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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연세 초등 국어사전(feat. 한자어 속뜻사전, 한자어원사전) 29~33 / +5

"어, 이 한자 어디서 봤는데!" 같은 게 많아지고 있어서 기분 좋아. 근데 5p 읽는 게 참 힘들어. 이거 읽고 좀 쉬다 혼공역사 읽으면 세계사가 그렇게 재밌더라. 뭔가 워밍업 같은 느낌임.



데스노트 완전수록판 1219 ~ 1362 / + 143

아마 오늘 읽은 부분부터가 아쉽다는 그 부분 같은데, 확실히 L이 죽는 순간이 조금 허망해. 바쿠만에서 보면 1부로 끝내고 싶었다는 의지를 보여줬었으니까 그 결말을 봐서 라이토도 엘도 죽는 그런 결말이었으려나? 원래 생각한 결말도 보고 싶다. 그리고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 노래 가사가 있는데, 샤먼킹이라는 애니메이션 오프닝에 '정의의 깊은 곳에는 어둠이 숨어 있다네~'라는 구절. 라이토도 엘도 둘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하는데 그 속에 어둠도 같이 있는 거 같아. 라이토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고, 엘은 잡을 수만 있다면 비인도적인 방식도 마다하지 않아서 그런가봐. 어쨌든 반 왔으니 이제 반남았다.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식 : 역사 134~149 / +16

중화 문명권을 배울때랑 달리 서양 문명권은 좀 더 치열한 거 같음. 좋게 말해서 치열하다고, 나쁘게 말하면 알랑거리는 거 같음. 중화가 묵직한 펀치를 주고 받는 느낌이면 서양은 쨉만 오지게 날리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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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유럽 세계는 로마 교황이 정신의 영역을, 세속군주(황제, 왕)들이 물직의 영역을 관장하는 이원적 체제, 중세로 접어들게 된다. 이같은 분업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로마 말기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일종의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쟁탈했기에 그의 권력에는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쿠데타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전임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통치했었다. 그는 이전 정권의 부정부패를 비난하여 차별성을 둬야했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황제 전제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정치적 모험이었지만, 충분히 승산있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정통성을 확보하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면, 아예 물갈이를 하는 게 낫다. 그러자면 탄압 속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택하는 편이 유리했다. 비잔티움 터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동유럽으로 옮긴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로마 기득권층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판을 짜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런 의도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직접 주교들을 소집하고 진행까지 맡은 최초의 공의회에서 그가 급선무로 여긴 것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굶주리면 단합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스도교권은 박해 받으면서도 권역을 확장했지만, 밀라노 칙령으로 합법화되자 그간 묻어두었던 교리를 둘러싼 갈등이 독사처럼 꼿꼿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시 그리스도교에는 많은 갈래가 있었다. 정통 교리가 확고히 섯다면 나머지를 이단으로 몰면 되지만, 아직은 모든 교리와 교파가 경쟁하던 상황이었다. 주교에게 정통 교리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콘스탄스누스에게는 통합 자체만이 중요했다. 종교와 정치의 관점이 얽힌 채 전개된 게 니케아 공의회였다.

교리상의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그리스도가 유력한 종교의 지위에 오르자 그리스도가 종교 발전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인이나 제자들이 신의 아들이라 말한 인물이었다.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신들처럼 변신한 신이 아니었으며, 유대교나 후대의 이슬람교처럼 신의 대리자도 아닌, 신의 아들이었다. 이 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리스도는 신인가, 아닌가?

그리스도가 신이라면 그리스도교의 골간인 유일 신앙이 무너진다. 신이 아니라면 유일 신앙은 유지되지만, 포교와 마케팅의 메인 광고 모델을 잃게 된다.

'신의 아들이라도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유일 신앙이 그리스도교의 큰 특징이라고 믿었다. 신은 절대적으로 유일한 존재여야 그리스도교가 성립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교회의 이해관계와 상충했다. 아리우스의 학설을 채택할 경우 애써 이룩한 신약은 쓸모가 없어지고 구약만 정전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럼 유대교와 다를 게 없었다. 다시 '유대인만의 종교'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이런 이유로 아리우스파는 패배가 거의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는 동방의 신도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입장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리면 교회를 중심으로, 아리우스가 승리하면 동방의 더 많은 회중을 중심으로 종교 통합이 진행될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그는 공의회의 격앙된 분위기를 달래고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려 애썼다. 반아리우스파가 다수였기에 아리우스파 주교를 설득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주교는 두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판결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런 배경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의 옛 터에 콘스타티노플을 건설하고 제국의 수도를 동방으로 옮겼다. 이 사전은 서유럽 세계에는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다.

