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팡세의 2회 독회날입니다. 헛됨의 장에 관련된 내용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독회는 2/7 예정되어 있습니다.
주최자의 판본은 민음사로, 본문에 표기되어 있는 숫자들에 관해서는 을유판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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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는 유독 잘 알 수 없는 구절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가령 "그는 하인 넷을 거느리고 있다"하는 부분이나, "그 사람은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 라는 구절이 그렇다.
하인 넷이라는 부분에서 묵시록의 4기사가 떠올랐다지만 글쎄, 확신이 드는 것이 없다.
본 장의 제목이 헛됨(혹은 공허,혹은 허영 혹은 성서적 의미에서의 헛됨으로도 쓰인다고 한다.)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만큼 구절자체가 무의미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58 - (381) :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치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오히려 수긍하고픈 마음도 들 정도로.
경험의 부재로 인한 단락적인 결정과, 많은 경험으로 인한 사고의 경도적인 판단...
둘 중 어느 한 쪽에만 힘을 기울이지 않고 균형잡힌 조화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지 못해서 우리는 쉽게 현명해지질 못하는걸까?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정말 그렇다. 비단 창작만의 문제도 아니다. 독서도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괴롭지 않은가.
작품을 접한 직후의 그 감동, 전율,많은 생각, 깨달음(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의 총체들을 속히 표출하고싶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글은 지지부진해지기만을 반복한다.
아직 작품의 후광 내지는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에, 담을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역으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다고 느껴지는 이 공허함.
그 감정들을 추스르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샌가 적잖케 유리되어 있어,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잊어버리고 만다.
"그림을 너무 멀리 또는 너무 가까이서 볼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그외에는 너무 멀거나,높고,가깝거나,낮다. 그림에 있어서는 원근법이 이 지점을 정해준다. 그러나, 진리와 도덕에 있어서는 도대체 누가 이 점을 정해주겠는가."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것들을 가늠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시간을 들이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고적 체계는? 이 실체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있어서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삼아야 하는가?
무엇이 확고한 기준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두가 저마다를 기준삼아 각자의 수심을 지니고 있을 뿐, 확고하게 단정지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선은 형체없는 것에 크게는 법,작게는 규칙에서 도덕까지, 가피를 부여해 그것을 인식하기 한결 편하게 한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고 따르는 것은 "법" 그자체로써의 의미가 아닌 다만 우리의 시야에 잡아둘 수 있는, 가급적 근엄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는 건물이나 동상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들조차 모두 헛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62 - (308)에 대하여: 왕을 한명의 개인으로써 보는 것이 아닌, 뒤따르는 수많은 신하와 세력의 크기등에 압도된 채로 바라보는 것. 그럼에도 그것에 그다지 눈치채는 법없이 왕의 용안에는 기품이 흐르고 운운하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람을 사람 개인이 아닌 어떤 초월적 존재로 보는 것이 이러한 공허한 말 몇마디를 만들어낸다. 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말 몇마디를 하기 위해서 어전에 선다.
63 - 330에 대하여 :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믿는 대중의 우매함을 기반으로 대부분의 허영은 유지된다. 그러니 건전한 이성을 기대하고 세워진 지혜나 존중같은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64 - 354 : 인간의 천성이란 항상 전진하는 것만은 아니다. 전진하기도 하거니와, 때로는 후퇴도 한다. 열병에는 열기와 오한이 있다. 오한과 열기는 둘 모두가 똑같이 열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두 신호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만들어 온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상의 선의와 악의도 대체로 이와 같다.
항상 옳고, 진실되며, 좋은 것만을 쫓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위,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이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선이 세상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때, 악또한 정반대의 것을 열심히 행한다. 또, 선한것이 좋은 것과 동일시되지 않는 경우도 더러있거니와, 그 반대도 물론 존재할터다.
