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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온갖 이율배반과 혼미 앞에서, 사람이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견해와 그 삶을 버리는 행위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어야 마땅할 것인가? 너무 이런 방향으로 과장할 일은 못 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보다도 더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21)


  앞서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삶은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지 예/아니오로 대답할 수만 있는 게 아니고

  대답의 양상이 무척 다양할 수 있음을 봤어.

  그 중에선 가령 "부정적으로 대답한 사람도 마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


  이를 이율배반이라고 불렀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대답으로부터 어떤 분석적 결론도 도출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까뮈는 그렇지는 않다고, 그렇게 "너무 이런 방향으로 과장할 일은 못 된다"고 말을 하는 거야.

  즉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이에 앞서, "부정적으로 대답한 사람도 마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20)하는 경우에 있어서,

  까뮈가 덧붙인 문장이 있었어. (내가 글의 흐름 때문에 전편에서 바로 인용하진 않았는데)

  그는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니체의 기준을 따른다면, 실상 그들은 여하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20)

  라고 말해.

  이 문장은 우리가 지금 보는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인데,

  여기서 니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알 필요는 없어. 


  다만 일상적인 우리의 감각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가령 어떤 남자애가 관심 있는 여자애에게 매일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으면서,

  너 쟤 좋아해? 라고 물어보면 "아니 엄청 싫어하는데!"라고 대답할 때 우리는 남자애가 여자애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

  무슨 과제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말을 건다든지, 유난히 그 사람의 연락에 신경을 쓴다든지,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믿겠지.

  이건 꼭 남을 속이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즉 스스로도 "이 사람은 절대 싫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차분히 내 행동을 되짚어봤을 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잖아.


  이럴 때 우리는 이성(정신)의 선택과는 다르게 행동(육체)의 선택이라는 것도 있고,

  후자는 전자와 무관하게 혹은 적어도 다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두 선택이 갈리는 경우 어쩌면 오히려 후자(행동-육체)의 선택에 더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관점이야.


  까뮈는 자살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자살하고 싶다"라고 틈만 나면 되뇌이면서도 계속 살고 있는 사람은 / 그 진심에 있어서는 계속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즉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을 기각하고, "넌 진심으로 살고 싶어하는 거야"라고 말을 하겠다는 얘기지.

  아무리 자살을 단지 죽음이라는 게 너무 무서워서 못하고 있을 뿐, 정말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 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의 위협과 마주치면 뒤로 물러선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보다 살아가는 습관을 먼저 배워서 익힌다. 나날이 조금씩 더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이 경주에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21)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지.


  요지는 우리가 사람들의 다소 이율배반적인 행동에서도 그들의 자살에 대한 "사상"을 분석해볼 수 있다는 거야.


  그치만 이 이율배반이 중요한 이유는 이때까지는 다루지 않았던 또 하나의 주제,

  '희망'이 바로 이 이율배반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지.

  앞으로 보겠지만, 이 희망이라는 개념은 부조리를 이루는 어떤 축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부조리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할 어떤 것이야.



  6.


  "끝으로, 이 이율배반의 본질은 내가 회피라고 칭하는 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회피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이른바 파스칼적 의미에서의 '위락' 이하의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상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론의 제3의 주제인 치명적인 회피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내세의 삶(우리가 그 삶을 얻을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결국은 삶을 배반하게 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속임수 말이다." (22)


  뒤로 가면서 이 '희망'의 의미는 보다 더 구체화 돼. (특히 3절 <철학적 자살>에서)

  그렇지만 우리는 우선 여기서 이 '희망'이라는 것이 자살과 마찬가지로,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

  혹은 그것의 해법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돼.


  맥락과 꼭 맞지는 않지만 우리는 소위 자기개발서가 말하는 희망을 떠올려 볼 수 있고

  교회에서 말하는 "내세의 삶"이 주는 희망을 떠올려 볼 수 있지.


  문제는 이 희망이라는 것이 자살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적실한 응답처럼 보이기 때문에

  까뮈는 문제를 조금 변경 혹은 확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돼.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서 밝히고 추적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과연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 것인가, 모든 사고의 방법론들이나 초연한 정신의 유희에서 벗어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문제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2)


  즉 희망 - 부조리 - 자살 이라는 삼항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이 될 수 있느냐는 게 까뮈의 핵심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이 책이 시작되는 서문에서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결론으로 여겨져왔지만 이 시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두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14)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에 대한 결론은 1장을 통해 까뮈 나름의 방식대로는 명확히 밝혀지고


  2장부터는, 말하자면, 살들을 덧붙이는 작업들이 이루어져.



  *  *  *


  이렇게 우리는 1장 1절을 통해 까뮈가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보았는데,


  1장 2절에서는 지금까지 전제된 것으로 느껴졌던 '부조리'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주로 이루어져 있어


  그래서 2절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 편에서는 부조리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것인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글을 써보도록 할게


  그리고 글의 진행에 대한 피드백이나, 내가 언급하지 않은 문장 중에서 얘기해보고 싶은 건 언제나 댓글로 달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