이탈리아의 로마 토박이들은 제국의 고향인 로마에서 동쪽으로 중앙 정부가 이동하자 자신들이 경시되고 있다는 불만과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 위기를 느낀 것은 로마의 주교들이었다. 실제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아리우스파가 서남아시아의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교 그대로, 혹은 변형된 형태로 받아들여져도 동방 정부는 방관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교주구 자체가 이단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정치적으로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교회는 힘이 미약했다. 따라서 서방의 주교들은 이탈리아에 그리슫교의 중심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교황이다. 세속의 황제가 동방에 주력한다면, 서방은 신성을 관장하는 황제가 있어야 한다. 이런 라이벌 구도가 교황이라는 맞불작전을 낳은 것이다.

교황이라는 신무기를 장착한 교회 입장에서는 동유럽과 서남아시아 일대를 주름잡는 아리우스 이단이 눈엣가시였으나, 더 중대하고 급박한 문제가 있었다. 중부 유럽의 게르만 민족 대부분이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동방은 멀고 황제가 있지만, 중부는 이탈리아 바로 위에 있다. 아직 세속에서는 힘을 쓸 수 없던 교황은 외부의 힘이 절실했다. 때마침 프랑스 북부에 같은 종류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게르만의 한 부족이 있었다. 클로비스가 이끄는 프랑크족이다.

질서의 중심 로마가 사리지고 게르만족의 이동이 어지러운 격변기. 갈리아 일대를 점령하고 국력을 키워야할 때, 클로비스는 로마가톨릭과 결합한다. 이것으로 중세의 틀인 세속과 신성의 분열이 이뤄졌다. 하지만 세속도 신성도 힘이 약했다. 프랑크족은 갈리아 일대만 가졌고, 로마가톨릭은 소수파였다. 서방을 잃은 동쪽의 황제는 독자 노선을 걸으려는 교회를 곱게 보지 않았다. 따라서 둘은 각자 생존해야 했다.

메로빙거 궁전에서 궁재로 일하던 카를 마를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해 로마가톨릭 세계를 보호했다. 전공에 힘입어 대권 주자가 된 그의 아들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를 타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어 아버지의 못다이룬 꿈을 실현했다. 하지만 쿠데타로 권력을 쥔 그는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정통성을 확보할 기회를, 교황이 제공했다.

교황청이 침공 당하자 교황은 피핀에게 SOS를 타전한다. 피핀은 교황청을 보호하고 라벤나 일대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교황령의 시작이다. 교황은 이후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에게 직접 제관을 씌어주고 로마인의 황제라는 직함을 수여했다. 샤를마뉴는 실로 황제에 어울리는 재목이었다-프랑크 촌놈이라는 점과 그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걸 빼면 말이다-. 그는 제관을 받으러 로마에 가기 전 이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정복하고 이후에도 더 많은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부활에 꿈이 있었고, 교황도 그를 황제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크 제국은 한 세대를 버티지 못하고 동, 서, 중부 프랑크으로 분열한다-베르됭 조약-. 지중해 문명권에 그친 로마 시대와 달리 중심이 유럽 중앙으로 확대되고 남유럽 라틴 문명에서 로마-게르만 문명으로 확장된 시대의 흐름에서 옛 로마식 제국 체제는 발붙이기 어려웠다.

프랑크는 유럽의 중심이었지만, 시대 자체가 강력한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샤를마뉴가 죽자마자 중심이 해체됐다. 이후 유럽 역사는 강력한 지리, 정치적 중심이 자리잡지 못했다. 유럽은 분열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중국은 분열기가 통일을 낳고, 중앙집권적 제국을 성립했다. 한제국의 모순은 2차 분열기로 이어졌고 당에 이르러 모순은 해결되었으며 제국을 완성했다.
그러나 오리엔트에서 크레타,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중심을 이동한 서양 문명은 한때 제국을 이뤘으나 중국과 비교해 느슨한 체제였다.
중국은 이민족을 복속 시키고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로마는 전성기에도 파르티아에 고전하고 게르만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중원을 정복하면 한화 정책을 추구했으나, 로마를 위협한 이민족은 로마를 멸망시키고 문명의 중심을 이동했다.

두 문명의 차이는 중심의 차이였던 것이다. 중심을 유지한 중국, 이동과 변화를 거듭한 서양. 이제 이 차이가 어떤 영향을... 은 내일 읽어야지..





+ 1월 결산

거미입니다만, 문제라도? 13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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