73 - 164에 대하여 : 즐거움으로 하여금 우리 눈을 가리지 못할때에는 별 수가 없다. 가혹하고 매마르게만 느껴지는, 자신이 살고있는 살아가야하는 현실에 눈을 맞추게 될때, 우리는 불현듯 우울해지고, 슬픔을 느낀다. 무능력한 자신을 마주보는 것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볼때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것들을 늘 생각하기에 이르는 탓에 모두가, (혹은 나에게) 이것을 모르기란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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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댓글로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몇가지 안쓴거 같은데 양이 꽤 되는구나...
- dc official App
이번 편은 확실히 앞편 '차례'보다 분량이 많아서 할 얘기가 많을듯. 이번 편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파스칼식 이성 비판과 중도의 자세, 그리고 상상력이라고 표현된 일종의 재.기였음. 앞 독회에서 다른 독붕이가 말했다시피 파스칼은 데카르트식 이성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모양인데 이 편에서 그 부분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었음. 아마 '회의주의자'들이
데카르트를 비롯한 자연과학의 이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파스칼식 비판의 논조를 대충 알 수 있었던 거 같음. 두번째로는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중도의 자세를 유지하는게 좋다는 파스칼의 태도였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사물을 바라볼 경우 백프로 오류가 생길 수 있는데 파스칼은 이 점을 몹시 경계한 거 같음.
이런 의미로 무신론자들에게 향하는 비판일 수도 있고, 지나친 경건주의로 빠질 수 있는 종교 내부에 대한 자성으로 볼 수도 있을 거 같음. 흥미로운 점은 강 저편에 있는 사람에 관한 얘기였는데 이는 自와 他를 가르는 지점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음. 강 저편에 있는 사람 혹은 무리는 나와는 다른 이단이거나 적이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물론 파스칼은 이에 비판적인 입장이고 때문에 강물이라는 상징을 표현해서 설명했다고 느꼈음. 마지막으로 상상력 부분인데 이 편의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만큼 중요한 거 같아 각잡고 읽었는데 ㅈㄴ 어렵더라.. 일단 데카르트식 이성과 대비시켜 상상력이라는 상징을 사용한 거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 데카르트가 말하는 상상력은 일종의 정신적 재.기 같음.
자연과학적 이성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능력? 이 안에는 신앙심도 포함되어 있는 거 같고 한 인간의 천재성 같은 부분을 모두 뜻하는 거라고 이해했음.
강 건너편의 사람들의 구절이 일종의 진영논리인 것 같아서 이점도 많이 생각하게 되네 - dc App
아 오타. '데카르트가 말하는 상상력'에서 데카르트가 아니라 파스칼임ㅇㅇ
아 추가로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듯한 얘기들이 많았는데 이런 부분들을 보면 확실히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허망한 존재라는 특유의 기독교적 사고를 읽을 수 있는 거 같음.
난 이 상상력이 양날의 검 같은거라고 생각했는데, 특정 직업,계층의 사람을 능력이 아닌 외관상에서 오는 압도감과 거기에 본인의 상상력을 가미시킨 허상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 라는 식의 이야기로도 보였고.. 좋은 것들이 항상 올바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정도의? - dc App
이 상상력이란게 어떤 가능성? 미래?를 은유하는 거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양날의 검 같다는 표현도 맞겠다 싶음ㅇㅇ 뭔가 나도 읽으면서 양가적인 입장이 나타난다고 느꼈거덩
데카르트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건 확실하더라. 인간, 자신이 존재한다는걸 의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묻는 점이 인상적이었음. 이건 초점하고도 이어지는 거 같아 포커스를 무조건 땡긴다고 사물이 똑바로 보이지 않는거처럼, 끝없이 의문만 갖거나 끝없이 답변만 하는게 정답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음
나도 상상력에 대해서 양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느껴졌음 ㅇㅇ.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감각'을 뜻한다고 볼 수 있나? 민음 81번 마지막에서 "감각과 이성 사이의 전쟁"이란 표현을 쓰고 있어서...
