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우리는 고려 인삼(=인삼, 다른 종류의 인삼일 경우 다른 명칭을 사용하겠음)이 과거 동서양을 얼마나 크게 아울렀던 교역 상품이었는지 잘 모른다. 서양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명사들이 인삼을 좋아하고 중요시했던 것 역시 모른다. 북미 지역 등에서 고려 인삼과는 다른 종이 재배되었다는 것도, 그렇게 고평가를 받았던 인삼이 오늘날 왜 상대적으로 궤멸적인 인지도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설혜심의 『인삼의 세계사』와 그 책 안의 백여 개의 참고문헌들이 뒷받침하는 천 개가 훌쩍 넘는 각주들을 목도하기 전에는 모두들 그럴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삼의 무게감과 중요도는 21세기 사람들의 상식 밖이었다. 이 책의 결론을 먼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동양이 서양을 압도했던 시기에는 인삼에 온갖 미사여구와 찬양이 쏟아졌지만, 서양이 동양을 역전한 이후에는 인삼이 비과학적이고 정확한 효능에 의문부호가 붙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나름의 비판을 받고 있는 ‘대분기’론을 수용했는데, 이는 동양과 서양의 발전 수준이 뒤집힌 것은 1820년경이고,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양이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을 제친 것은 고작 200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분기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중국이 영향력을 과시했던 기간이 유럽의 기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긍정하는 바이기 때문에 대분기론의 진위 여부에 따라 『인삼의 세계사』의 중심 논지가 흔들릴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말하고자 한 바가 동서양이 각각 우월했던 기간의 길이와는 큰 연관이 없기 때문에 대분기론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주제를 벗어난, 헛심 빼는 일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삼의 흥망성쇠는 중국의 흥망성쇠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인삼은 애초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전,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선교사들이 중국의 이모저모를 둘러본 후 유럽에 제출한 인삼의 내용이 포함된 보고서들은 만주와 조선 땅에서 주로 출토된 인삼의 산지를 중국 본토로 보고하는 등 몇 가지 오류가 산재해있긴 했지만, 인삼이 유럽에 신비로운 나라 중국에서 중요시된 신비한 약초로 소개된 덕분에 여러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이런 신비한 이미지 외에 무엇보다도, 인삼은 확실히 금전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 신비한 약초는 입소문을 타 유럽에도 분명하고 확실한 수요가 있었지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출토된 인삼(=화기삼)을 단순히 중국에 집중적으로 판매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처럼 인삼은 금전적으로도, 소유한 본연의 이미지로도 유럽에서 간과할 수 없는 존재감과 능력을 선보였다.
인삼에 대한 찬양 일변도가 깨진 것은 인삼의 든든한 뒷배로 작용했던 중국의 쇠퇴 때문이다. 앞서 파견한 선교사들 덕분에 유럽인들은 중국의 국력이 자신들의 예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중국이 유럽보다 아늑히 뛰어나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 발생한 아편 전쟁은 이러한 인식에 확신이라는 쐐기를 박았다. 이 전쟁으로 중국의 신비로움은, 적어도 군사력과는 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이 확실히 체감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중국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군사력이 기대 이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 시기는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군사력이 강한 쪽은 무엇이든지 우월하고 그렇지 못한 쪽은 열등하고 야만적이라는 낙인이 사정없이 찍혔던 시기이다. 기존 중국의 신비함은 문명, 즉 자기네들에 기댈 줄 모르는 옹고집이 되었으며, 특유의 문화는 고리타분함이 되었다. 이 서양의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내려다보는 편향된 시선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옮겨간 후, 여태까지 존중받았던 중국,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관은 더 이상 유럽에게 존중받지 못했다. 기존에 숭상되었던 동아시아의 여러 물품들에게 사정없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해졌고,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물품들, 즉 의심의 눈초리를 끝내 떨쳐내지 못한 물품들은 세계의 중심이 옮겨간 후에도 분명한 효용성을 입증한 물품인 도자기, 비단 등과 다르게 끝없는 저평가의 길로 들어섰다. 인삼 역시 중국이라는 국가가 그렇듯 더 이상 ‘신비롭게’ 바라볼 대상이 아니었고, 인식은 지속적인 내리막길을 탔다. 