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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이면,
타자는 공포,
소수는 괴물,
세상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비정하다.
한줄요약
그의 분노는 어딜 향했어야 하는가?
웰스의 소설은 타임머신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이다. 가만보면 웰스도 참 대단한 것 같다. 타임머신은 타임머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상했고, 투명인간은 (나름 과학적인) 투명인간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상했으니...... 물론 투명인간의 원리에 대해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다만, 시대를 감안한다면 발상 자체를 놀랍게 여겨야 할 것이다.
투명인간은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다. 에필로그까지 합해도 240페이지 가량 된다. 타임머신이 그보다 더 짧았던 걸 생각하면 웰스는 짧은 분량으로도 압축적인 서사와, 그 자신만의 필력으로 정말 짙은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아, 정정하겠다. 짙은 여운이 아니다. 멍한 충격이다.
그러니 투명인간의 내용에 대해 떠들기 전에, 웰스의 필력과 문체, 그 개성에 대해 한 번 얘기해야겠다. 웰스의 문장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상처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책 읽다가 상처 받는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웰스의 문장은 냉담하다. 타임머신 리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웰스는 아주 냉정하게 문장을 진행시킨다. 결코 어느 것도 길게 끄는 법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고 서술하고 넘어가버린다. 웰스만큼 시간을 냉정하게 보내는 작가가 없다. 그 내용이 얼마나 비정한 것이든 간에, 얼마나 안타까운 비극이던 간에, 웰스는 결코 그를 위해 할애한 적이 없다. 모든 문장이 가진 시간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은 웰스의 간결한 문장과 합쳐져 냉담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훅 들어오는" 문장이 꽤 많다. 연출 또한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서술하기에 연출 자체보다는, 그 연출 이후의 흐름이 충격적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에게 여운을 주는 문장은 독자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거나, 혹은 독자의 멱살을 잡고 쥐어흔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웰스의 문장은 받아들여야 할 가혹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반응도 보지 않은 채 뒤돌아 떠나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책을 읽다가 "이걸 이렇게 넘긴다고?"라고 외치게 되더라도 이해해야 한다. 그게 웰스의 방식이다.
또 한 가지 웰스의 특징이라면, 웰스의 발상은 결코 발상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타임머신에선 미래를 매개로 현재에 대한 경고를 하고자 했다면, 투명인간에선 '타자'에게서 배척받는 어떤 소수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소수자의 타락과 분노, 광기의 끝이 투명인간에 담겨 있다.
작품 투명인간이 보여준 "타자"의 존재는 대부분의 우리를 가리킬 것이고, 작중 내의 투명인간이 시사한 '차이'에 대해선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투명인간을 읽고서도 투명인간을 다른 어떤 소수자와도 대입하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에 "타자"란 존재했던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혹은 그마저도 생각 못할......)
소수자를 향한 다수자의 차별과 혐오, 그들이 가지는 정서에 대해서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비유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로 '보이지 않는 차이'를 말 그대로 풀이해낸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인종, 성별, 나이, 계급을 뛰어넘어서, 성격, 사고, 의견, 신념, 행동거지 등등에서 비롯된 '보이지 않는 차이'는 타인에게서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이것을 쉽게 표출하지 않거나,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투명인간의 공포가 해체되는 시점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다. 어찌보면 그것은 '보이는 것'들과 똑같이 보이게 됐으니, '차이가 메워지는 것'으로 "타자"가 가지는 공포들이 해소됐다고 볼 수 있고, 혹은 그러한 '차이'가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몰이해의 영역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와 미지로부터의 공포가 해소됐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보이지 않는 상태'가 바뀌어야만 했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 투명인간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각, 그를 향한 공포에 대해서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그의 책임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투명인간은 작중에서 선을 몇 번이고 넘나들었다. 그는 너무나도 자주 분노했고, 그의 성질머리는 아무리 이해해주려 해도 괴팍함을 넘어선 분조장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가 죽었을 때(그 죽는 장면마저도 웰스답게 충격적이다) 그의 업보라며 동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업보가 정말로 그의 혼자만의 문제였을까? 그가 그렇게 자주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정말로 그의 인격적 결함뿐인가? 그렇다면 물어보자. 그리핀이 아닌 다른 사람, 곧 켐프 박사나 다른 더 뛰어나고 훌륭한 인성의 인간이 투명인간이 됐다면 그리핀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투명인간의 죽음을 그의 개인적 인격적 결함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그의 죽음이 전부 사회와 타자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는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괴물 또한 그의 업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의 업보가 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투명인간, 곧 그리핀의 가장 주된 정서는 분노였다. 무엇에 대한 분노였는가? 그건 이해받고자 하는 갈망과 동시에 이해받을 수 없으리란 체념이 충돌하면서 생긴 감정의 잔해다. 그의 분노는 누굴 향했을까? 그는 분명 자신에게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토록 경솔하게 행동해버림으로써 자신이 끔찍한 처지에 놓이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오래 분노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자살했을 테니까. 그는 결국 타자, 곧 보이는 모든 인간들을 향했다.
켐프에게 유일하게 그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종종 분노하긴 했지만), 결국 그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 점이 바로 그리핀이 이해받고자 하는 갈망이 분노의 근원적 감정 중 하나였음을 증명한다. 물론...... 그는 결국 더욱 분노하게 됐다. 타자란 비정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투명인간에게 세상은 결코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손을 내민 적도 없고, 동정하는 눈길조차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분노는 어딜 향했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괴물이 되어버린 약자들이 수도없이 널리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타자"로 비쳐지지 않을까? 우린 그들이 선을 넘기 전에, 괴물이 되기 이전에도 "타자"였을 것이다. 어쩌면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알기보다는, 알수록 두려워 하고, 혐오스러워 하고, 피하려 하는.......
우리의 삶은 "타자"에 얼마나 가까웠는가.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도 어느새 모르게 투명인간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분노가 우릴 덮쳤을 때, 그제야 비로소 깨달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마저도 모른 채 더욱 공포에 떨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는 진실로 타인에게 "타자"였던 적이 없는가......
웰스의 냉담한 시선이 날카롭게 우리의 양심을 파고든다면, 그걸로 작품 투명인간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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