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와 세네카의 극기주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평가에 따라 그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변모가 있었다.
세네카로부터 기원되는 극기주의.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 주 어떤 것에는 새로운 태도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현대적이고, 만일 어떤 것이 정점에 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니체의 태도에 있어 정점에 달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셰익스피어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에 의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만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 어떤 극적 유용성을 본능적으로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극의 주인공들이 고조되는 비극의 순간에 취한느 하나의 자기극화의 태도입니다.
-셰익스피어에게서 철학 또는 사상을 발견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에세이의 결론으로 셰익스피어는 그저 시를 짓기 바빴다는 말이 결말부에 나옴.
극기주의란? 극기주의적 태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고 자기에게 무관심하거나 적의를 가진 세계에 사는 사람이 취하는 보호수단이고, 자신을 기운나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의 밑받침으로서 항상 있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 자신을 기운나게 하는, 가장 현저한 근대적인 태도입니다. 극기주의적 태도는 기독교적 겸양과 정반대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에는 제정 로마 시대와 전연 다른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와해와 혼돈의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는, 사람에게 어떤 확고한 것을 주는 것 같이 생각되는 감정적 태도-그것이 다만 “나는 내 자신일 뿐이다” 식의 태도일망정-가 환영받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 노예들에게나 유용하게 보였던 극기주의적 태도가 교만, 회의주의, 냉소와 얼마나 잘 혼합되어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시대상을 일반적으로 진단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역사극 6개를 집필연도가 극중의 시대와 반대로 되어 있고, 셰익스피어가 시대의 혼란을 권선징악, 질서회복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옛날의 비평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마치 사상은 정밀한 것이고, 정서는 막연한 것인 듯이 말합니다. 사실상 정밀한 정서와 막연한 정서가 있습니다. 정밀한 정서를 표현하자면 정밀한 사상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지력이 필요합니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정서적’ 직업군, 즉 시인에게 사상이 정밀하다기 보다는 정서가 정밀하다, 농밀하다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는 뜻.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가 했던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개의치 않았다면 이미 꿈의 해석이 훨씬 마쳐 있을 것이다” 식의 말이 떠오르네요, 비트겐슈타인도 문득 떠오르구요.
위대한 시는 모두 어떤 인생관에 대한 착각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가 호머나, 소포클레스나, 버질이나,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는 무엇인가 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접촉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정밀한 정서는 지적 설명을 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사실상 셰익스피어도 단테도 어떤 구체적인 사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색이라 함은, 철학자가 철학을 이론화하듯, 어느 상관관계를 가진 하나의 사상을 만들거나, 발전시키는 류의 작업을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듯합니다. 물론 사색이야 했겠죠. 단테에게서 아퀴나스를 볼 수 있다는 식의 의견이 일리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시인의 출발점은 그 자신의 정서입니다. 우리가 이 출발점까지 파들어가 보면 셰익스피어와 단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 우리는 단테가 아퀴나스의 철학을 믿었다고도 안 믿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르네상스 시대의 혼란한 철학을 믿었다고도 안 믿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좀 더 나은 철학에 의해서 시를 썼더라면, 그의 시는 오히려 졸렬한 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실러가 어디선가 언급했던 오성의 파수꾼이 막는 상념이란 말이 떠오르네요. 단테나 셰익스피어가 시 창작을 하기 앞서 그 원류가 되었던 원초적 정서는 우리가 묘사할수도 없을만큼 농밀하고 숨겨진 것일 겁니다. 그 일부분을 떼어 사상으로 말할 순 있어도 결코 전체적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순 없을 겁니다.
시인은 시를 짓고, 철학자는 철학을 구상하고, 벌은 꿀을 만들고, 거미는 실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자들은 다만 행동을 할 뿐이지, 믿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또한 어떤 것에 그리 오래 접촉하지 않아도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거기에서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통일성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통일적인 것은 누구보다도 셰익스피어이고, 확실히 통일이 없던 한 시대의 여러 가지 경향을, 그것이 통일될 수 없는 한 통일한 것이 셰익스피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극들에서 보이는 여러 파편적인 면모를 두고 통일성이 없는 시인이라 말하기엔 확실히 억울한 감이 있습니다. 정당한 평가가 아닌 그저 폄훼일 뿐. 이럴 때면 셰익스피어 역시 어떤 면에서는 하이퍼링크 스타일로 인내를 가지고 읽어 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가장 최선은 흥미 있는 극부터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게 좋겠지만요.
읽은 에세이:
T.S.엘리엇 – 셰익스피어와 세네카의 극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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