과거에는 위중한 상태의 중국 황제가 산삼으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한 행동이 산삼을 ‘만병통치약’처럼 보이게 했다면, 신비로움이라는 기존의 스탠스를 저버린 후에는 중국의 황제가 산삼의 효능에 기대는 행동을 위생의 중요성도 모르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인들은 인삼의 정확한 효능을 분석하는 것에 실패했다. 인삼은 해독제, 정력제, 각성제 등 여러 분야에 고른 효능을 보였고, 이 덕분에 귀하디귀한 약초로 취급받았었지만 세계의 맹주로 갓 올라온 시기의, 여러 종들의 성분을 분석하고 처방하기 시작한 유럽은 인삼의 성분을 확실히 분석하지 못했다. 인삼 자체가 성분을 조사하기 까다로웠던 종이었던 이유도 있고, 인삼이 더 이상 ‘영물’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상품 대상’으로서의 가치는 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품질이 좋은 인삼을 중국에 비싼 값에 판매하는 것에 급급해 이 귀하디귀한 상등품이 성분 검사에 ‘낭비’될 기회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세계의 법은 유럽이 주도했고, 더 이상 주변 이웃들의 눈치와 성향을 감안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옳은 것이었고, 그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예 성분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삼은 유럽의 기술력과 인삼 검사 방식의 잘못이 아닌, 애초 약효가 명확하지도 않은 종을 싸고돈 동아시아의 잘못으로 터부시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인삼은 더 이상 영물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도 높은 상품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동양의 신비를 앞세운 인삼의 유럽 시장은 침체되었지만, 인삼의 최대 소비지인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압도적인 양과 질의 인삼들이 소비되었다. 고려 인삼의 신화는 유럽을 비롯한 서양에서 저물었지만, 북아메리카에서 재배되는 삼인 화기삼은 엄청난 수요를 가진 수출 종목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인삼의 인지도는 인삼의 신화와 동시기에 수그러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인삼의 궤멸적인 인지도 형성의 가장 큰 요인은, 중국의 몰락으로 고착화된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아시아 지역만을 바라볼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물론 지역 차별적이었지만 정확히는 문화 차별적인 성향이 더 강하다. 인삼으로 예를 들면, 비하와 경멸의 대상은 정확하게는 ‘삼을 중요시하는 동아시아인들’이 아닌 ‘삼을 중요시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식하고 야만적이라는 비하는 동아시아의 심마니들뿐만이 아니라, 화기삼을 찾아나서는 미국의 심마니들에게도 해당되었다.
이는 미국 언론이 남북간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미국의 심마니들에게 더더욱 모진 평가가 내리는 현상을 부채질했던 감은 있지만, 언론의 농간이 아니었더라도 이들의 신세와 취급이 점점 험해질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또한, 심마니라는 직업군 이외에도 화기삼 자체도 원래 고려 인삼보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고, 거기에 더해 취급하기 까다로운 삼의 관리 방식이 어느 정도 확립된 동아시아와는 달리 이들의 관리 방식은 너무나도 중구난방이었고, 또 아마추어적이었다. 중국을 향한 화기삼의 무분별한 물량 공세와 서툰 관리 방식이 합쳐져, 화기삼의 가치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폭락했고, 결국 북미에서의 인삼 사업은 미국인들의 인식도, 금전적인 가치도 허망하게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과거 서양에서 특출난 효능과 동양산 특유의 신비로움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던 인삼의 고고한 이미지가 완벽히 몰락하는 과정을 함께했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제목 그대로의 ‘인삼의 세계사’는, 우리의 배경 지식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감이 있어 『인삼의 세계사』의 내용은 너무나도 새롭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내가 이 낯선 분야의 낯선 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압도적인 양의 참고 문헌과 각주들이 이 책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가히 한 페이지당 각주 세 개씩은 족히 포함되어있고, 이 촘촘하고 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근거는 자연스럽게 작품과 작가에 대한 믿음으로 싹트게 되었다. 반대로 이처럼 압도적인 양과 참고 문헌들이 함께하는 책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기존의 상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모든 내용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추천해주신 교양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이 독후감을 마무리하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