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자 독후감
김사과, N.E.W, 문학과지성사, 2018.
지인의 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곯아떨어진 뒤 직장에 나선 그의 집에 홀로 남아 앞으로는 아마 갈 일이 없을 근처 피자집에서 해장을 위해 피자 한 판과 치즈오븐스파게티를 사와 하루종일 먹으며 이미 열 번은 넘게 본 무한도전 무한상사 시리즈를 유튜브로 돌려보다 잠이 들었다. 일어나 얼마 안 있어 지인은 24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고 그는 양주에 타먹은 파인애플 시럽 냄새 진동하는 방을 치우고 나는 그의 서재에서 책을 하나 골라 옆에서 느긋하게 앉아 독서에 매진했다. 마치 예술학교를 갓 졸업한 초짜 감독의 인디영화같았다.
뭐 서론은 각설하고 또 김사과의 책이다. 이제 세 권을 읽는 것이기에 섣불리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의 팬이 되어버린 것 같다. 광기는 언제나 문인의 친구였지 않는가. 또한 광기를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인생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광기야말로 삶이고 인간임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 광기가 어떤 방향으로 작용되는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다.
이 소설은 《천국에서》보다 더욱 광기에 물들어져 있다. 다만 이번에는 중산층이 아닌 상류층의 이야기로 그 광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내용만을 두고 보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시작하여 지상파의 아침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홀린 진부한 상류층 남성과 하류층 여성의 야릇한 로맨스 이야기다. 그 결말이 상류층 남성이 하류층 여성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잡아먹는 것으로 끝나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계급의 이야기도 아니고 젠더의 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독해를 하려면 충분히 어느정도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꾸려낼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양새다. 이 소설의 본질은 광기, 그것도 욕망을 향한 광기다. 여기서 욕망은 물질도 비물질도 모두 포함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자신들의 욕망에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여기에서 주체적 삶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작가가 인물들을 욕망의 노예로써 좀 더 직설적이고 과장되게 표해냈을 뿐, 기실 우리네 중 그 누가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도 떳떳하게 애기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얘기 못 한다. 나 역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고 그러한 욕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것. 다들 나름의 욕망이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이다. 혹자는 신부나 스님, 도인과 같이 속세와 떨어져 진리를 찾는 이들은 욕망의 노예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진리라는 욕망에 갇힌 존재들이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욕망과 동거한다.
그렇기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욕망과의 적절한 관계정립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그것이 실패했을 때 벌어지는 참극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관계정립의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왜일까. 혹시 그 방법은 각자가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한낱 작가가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 보편성을 얘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라 여겨서일까? 아니면 그저 작가 역시 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까? 내가 보기엔 후자가 가깝지 싶다. 아마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글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욕망과 어떻게 ‘건강하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가. 평생의 화두로 남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욕망의 광기로부터 벗어나고자 읽기엔 부적절한 책이다. 오히려 욕망에 매몰된 이들이 책을 읽고 변태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 같다. 내 경우에는 감각적인 느낌보다 여러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는데 임세모가 그의 노래 〈생각에 대한 생각〉에서 말했듯이 생각을 그만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댓글 0