나는 감각, 이성, 상상력을 다 다르다고 이해함. 상상력은.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이성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 지고의 경지에 이른게 상상력이랄까?
상상력은 감성, 이성과는 다른 거라고 해석하던데. 감성은 맛, 향, 촉감등을 느끼게 해주는 현실의 매개체하면 상상력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 거라고 해석하고 있는 거 같음. 인간의 정신은 이성 감성 상상력으로 이루어져잌ㅅ다는?? 의견인듯
나는 감각과 이성사이의 전쟁을 "우리가 진실된 것이라고 믿고있는 것"과 그 실체간의 마찰?같은걸로 생각했어. "우리가 감각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 전혀 다른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 dc App
일단 이성과 상상력을 대비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성과 상상력은 확실히 별개의 개념처럼 보임. 그런데 상상력을 "한편으론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허위와 오류의 주관자"이라 말하기도 해서 '감성'과 '상상력'을 별개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임.
뭔가 3가지로 딱 나눠지기보다는, 흐름에따라서 그때그때 적당히 섞여질 수 있는 경계선이 얕은 개념같기도 하고... - dc App
한편으론~ 이라는 표현을 쓴 걸로 봐서 그 부분은 상상력이 가진 독립적인 부정이라고 봐도 좋을듯?
일단 오늘의 주제는 '헛됨'이었고,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전도서 말씀에 기반하고 있는 듯함. 파스칼은 회의주의를 비판했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장에서 말하는 <회의주의=이 세상의 헛됨을 깨닫는 것>으로 읽힘.
더 나아가 민음 63번의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은 인간의 결함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그런 헛됨과 비참이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으로 이어질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듯. 아마 비참 파트 가야 더 명확해질 것 같은디...
부귀영화나 지위,명예의 실체를 파해치려는 노력들도 보여져서 사람의 허영심에 관한 이야기들도 눈여겨보게 되더라. - dc App
아 민음 55번, 77번에서 "서로 닮은 것 때문에 웃긴다.", "닮았다는 것만으로 찬양받는 그림"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있는지 궁금함.
그림관련 구절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닌가 싶어. 실재하는 것들에게는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그 현실을 모방해 그려낸 것들에겐 찬사를 보내는데 이것에 의미가 있는가 하는 식의. - dc App
"서로 닮은 것들"의 구절도 개개인을 놓고보면 그저 닮은 두 사람일 뿐인데, 단순히 나란히 놓은 것에서 모종의 것들을 발견한다는 점만으로 이들을 평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런의미로 받아들였어. - dc App
ㅇㅎ 이것도 결국 '세상의 허무'라는 키워드에 속하는 걸로 볼 수 있겠네
"그림을 너무 멀리 또는 너무 가까이서 볼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그외에는 너무 멀거나,높고,가깝거나,낮다. 그림에 있어서는 원근법이 이 지점을 정해준다. 그러나, 진리와 도덕에 있어서는 도대체 누가 이 점을 정해주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 진짜 흥미롭지 않았음?
가치의 상대성을 파스칼식 문체로 표현한 거 같음
뒤에 얘기를 끌어와도 될 지 모르겠지만, 그 개념을 초점이라고 표현해본다면, 파스칼은 그 초점을 찾는 일에 대해 몰두했던 거 같아. 이미 차례, 허무에서도 반복해서 중도, 적절을 중요시하는 견해를 내비추었는데 그래서인지 초점을 찾는 거에 대해 고민하더라
ㅇㅇ 뭔가 지금 시대에도 통용되는 고민과 문제들이라 더 반가웠음. 특별히 더 와닿은 부분이라 따로 메모까지 해놨음
이 구절은 본문에서도 다뤘지만 정말 여러생각들이 들더라. 실체있는 것들에게서는 기준을 찾기가 비교적 이하지만 개념적인 것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준삼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자꾸 들더라. - dc App
ㄹㅇ 끝없이 발전, 상승시켜야 한다는 이미지잖아? 진리, 윤리, 도덕, 정의 같은 면은. 나도 그런 이미지로 해석하고 있었음. 파스칼은 오히려 초점을 맞춰서 제대로 봐야만 한다고 말하는게 놀라웟음. 관념에 대한 내 이미지를 부숴준 거 같아
일단... 을유 올재 민음 삼국으로 나뉘어 서로 말이 사맞디 아니한 점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나도 책이 이렇게 까지 서로 다를 줄은 몰랐네...
