원히 소외되는 인간들(<가짜>,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인간들을 가로질러 죽음으로 내모는 오해의 벽(<벽>)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런 세상을 보고 새는 페루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죽는다. 왜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이 곳일까?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새들은 조분석 섬을 떠나 모래사장에서 죽는다. 또 의문이 생긴다. 왜 굳이 이 곳일까? 차갑고 딱딱한 바위뿐인 섬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에서 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그 황량한 곳에서 카페를 영업하는 어느 한 남자도 그런 이유로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새들 사이에서 유예되던 그의 죽음은 "인간 세상"이란 또 다른 바위섬에서 온 어느 한 여인을 만나고 결정된다. 소설의 마지막 남자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 또한 모래사장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 남자는 소리 없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작가 로맹 가리는 총소리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있는 인간 세상, 즉 바위섬은 너무나도 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의 죽음으로써 이 조감도는 완성된다.

조감도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추한 이면에 있는 이런 허무와 상실을 보여준다. 이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을 믿고 사랑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럼에도 계속 사랑받고 싶었던 걸까? 이 조감도는 어떤 세상을 그린 것일까? 절망일까? 희망일까? 어쨌든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ㅏㅏㅏㅏㅏㅏㅏㅏ 단편 독후감 적기 ㅈㄴ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