판본을 우습게 본 내가 미안할 뿐이야... - dc App
허무 파트랑 비참 파트가 많은 부분에서 반복되는 이야기가 겹쳐서, 사실 허무 파트만 읽고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못참고 뒤까지 읽어버리는 바람에 허무 파트만 갖고 얘기하기가 힘들다 ㅠㅠㅠ.
나도 6장 초반까지 보고있어서 자꾸 뒷내용이랑 퍼즐맞추기 하는데... - dc App
맞아 뒤로 갈 수록 퍼즐이 맞춰들어가는거 놀라움
'파스칼이 회의주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논의해볼만한 것 같음. 분명 데카르트의 회의를 반박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음 98번에선 "회의주의는 이 병에 대한 약이고 이런 공허한 생각을 깨버린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해서... 파스칼의 회의와 데카르트의 회의가 어떻게 다른지 논의해보고 싶음.
오.. 그러게. 뭔가 회의도 이성이라는 개념만큼 파스칼에겐 다른 의미의 개념인듯
구절로만 보면 신이 무조건적으로 자애로울 것이라고 멋대로 믿어버리는, 허황된 모습을 반박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 dc App
민음사 54.p 주석 9번에 파스칼이 언급하는 회의주의는 피론주의를 옮겨적은 것이다.라고 언급되는데, 이게 위의 구절에서도 같은 의미에서 언급한걸지 헷갈리네. - dc App
아마 같은 의미인 것 같음. 70번에서 회의주의는 회의론자가 아닌 사람들로 인해 더욱 북돋아진다고 했고, 98번에서 (회의주의 아닌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을 회의주의가 깨버린다 했으니 ㅇㅇ
재송합니다.. 빨리 읽겠습니다
41-75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천천히 읽을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중도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나오는 거 같아 - dc App
다 읽었다 ㅋㅋㅋ 엄청난 내용이네
일단, 파스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음. 인간은 죽음이라는 끝이 정해진 허무한 존재이고, 그 삶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무하기에, 죽어 신의 품에 향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뭐 이런 걸까?
근데 또 그와 동시에 현재와 솔직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제일 좋았던 건 상상력으로 인해 인간이 현재를 충만하게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부분이었음.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고 단지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행복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키야.. 진짜 대단한 말인 거 같음. 한병철 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ㅋㅋ
미래의 행복을 위해 달리기만 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음. <팡세> 읽기 정말 잘 한 거 같다
그 구정은 나도 얼얼해지는 부분이었는데,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다가 이 구절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게 되는 대목이더라. 우리는 수많은 순간 속을 상시 점멸하면서 사는건데, 그 찰나에는 눈을 들이지 않고 지나간 것들과 앞으로 닥쳐올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정작 이 점멸하는 순간을 나도 모르는 새에 - dc App
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고 보니 삶을 보내는 이 방식 자체가 헛되다는 생각에 이르더라. 어쩌면 이게 파스칼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을까 하고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여러모로 가치있는 구절이었다로 생각해. - dc App
뭔가 살짝 중간중간에 '괜찮아', '위로해줄게', '다 잘 될 거야' 이런 키워드 들어가고 단문체로 바꾸면 딱 요즘 힐링 자계서로도 쓸 수 있을 거 같음. 물론 파스칼은 조금 더 추상적인 컨셉을 염두하고 말한 거였겠으나 나같은 범인은 이렇게밖에 이해를 못하겠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